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三絶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시서화(詩書畵)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에 모두 뛰어난 인물을 삼절이라 하지만, 실상 세 가지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성취한 인물은 자하 신위((申緯 1769 ~1847)빼고 달리 찾기 어려운 조선후기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경수당(警修堂). 신석하(申錫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유(申嚅)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신대승(申大升)이다.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자하紫霞’는 신선의 세계를 물들이는 자줏빛 노을을 뜻한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글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 ‘하늘이 내린 천재’라 소문이 나서 정조임금에게 불려가 재주를 시험받기도 하였다. 1799년(정조 23)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 당하관 중에서 제술과 강독에 의해 특별히 뽑힌 문신)에 발탁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 때 중국의 학문과 문학을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문인과 교유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는 신위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다. 이 때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조정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1816년 승지를 거쳐, 1818년에 춘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그 지방의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 당하였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되어 1828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의 탄핵으로 2년만에 또다시 물러나 시흥 자하산방에 은거하였다. 1832년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 생활에 환멸을 느낀 끝에 사양하였다. 다음 해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강화유수 때의 실정을 거론, 상소하다가 평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이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신위는 글씨·그림 및 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시에 있어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없어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려 했는데, 한역한 「소악부(小樂府)」와 시사평(詩史評)을 한 「동인논시(東人論詩)」 35수, 우리나라의 관우희(觀優戱)를 읊은 「관극시(觀劇詩)」 등이 있다. 신위의 시를 가리켜, 김택영(金澤榮)은 시사적(詩史的)인 위치로 볼 때 500년 이래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신위의 영향은 강위(姜偉)·황현(黃玹)·이건창(李建昌)·김택영에 이어져 우리나라 한문학을 마무리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그림에 있어서는 산수화와 함께 묵죽에 능하여, 이정(李霆)·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강세황(姜世晃)에게서 묵죽을 배우고 남종화(南宗畫)의 기법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남종화의 꽃을 피웠다. 신위의 묵죽화풍은 아들 신명준(申命準)·신명연(申命衍)을 비롯, 조희룡(趙熙龍) 등 추사파(秋史派)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위는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지만 그 삶과 예술의 깊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헌데 그는 생전에 이미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듯 신위의 시를 읽는다”라고 할 정도로 대가로 인정받았고, 현재는 ‘쇠퇴해 가는 시대에 훨훨 날아오른 대가’라 하여 고전문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신위는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1725~1799)의 딸을 배필로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고 부실(첩, 副室) 조씨(趙氏)에게서 네 서자를 얻었다. 평산신씨(平山申氏) 명문가라는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양으로 적자를 잇지 않고 네 아들을 동등하게 길러내었다. 그는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고 격려했다.

3부자가 합작한 ‘시령도’(시 짓는 배 그림, 詩舲圖)에는 신위 부자의 가족애가 담겨있다. 문장과 산수화로 이름을 남긴 맏아들 신명준(1803~1842)과 화사한 꽃그림으로 일세를 풍미한 둘째 아들 신명연(1809~1886)이 아버지 신위와 합작한 두루마리 작품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처음 공개되는 신위의 필사본 문집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곳곳에도 아들들을 애틋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신위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회화성이 넘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붉은 여뀌를 노래한 시’이다. 1832년에 지은 ‘정원 속 가을 꽃 열네 수’ 가운데 한 수로 “물가에 무성한 여뀌 꽃은 작은 배에 들어오네”라는 시구 등을 통해 조각배를 집 삼아 강호에 누운 유유자적한 마음을 드러낸 시다. 글씨에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흐르고 있고 노년의 신위가 도달한 원숙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또 신위는 제화시를 지어 서화를 평론하기도 했다. ‘장수를 축원하는 마고’가 대표적이다. 청나라 문인화가 박명(?~1789)은 북경을 발문한 조선 사신의 생일을 축하해 도교에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마고선녀가 서왕모에게 영지로 빚은 술을 바치며 장수를 축하하는 내용을 담은 그림을 그려 선물한다. 신위는 약 100년 후 이 그림을 감상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시를 여백에 써 넣었다.

조선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년)는 고대 비석 연구를 토대로 독특한 서풍을 창출했고, 신위는 왕희지(303~361)를 모범으로 삼아 우아한 서풍을 연마하여 서로 다른 개성을 보여줬다. 신위와 김정희는 문신이자 서예가인 윤정현(1793~1874)을 위해 그의 호인 ‘침계’를 써 주었다. 김정희의 ‘침계’(간송미술관 소장)와 신위의 글씨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서예는 지향점은 다르지만 19세기 조선 문인이 다다른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시흥의 자하산방(紫霞山房)에서 은거하기도 한다. 많은 시(詩)를 남겼는데, 이 중 다시(茶詩)에 관한 것이 수십 수가 넘는다. 그가 남긴 많은 다시만큼 풍류와 차를 즐겼던 차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글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 ‘하늘이 내린 천재’라 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예도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았다. 당대의 재사(才士)와 벗하며 묵죽(黑竹)을 그리고 시 짓기를 즐겼다. 그의 거침없는 논평은 위정자의 비위에 거슬려 벼슬길에 오른 지 10년 동안이나 외직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원만한 성품으로 경계가 없어 당색과 종교를 초월하고 국경을 넘어 폭넓은 교유를 했다. 그때 교유의 매개체는 차와 시였다. 신위의 예술세계는 많은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이루어졌다. 차와 관련된 시는 추사, 초의, 다산 이외에도 여러 인물이 있다. 교유했던 대표적 인물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7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 신뢰와 경외를 아끼지 않고 정신적 교감을 주고받았던 사이였다. 추사와 차를 나누며 화답한 글 여러 편이 전해진다.
다음은 1821년에 지은 시로 “한림학사 김정희 시를 차운하여 바치다”이다.

“이렇게 사귄 기쁨 갈수록 깊어지는데,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네.
갈대 차갑고 예서는 오래되어 정신과 마음을 합하고,
차를 끓이며 시도 이루어 기운과 운치를 겸했네.
우산에 비 떨어지는 소리 같이 들으며 한림원 길 걷고,
서향각에서 홀로 슬픈 30년 마음이네.
한림학사와 승지는 모습이 소탈하니 관각의 아름다운 이야기 써서 보탠다네.”

자하와 추사가 차로서 교유하는 모습을 시에서 볼 수 있다. 추사는 한림원 근무 중 여가시간에 차를 끓이고 시를 지어 신위에게 보내면 자하는 그것을 평해서 답하곤 하였다.

자하는 승정원에 들어간 뒤 완연한 노인의 모습으로 활기 넘치는 젊은이의 행동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은 한림학사인 추사가 보낸 차를 마시고 그를 만나는 일이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추사는 늘 이름난 차를 새로 끓이면 어린 종을 통하여 차를 보내곤 하였다. 이렇듯 이들의 다정함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기(知己)로서 다른 이의 부러움을 샀다. 늙은 아전들도 대낮 직무 보는 여가에 시문을 헤아리니 눈이 휘둥그레졌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차를 가까이하니 차를 다루는 수준도 일가견이 있었다. “귀양살이의 기쁨”이라는 시에서 물을 평하는 내용이 있다.다음 시는 1833년, 평신진의 관아에 재직할 때 관아 뒤편의 유천에서 물을 길어 차를 끓여 마시며 읊은 시다.

“깊은 샘에서 진리를 긷노라니 글맛이 통하여, 정수리에 제호를 부은 듯 불심을 깨닫네.
샘물이 달콤하니 죽은 물은 아니고, 바닷가라 하더라도 빗물은 짜지 않네.
천하의 차 끓이는 물을 평 하건데, 강왕곡 물이 제일이라면 이 물은 두세 번째 되리.”

자하는 「남다시병서」에서 “내 삶은 담박하나 다벽이 있어, 차를 마시니 정신이 환해지네”라 하였다. 한잔의 차를 통해 벗과의 교유는 물론 흐려진 심신을 맑게 했다.
또한 신위는 탄은(灘隱) 이정(1554~1626), 수운(峀雲) 유덕장(1675~1756)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혔다. 당시의 권세가들은 그의 대나무 그림을 얻고자 앞다퉈 그를 찾았다. 신위의 대나무 그림은 줄기가 가늘고 여백이 넓어 고아한 인상을 풍긴다. 옛 선비들은 대나무의 올곧은 품성을 사랑해 먹으로 대나무를 그렸다. 신위는 어려서부터 강세황에게 묵죽을 배웠으며 중국 양주팔괴(청나라 중기 장쑤성 양주에 모인 8인의 개성파 화가) 중 한 사람인 정섭의 대나무 그림을 재해석하여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한다.

신위는 승정원 승지로 근무할 때 그림을 감히 부탁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하급서리에게 “내가 어찌 너에게만 인색하게 굴 것이냐”라고 웃으며 그 자리에서 대나무를 그려주었다는 일화는 신위의 소탈한 사람됨을 잘 보여준다. ‘그림보다도 가슴 속의 대나무를 완성하는 것이 먼저’라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말은 예술에 앞서 인격을 닦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가 그린 ‘묵죽도’의 담백한 붓질에는 사람을 지위로 차별하지 않았던 소탈한 인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대표작으로 「방대도(訪戴圖)」와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또한,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저서로 『경수당전고』와 김택영이 600여 수를 정선한 『자하시집(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자하 신위의 ‘황공망과 미불을 재해석한 그림’. 자하의 <노방서화첩>에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자하 신위의 ‘황공망과 미불을 재해석한 그림’. <노방서화첩>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위의 대나무는 대개 가느다란 줄기, 과하지 않게 달린 댓잎, 농담으로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 지적이고 고아한 인상을 주는 특징이 있다. 즉 강인함보다는 우아함이 느껴지는 묵죽이다. 80 가까이 살면서 꾸준히 그린 묵죽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데, 평면적인 바위 묘사나 대나무에 농담의 차이를 주어 원근을 나타낸 점에서 조선 중기 양식을 띄기도 하고, 댓잎을 ‘入’자형으로 그리거나 서예적인 필선을 사용하여 죽간竹間을 길게 그리는 등 조선후기의 양식도 차용, 이들을 혼합해 자신의 양식을 성립시켜 간다. 전해지는 작품 중에는 말년작의 묵죽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노하老霞’, ‘자하노인’ , ‘자하노초紫霞老樵’ 등의 관서가 많음).





서예와 묵죽은 감상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25건 85점에 이르는 전시목록 중에는 그가 청나라 그림에 쓴 제화시나 서화로 이름을 날린 두 아들 명준(申命準 1803~1842)과 명연(申命衍 1809~1886)과의 합작, 특히 신명연의 다채로운 화조병풍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가 남긴 적지 않은 작품과 영향의 일면만을 볼수 있을 뿐이다. 신위의 예술세계가 조선후기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방향으로 조명하는 기회들이 여러 차려 겹쳐져야 가능할 것 같다. 







두 아들과 함께 만든 이 두루마리는 신위의 제자 이학무를 위한 것이다.

그는 이학무에게 '시령(시 짓는 배)'이라는 자를 지어주고 당송팔대가중 한 사람인

소식에 빗대어 후적벽부의 도상에 '시령도'라는 제목을 써서 이었다. 제목은 신위가

썼고 그림과 첫번째 발문은 큰아들 신명준, 또다른 발문은 둘째아들 신명연이 남겼다. 




둘째 아들 신명연의 장식적이고 섬세한 화조도. <등꽃>과 <화조도 병풍>



신위의 행서 대련(동원 기증품). 사대부가 지켜야 할 학문의 규범을 썼다.
"성誠과 경敬의 공부는 녹동(주희가 세운 서원)의 규범을 존중하는 것이요
고상하고 자연스러운 문자는 사마천의 법을 중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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