오성(鰲城 李恒福)과 한음(漢陰 李德馨) 이야기

오성 이항복(鰲城 李恒福, 1556년~1618년)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년~1613년)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친구가 된 오성[鰲城, 호(號)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호가 한음(漢陰)인 이덕형(李德馨)은 특히 선조의 신임이 대단했다. 임진왜란 동안 병조판서를 번갈아 맡았던 두 사람은 국난의 위기를 수습하고 대처한 조선 중기의 충신이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나중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어, 그래서 백사인 호보다 오성으로 더 잘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이란 관직을 두루 거쳤다. 한음 이덕형은 1561(명종 16)년에 태어나 1613(광해군 5)년에 세상을 떠났고, 단짝 친구인 오성 이항복은 1556(명종 11)년에 태어나 1618(광해군 11)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음 이덕형이 오성 이항복 보다 5살이나 연하였는데 결혼은 같은 해에 했다. 오성은 권율장군의 딸을, 한음은 정승 李山海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성과 한음

 

선조(宣祖) 때는 유난히 충신이 많았는데 영원한 우정으로 유명한 오성(鰲城)과 한음(漢陰)도 그에 속한다.

오성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1556-1618)이고 한음은 이덕형(李德馨1561-1613)이다.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 한음은 탁월한 재능을 타고나 부모따라 서울로 이주하는데 한눈에 미래를 예견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1517-78)이 당장 조카인 판서 이산해(李山海1539-1609)에게 사위로 맞도록 한다. 율곡(栗谷)의 안목으로 둘은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왜란 때도 큰 역할을 했다. 오성은 65세에 죽었고 38세부터 3번이나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한 한음은 광해군(光海君) 때 간신 이이첨(李爾瞻)의 모함으로 물러나 53세에 죽었다.



"오성과 한음의 지혜"

 

어느 날, 웬 농부 하나가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도련님들, 소문에 두 분이 신동이시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제 억울한 사정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농부는 코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관청의 사또께 찾아가야지.. 왜 우리를 찾아왔지?”

 

한음이 말했다.

 

“사또께 찾아가봐야 해결되지 않을 일이기에 도련님들을 찾아왔습지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인지 들어보기나 하지."

농부에게 사연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농부가 자초자종을 털어 놓았다.

며칠 전 농부의 아내가 들판을 가다가 소변이 너무 급한 나머지 길옆에서 용무를 보았다.

그런데 용변을 본 곳이 하필 그 마을의 세도가인 황 대감네 밭 옆이었고

마침 황 대감이 그 길로 지나가는 중이었다.

 

황 대감은 예전에 정승을 지낸 세도가로서 자기 집 밭에다
오줌을 눈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런 무식한 것이 있나?
남의 밭에다 함부로 소변을 보다니 이런 고약한 계집 같으니!”

 

오성은 자기 집 안방에다 오줌을 눈 것도 아니고 길바닥에다
더구나 거름이 필요한 밭에다가 잠깐 실례를 한 것 뿐인데도
늙은 대감은 이만 저만 성을 내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마음보가 뒤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늙은 구렁이 같은 대감이 이 일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황 대감은 농부의 집에 일 잘하는황소가 한 마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이야기는 뻔한 것이었다.

 

“당장 관가로 가서 곤장을 맞든지
네 집의 황소를 끌고 오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거라!”

 

늙은이 망령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라고 생긴 것이 분명했다.

오줌 한번 잘못 누었다고 황소 한 마리를 바치라니
이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하지만 힘없는 농부의 아내는 우선 살고보자는
생각에 황소를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관가에 가보아야 사또도 쩔쩔매는 황 대감을 이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농부는 그래도 설마설마 하며 조마조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바로 오늘 아침에 황 대감 집 하인들이 몰려와 황소를 끌고갔다는 것이었다.
저런 못된 사람들이 있나?”

“그러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
이야기를 다 들은 오성과 한음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니 도련님들께서 머리를 쓰셔서 제 황소를 좀 찾아주십시오.
저는 그 놈 없으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농부는 눈물을 짤끔거리며 매달리듯 애원했다.
“알겠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소를 찾아줄 터이니 돌아가 있게.”
“정말 고맙습니다.”

 

농부가 돌아가고 난 뒤 오성과 한음은 머리를 맞대고 황소 찾을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 좋아 이렇게 한번 해보자.”

오성이 방법을 한 가지를 찾아내고는 한음에게 일러주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한번 해보자.”
한음도 좋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튿날 아침, 오성과 한음은 황 대감이 가마를 타고
행차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길목인 황 대감 집밭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황 대감의 가마가 저만치에서 보이자 둘은 서로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아니, 웬 꼬마 녀석들이 대감님 행차를 막고 싸우고 있느냐? 어서 길을 비켜라!”
그래도 둘은 못 들은 척하며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니 황 대감의 행차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바로 한양에서 왔다던 그 꼬마들이냐?
그런데 왜 길을 막고 싸우고 있느냐?”
황 대감이 가마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저희가 한양에서 온 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오줌을 누려고 하니까
이 친구가 말하기를,여기다 오줌을 누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말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오줌을 누려고 하니까 그래도 말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 친구가 떼를 쓰는 바람에 제 바지에 오줌을 싸 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 저것 보십시오. 저 친구가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 된 짓을 하는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 표정이 굳어졌다.

 

" 얘들아, 기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농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농부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치마를 벌렁 까 올리고 일을 보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겠나 ?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농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한편, 오성과 한음은 황 대감에게 암행어사가 안 통하면, 병조판서,

그 것도 안 통하면 영의정, 나랏님까지 팔아먹을 셈이었는데

일이 쉽게 되려고 첫 단계에서 끝나버려 조금 싱거운 기분이 들었다.

 

*세상을 비웃는 해학, 하늘을 속이는 지혜*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간에 불이 나 전부 타버려서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그 동안 항아리에 가득 모아 놓았던 釘(쇠못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오성이 권율의 사위가 된 일화로서, 오성의 집의 감이 아주 풍성하게 달린 감나무 가지 중 몇 가지가 권율 대감집의 담을 넘어 갔다고 권율가의 노비들이 몽땅 따가니 오성가의 노비들은 주인이면서도 감을 제대로 수확을 못하는 지경에 처했다. 당시 옆집 권율대감 집은 세도가 당당하여 오성의 집안에서는 감히 따질 수가 없지만, 이 사실을 노비들에게 우연히 전해들은 오성은 권율대감 집으로 몰래 들어가 권율대감이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주먹을 문종이 사이로 푹 집어넣었다.

 

권율은 갑자기 문종이가 찢어지면서 손이 들어오니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느 놈의 짓이냐고 호통을 치자~~~.

 

그 때 오성은

"대감님 이 손이 문을 넘어오기는 했지만 누구의 손입니까?" 하자

 

"그야 네 손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감나무의 큰 가지가 대감님의 담을 넘어왔다고 몽땅 가져가시면 어쩌나요---?"

 

결국 이런 일화로 인해 권율의 사위가 되었지만~~~.

 

 

한편, 한음이 당시 세도가 당당한 이산해의 사위가 된 사연은 토정비결을 만든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 한음이 어릴 적에 길에서 노는 것을 우연히 보고 장차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라는 것을 예감하고서, 그 당시 영의정이던 조카 李山海(이산해)에게 사위감으로 천거하자 결국 한음은 17세 때 네 살 아래인 이산해의 둘째 딸(당시 13)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하니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예언가이지만, 역시 토정(土亭)의 안목이 대단하지 않은가!

 

평생을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눈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재치 있는 장난을 잘 쳤는데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한번은 대궐에서 오성과 한음이 서로 내가 "아비"라며 농담을 하는 것을 본 선조 임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는 데---.

 

대체 누가 아비이고, 누가 아들이오?”

 

임금의 우스갯소리에 오성과 한음은 서로 더욱 자기가 아비라고 우겼다.

 

그러자 선조 임금은,

"그럴 것 없이 오늘은 내가 아비와 아들을 확실하게 가려 주겠소."

 

선조 임금은 신하를 시켜 종이쪽지 두 장에 한자로 "아비 " 자와 "아들 " 자를 쓰게 한 후, 오성과 한음에게 뒤돌아 앉으라고 하더니 그 종이쪽지를 접어서 두 사람 등 뒤 바닥에 하나씩 놓았다.

 

", 이제 돌아앉아서 앞에 놓인 종이를 한 장씩 집어서 펴 보시오."

 

오성과 한음은 얼른 종이쪽지를 집어 펴 보더니, 먼저 한음이 제가 아비입니다하며 "아비 " 자가 써진 종이를 펼쳐 보이며 즐거워하자, 오성도 역시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싱글벙글 하는 것이었다.

 

선조 임금이,

"그대는 `아들 ` 자를 집었을 텐데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하오?"하며 오성에게 물으며 의아해 하자,

 

오성은 무릎 위에 펴놓은 종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무릎 위에 앉혔으니, 이 아비의 마음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오성의 재치 있는 농담에 선조는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고 말았다.

 

 

또 이런 일화가 있.

이율곡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 중인 와중에 율곡 선생님과의 오성의 대화 한 토막~~~.

 

"선생님 남녀의 어린 시절엔 그것을 "자지, 보지"라 하다가 어른이 된 후엔 왜 그 것을 ", "이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하자 다른 유생들은 당황스러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율곡 선생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잘 들어라,

우선 여자의 "보지""걸어다녀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보장지(步藏之)"라는 말이 변해서 된 이름이고, 남자의 "자지""앉아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좌장지(坐藏之)"라는 말이 변해서 된 이름이다.

 

또한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는 그것이 항상 말라있어야 되기에 "마를 조()"자를 쓴 것이 발음 편의상 ""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여자는 그것이 항상 젖어 있어야 하기에 "습할 습()"자를 쓴 것이 된발음이 되어 ""이 되었다가 발음 편의상 ""이 된 것이다.

 

또 남자의 그것을 "자지"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아이 즉 자식을 낳는 나무요, 또 가지를 치는 것"이라 하여 "아들 "자와 "가지 "자를 써서 "자지(子枝)"라 이르고, 여자의 그것은, 자식을 담아 기르는 보배스런 못이라고 하여 "보배 보()"자 와 "못 지()" 자를 써서 "보지(寶池)"라고도 한단다.

 

당시의 사회 통념상, 율곡 선생님이 소인배 같았으면 호통을 쳤으련만 이렇게 자상하게 가르쳐 준 것을 보면 역시 "그 제자에 걸맞은 그 스승"이 아닌가 한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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