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회화의 창시자 안견(安堅)

안견(安堅 1400? ~ 1470년대 말?)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화원으로, 한국적 산수화풍을 창출한 조선 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세종 때에 도화원(圖畵院)의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인 정4품 호군으로 승진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의 화원으로서 한품(限品)인 종6품의 제한을 깨고 승진한 최초의 예가 된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의하면 그는 본성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였다고 한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고화(古畵)들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부터 조선 중기 이후까지 조선 시대 화원 대부분이 그의 화풍을 이어받았을 정도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이다. 신분이 낮은 화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어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들에서 잠깐 언급되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이다. 전해 오는 그림 역시 매우 적으며, 그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한데, 조선 초기는 물론, 조선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밖에 안견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산수도(山水圖)〉,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등이 있다.

 

안견은 1400년 혹은 1418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다. 세종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으며, 세조 시기까지 활동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주경(朱耕)이며, 자나 호가 지어진 배경이나 그 의미도 밝혀진 바가 없다. 본관은 충청남도 지곡으로 알려져 있다.

안견은 조선 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화원(성종 때 도화서로 개칭)에 소속된 화원으로, 젊은 시절부터 산수, 묵죽, 장송, 노안도 등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으며, 산수화에 있어서는 필적할 이가 없다고 평가받았다. 신숙주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조정에 유명한 화가 한 사람이 있는데, 안견이라 한다. 성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며, 옛 그림을 많이 보아 그 요체를 모두 얻고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모아 총합하고 절충하였다. 옛것으로부터 빌었지만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얻기 어렵다.”

안견이 위대한 화원이 될 수 있었던 데는 타고난 재능도 작용했겠지만, 이에 더해 안평대군과 교유하며 화가로서의 안목을 기르고 그의 비호를 받은 덕분이기도 하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후원자였다. 시와 글씨, 그림에 능했고, 중국 고전 회화에 박학했으며, 수많은 서화를 수집했다. 안평대군이 25세 때 안견이 그의 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안평대군과 교유하며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445년경 안견은 정4품인 호군(護軍)의 벼슬에 올랐다. 화원이 정4품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가 최초이다. 화원은 세종 시기에 최고 5품까지 오를 수 있었고, 성종 시기에는 종6품 별제까지 오를 수 있는 지위였다. 안견이 1400년경 출생했다면 40대, 1418년생이라면 20대인데, 어느 쪽이든 젊은 나이에 화원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안정적인 실력과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종조인 1478년에는 아들 안소희가 문과에 급제했다. 비록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높은 관직을 얻지 못했으나 화원의 아들이 신분 제한을 뛰어넘어 대과인 문과에 급제했던 것은 예외적인 일로 아버지 안견의 명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안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예다.

 

안견은 최고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이 형 수양대군에 의해 희생된 계유정난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세조(수양대군) 시대에도 그 명성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안평대군이 희생된 후 그 역시 죽거나 몰락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윤휴의 《백호전서》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특히 아껴 집으로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한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안견은 시절이 수상한 것을 감지하고 안평대군의 집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귀한 용매먹(龍煤墨丸)을 구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외출했다 돌아오니 용매먹이 사라져 있었다. 이에 종들을 다그치자 그들은 안견을 지목했고, 안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맷자락에서 먹이 떨어졌다. 이를 본 안평대군은 진노하여 안견을 내쫓고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견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얼마 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을 비롯해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이 모두 죽임당하거나 화를 입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뒤 3000명에 달하는 사람을 공신으로 봉했지만 거기에 안견은 없었다. 안평대군을 배신한 것에 대한 평생 미안함을 안고 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뒤 동생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에서 글과 그림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몽유도원도>가 440년 만에 1893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몽유도원도>가 일본 문화재로 등록된 과정을 통해 추정해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같은 커다란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의 장군이 가져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안견은 안평대군을 비롯해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도화원 화원으로서 의궤도(궁정과 조정의 각종 행사를 그린 그림)도 많이 그렸다.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과거도(科擧圖)〉, 〈기영회도(耆英會圖)〉, 明나라 사신을 위한 〈묵죽도(墨竹圖)〉 등을 그렸다고 하나 전부 없어져 현재 전하는 것도, 안견의 작품이라고 확증된 것도 거의 없다. 유일하게 확증된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세종 29) 음력 4월 20일 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도원경을 거닐며 본 바를 안견에게 이야기해 주고 그리게 한 그림으로, 사흘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안평대군이 발문을 썼으며 신숙주, 박팽년, 정인지, 최항 등 세종 대의 고사(高士) 21명이 친필로 찬문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 회화사뿐만 아니라 문학사, 서예사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몽유도원도〉 일본 덴리대학 부속 덴리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는 구성부터 독창적이다. 동양 회화에서는 화면이 흔히 우측에서 시작되어 좌측에서 끝나는 것이 통상적이나 이 그림은 왼편 하단부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크게 네 장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왼편은 현실 세계, 오른편은 꿈속의 도원경이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을 데리고 꿈속 유랑을 나서는 데서 시작하여, 복숭아 숲과 험준한 산을 지나 도원에 도착한 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총 네 단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림의 시점 역시 독특하다.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도원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으로 구별해 표현했는데, 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기기묘묘하게 뻗어 있는 산세, 복숭아 꽃밭이 늘어선 갈래길, 먼 산을 감싼 안개 등 꿈속 환상의 세계가 몽환적이고도 고요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필묵법에 있어서는 산수화를 완성했다고 평가되는 중국 북송 시대 화가 곽희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공간감을 표현한 방식이나 구도, 구성, 세부 묘사에 있어 독자적인 화풍을 창출했다고 평가받는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시, 서, 화의 정수가 결집된 작품으로 평가되며, 중국의 도원도(桃源圖)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녀 조선 시대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견의 화풍은 화원들은 물론, 사대부 계층까지 폭넓게 전파되어 조선 후기에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등장할 때까지 조선의 화단을 지배했다. 또한 일본 수묵화의 거장 슈분(周文)이 조선에 사절단으로 와 그의 그림을 배워 간 영향으로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안견은 1464년(세조 10) 김시에게 대나무 그림을 그려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시기가 끝나 갈 무렵 점차 화원으로서의 활동이 축소되었으며, 아들 안소희가 과거에 급제하던 성종 시대에는 안정된 노년기를 보냈으리라 여겨진다. 1470년대 말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조선회화사에서는 안견과 그를 추종한 많은 화가들을 합쳐서 안견파라고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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