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白吏 梧里政丞 李元翼

梧里정승 李元翼(1547년 12월 5일 ~ 1634년 2월 26일)은 조선시대 인물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무형 관료로 서로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광해군과 인조가 모두 첫 영의정으로 선택한 인물로 보통 野史 등에서 호를 사용해 '오리 대감'이나 '오리 정승'으로 불리는 인물로 자는 공려(功勵),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全州로 太宗의 왕자 익녕군 이치(益寧君 李袳)의 4세손으로 함천도정(咸川都正) 이억재(李億載)와 사헌부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인 부인 정씨(鄭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쪽으로는 세조, 예종, 성종 세 조정에서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외가 후손이다. 그는 명재상으로 유명한 동고 이준경의 문인으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조용해 사람 사귀기를 즐기지 않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원익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유성룡만은 이원익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明나라에 다녀온 1574년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종5품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어 병적(兵籍) 정비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 황해감사로 있던 李栗谷의 신임을 얻었으며 후에 李珥가 천거하여 1576년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고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584년(선조 17)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지내게 되며, 1586년(선조 19) 10월 탈상한 뒤 그 이듬해에 금강산을 유람하게 되니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리정승은 집안에서 음률(音律)을 익혀 악보(樂譜)에 통달하였으므로, 흥이 날 때마다 거문고를 가지고 낙봉(駱峯)에 올라가서 혼자 연주하고 혼자 노래를 부르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곤 하였다. 공은 더더욱 경치가 뛰어난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관직 생활 중에 다행히 틈을 얻게 되면 명승지(名勝地)를 두루 유람하곤 하였는데, 험준하고 궁벽한 곳을 끝까지 찾아 돌아다니면서도 의기(意氣)가 꺾이는 법이 없었다.

 

1587년 평안도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安州에 전염병과 기근이 닥쳐 폐촌(廢村)이 될 지경에 이르자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가 이원익의 실무 능력을 이유로 추천해 정3품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이원익은 우선 양곡 1만석을 동원해 기민(棄民)을 구호하고 곡식 종자를 마련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치고 권장해 재활에 힘썼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번상병제의 교대 기간을 3개월에서 2개월로 줄였는데 성과가 뛰어나서 이 조치는 후에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에 확대 적용될 정도였다. 그 후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2품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선조가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4만의 병력을 파병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군량미의 문제가 보통문제가 아니었지만 이원익이 평소의 능숙한 중국어 실력을 발휘하여 명나라 장수들을 상대로 군량조달 문제를 원만히 처리하였다 또한 홍의장군 곽재우 등의 의병장과 교류하여 이를 위무하였고 한산도에서 열심히 자력갱생하고 계시던 李舜臣과도 통하여 후에 이순신이 선조의 정략에 휘말려 삼도수군통제사 관직을 박탈당하고 참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정탁, 당시 도원수 권율과 함께 이순신을 극력 변호하였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고 당시 남인의 영수로서 宣祖가 이순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무조건 이순신 편을 들면 이순신과 남인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1599년에는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북인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류성룡을 변호하다가 함께 사직했다. 이후 소하리 선산(先山)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어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1604년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2등(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二等)과 선무원종공신 2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그는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정승40년에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초가 수간'뿐이었거니와 죽었을 때에는 관재(棺材) 제구도 제대로 갖출 수 없는 형편이어서 세자가 가서 조상하고 나라에서 돌봐주었다고도 한다. 사후 정경부인(貞敬夫人) 모군(某郡) 정씨(鄭氏)의 묘소 좌측에 안장(安葬)되었다. 정경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이의전(李義傳)은 전임 부사(府使)이고, 사위는 군수 이정직(李廷稷)이다. 측실 소생으로 2남 7녀가 있는데, 장남은 이효전(李孝傳)이고 다음은 이제전(李悌傳)이다. 부사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수약(李守約)은 현재 공조 좌랑이고, 다음 이수기(李守紀)는 현재 감찰(監察)이고, 다음은 이수강(李守綱)이다. 내외손과 증손으로 적서(嫡庶)의 남녀가 50여 인이 있다.


 

梧里이원익 선생 영정. 선조 13년(1580)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가로 70cm, 세로 150c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 개인소장

 

오리정승 이원익의 시 한수를 올려드리겠다.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춘풍(春風)매어두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근원(根源)이 중한들 가는 님을 어이하리.

 

선조는 죽음을 앞두고 광해군에게 “여러 신하 중에 오직 이원익에게만 큰 일을 맡길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였는데 광해군도 그러한 선조의 유교(遺敎)를 따라 즉위한 이후 첫 영의정에 이원익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원익의 업적과 관련하여 역시 대동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광해군 대는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경기도 실시하였고,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충청, 전라, 강원도까지 확대한 삼도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였다. 1615년 인목대비 폐모(廢母)론을 반대하다 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 1623년 仁祖反正 직후 중신이자 인망이 있다는 이유로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직에 올랐다. 이후 광해군 정권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논쟁에서 온건파로서 광해군 정권의 핵심 인물들만 처벌하고 단순 가담자는 봐주자는 의견을 제시해 민심을 수습해야 했던 인조 정권으로 하여금 광해군 정권 인사들에 대한 보복의 강도를 감소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전후에 기자헌을 위시한 중북(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우호적이었던 북인 세력)이 대거 숙청되자 公州에서 늦게 소식을 접한 이원익은 "이제 나도 폐물이 되었구나. 수십 명씩 죽었는데도 알지 못했으니."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인조반정 직후 살기등등한 반정군 사이를 유유히 지나 유폐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왜 자기 말을 듣지 않았느냐'면서 눈물을 흘리자 광해군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인조에게 "광해군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관직에 더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도 하는데 애초에 둘 다 야사일 뿐이며 광해군을 살리는 건 인조를 포함한 반정 측 인사들의 공통된 합의였기에 딱히 그런 발언이 대단한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왕과 그 무리를 두고 쫓겨난 왕에게 예를 다한 점은 범상한 게 아니다.

인조반정 직후 영의정에 올라 인조가 '당장 해야 하는게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군사를 정비하는 것이나 인사 문제보다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민생 안정에 있어서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는 요지의 건의를 하여 3도 대동법(시행 지역 : 강원도, 충청도, 정라도)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결 파악의 미비,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더 확대되지 못한채 강원도 일대만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자신도 대동법 철폐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으며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다. 서울로 환도한 뒤 훈련도감 제조에 제수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치사(致仕)하여 고향인 오리곡(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으로 낙향하여 사택인 관감당(觀感堂)으로 은퇴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등으로 여생을 보내니 그의 문하에서는 허목, 윤휴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그의 애제자 중의 한사람인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이원익이 40여년간 정승을 지내는 동안 초가집 생활을 영위하자 그의 검소함에 감동한 인조는 친히 관감정을 지어 집과 토지를 하사해 주었다. 조선 국왕이 신하에게 직접 집을 지어준 사례는 방촌 황희의 영당과 이원익의 관감정, 그의 제자이자 손녀사위인 허목의 은거당이 있다. 그의 문하에 미수 허목이 찾아와 그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관상을 볼줄 알았던 이원익은 그의 재능의 비범함을 알아봤고, 그에게 자신의 손녀를 주어 손녀사위로 삼았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 중 이순신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순신의 벗인 서애 유성룡마저 비판할 때에도 그는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유일하게 이순신을 지지하였다. 후일 그의 서녀를 통해 이순신과도 사돈간이 된다.

 

1631년(인조 9년) 1월 10일 仁祖가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늙었다 물러가자' 로 향리로 돌아가서'강호한적'과'강호풍취'를 즐기고자한 선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세속적인 욕심을 비웠을 터이다. 하면서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으나 결국 하는수 없이 받은 집이 觀感堂이다. 그는 찍이 16자의 교훈(敎訓)을 지어 자손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내용에 “남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나쁜 점이 없도록 할 것이요, 뜻은 항상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목표로 삼고 행할 것이요, 분수(分數)는 항상 나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행복하게 여기도록 할 것이다.[無怨於人 無惡於己 志行上方 分福下比]”라고 하였다.

 

오리정승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년 12월 5일 ~ 1634년 2월 26일)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에게 대위같은 계급에서 별 두개 소장급으로 파격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이순신은 여기에 전라좌수영 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내려 왔으니 예나 지금이나 군대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이순신을 보고 이들이 가만 있었을리가 있었겠는가? 결국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하옵니다 하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문무백관들 거의모두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고 속으로는 동조하던 宣祖를 압박하고,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해 주고 6계급 파격으로 진급을 시키는데 크게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公은 공 私는 사'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못했으니, 당시 이순신의 역적누명 상황이 어떠했겠는가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의 형 집행을 못하고 목숨을 살려 비록 백의종군 상태지만 살려 둘 수 밖에 없었을까? 여기엔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 당시의 영의정 겸 도체찰사인 '오리 이원익' (梧里 李元翼)이 선조의 어명으로 임진왜란의 전시상태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다. 즉, 전시상태에서 아무리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 외쳐도 '도체찰사'인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치 못하옵니다.' 라는 이원익의 이 말 한마디에, 선조 임금도 체념을 하고 드디어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 라며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당시에 문무백관중 이원익, 유성룡, 정탁 등 몇사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이 왜란을 마치도록 살려 낸 것이다. '安民이 첫째이고 나머지는 군더더기일 뿐.'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했지만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덕분이 컸음이 사실이다.

 

梧里政丞 관련일화

청백리하면 으레 거론되는 위인 중 한 명이며 당파로는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위의 이준경의 문인으로 이이로부터 극찬을 받았다는 것부터가... 당시 선비들은 이원익을 두고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나중에 쫓겨났을 때는 남자 백성들이 윗통을 벗어서 그가 밟는 길에 놓았으며 모두 통곡했다고 한다.

키가 무척 작은 것으로 유명하다. 키와 관련된 야사가 좀 많은데, 한 야사에 따르면 관직에 오른지 얼마 안되었을 당시에 영의정 이준경이 그를 천거하면서 몸이 약해 山蔘 20근은 족히 먹여야 하지만 빈궁하여 그러질 못하고 있다고 하자 선조는 즉시 산삼 20근을 내렸다. 그 후 벼슬길에 오른 신임 관리들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이원익의 모습을 보고자 하니, 이준경이 "이원익은 키가 매우 작으니, 발돋움하셔야 보일 것입니다" 하니 정말 그러했는데 이 모습을 본 선조는 "아까운 산삼만 버렸구나"라며 웃었다고 한다. 그의 키는 기록에 따르면 3척 3촌 정도라는데, 이걸 믿어야 할지 어떨지.. 세종대왕이 제정한 옷감을 잴 때 쓰는 포백척은 길어서 46.7cm 정도 된다. 포백척으로 계산하면 144.7cm가 된다. 구글 프로필에는 137cm로 나와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명종이 산삼 20근을 주고 "아까운 산삼만 버렸구나"라고 웃고 훗날 임진왜란이 터진 후에 이원익이 종횡무진 활약하자 선조가 "선왕께서 잃어버린 산삼을 이제야 찾았구려"라고 했다고 한다. 이쪽이 더 재밌고 전후 관계가 딱딱 들어맞긴 한데 앞서 기술했듯이 이원익이 벼슬에 오른건 선조 2년이다.

다른 야사에 따르면 그도 키가 작은 것에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젊을 적에 한 치(약 3cm)가 되는 키높이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것을 본 관상쟁이가 "아깝다, 키가 딱 한 치만 작았으면 영의정이 될 상인데..."라고 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그러자 이원익은 그 자리에서 나막신을 벗었고, 관상쟁이는 미래의 영의정을 뵙는다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벼슬에 오른 후 중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퇴근 후에는 집에 틀어박혀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주변에서 처자정자(處子正字 : 양갓집 규수처럼 얼굴 보기 힘든 正字란 의미)라 부르며 놀렸으나 동기인 蘭谷 강서(姜緖) 혼자만이 "너희들은 이원익에 미치지 못한다. 이원익은 훗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정승이 되어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홀로 변호했다고 한다.

명나라에 갔을 때 직급이 낮았기 때문에 역관들조차도 무시하고 때론 중국어로 놀리기까지 했는데도 성품이 온화했던 이원익은 잠자코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명나라에 도착하자 명나라 예부 상서를 만나 통역도 없이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일사천리로 일을 끝마치자 이때까지 이원익을 무시하던 역관들이 두려워하고 감복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을 찾아가 약을 지었는데 하필 의원이 각기병에 걸려서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 매번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는 이원익이 벼슬아치인줄도 몰랐다고 한다.

영의정 시절 야사. 한 번은 이원익이 사가에 다녀올 일이 있어 길 안내할 아이 하나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던 도중 주막에서 국밥으로 요기를 하는데 하필이면 그날 그 고을에 신임 사또가 행차한 날이었다. 사또는 주모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오라 강요했고 주모는 할 수 없이 쌀과 고기를 빌려다가 사또의 상을 차렸다. 그런데 정작 한 상 잘 차려먹은 사또는 주모에게 음식값 한 푼 주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에 대노한 이원익은 곧장 관아로 가 사또를 크게 질책하고 직첩과 관인을 도로 빼앗았다고 한다. 즉 부임한 그날 바로 짤린 것이다.

유배 당시에는 별로 할 일이 없자 서툴게나마 돗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원익 본인이 말하기를,
"글과 친하려니 노후(老後)가 가까웠고, 글씨나 시를 즐기자니 혼자서 하기는 겸연쩍다. 사람들과 모여서 즐기자니 어울릴 만한 사람도 없다. 장기나 바둑은 악습(惡習)이라 안 좋아하는 반면, 돗자리를 짜면서 소일하면 백 가지 잡념이 가라앉곤 한다."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서 늦게 배운 솜씨라 서툴렀지만 계속 이것만 만들다보니 나중에는 제법 실력이 늘었고 그렇게 만든 돗자리를 거리낌없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배가 풀리면서 영의정이 되자 유배 당시에 그가 만든 돗자리는 영상 대감이 만든 돗자리로 알려져 값이 엄청 올라 그냥 받은 돗자리를 5백냥이나 되는 거액에 판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하야 영상수직석(領相手織席).

그 외에 길을 가다 동전 한 닢을 깊은 내에 빠트리자 지나가던 백성 둘에게 각각 한 닢씩 사례금으로 주고 내에 들어가 빠진 동전을 찾아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동전 한 닢을 위해 동전 두 닢을 썼으니 손해라고 말하자, 물에 빠진 동전 한 닢은 그대로 두면 죽은 돈이 되지만 이렇게 건져내고 또 그를 위해 쓴 사례금 두 닢은 돌고 돌아 경제에 공헌할 테니 손해가 아니라고 말하여 그 시야의 넓음에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어찌나 청렴한 생활을 했던지 다 쓰러져가는 방 두어칸의 초가집에서 살았고 말년에 仁祖가 그 청렴함을 높이 사 5칸짜리 집을 하사했다. 그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받은 집이 관감당(觀感堂)이다. 棺값마저 없어 결국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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