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邦을 제패한 Alexandros 大王

알렉산드로스(BC 356 ~ BC 323)의 부왕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탁월한 군사지도자이자 냉철한 실리주의자였다. 이에 비해 모친인 올림피아스는 신비주의적이고 격정적인 성향의 여성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양친의 이러한 다분히 상반되는 성격을 모두 물려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13살 때부터 약 3년 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마케도니아는 혈통상 그리스에 속하면서도 문화나 기풍 면에서는 그리스와 차이가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멸시하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예술가, 지리학자, 측량 기사, 수로학자, 동식물학자 등을 원정길에 데리고 간 것도 스승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원정길에서 수집한 자료가 스승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날 무렵 그리스는 한 세기 전 페리클레스 시대의 전성기를 보내고 페르시아의 간섭, 잦은 전쟁, 선동적인 정치가들의 발호, 농업생산기반 쇠퇴,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으며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는 기회였다. 필리포스는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에서 아테네와 테베를 패퇴시키고 코린토스 동맹을 이룩한 뒤 그리스 세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살해당했고, 20살 나이의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북방 이민족의 침입과 서쪽의 반란을 진압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봄 아시아 원정을 개시했다.

 

신의 계시 - 매듭

알렉산드로스가 소아시아 원정 중에 고르디움이라는 도시에 군대를 결집시켰을 때의 일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도시의 제우스 신전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는데, 이 신전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유명한 농부의 수레가 받들어 모셔지고 있었다. 그 수레의 채에 박힌 나무못에는 나나카마드 나무껍질이 복잡하게 매어져 있었고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세계의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매듭을 푸는 데 도전하기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나무못을 빼고 풀었다고도 하고 칼로 잘랐다고도 전해지는데, 어쨌든 그는 기존의 원칙들을 깨고 매듭을 풀어 '세계를 손에 넣을 사람'으로 만들었다.

 

배경 - 그리스와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의 그리스는 전란의 시대였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교묘한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페르시아는 군사적으로는 그리스 침략에 실패했지만, 풍부한 국력을 이용해 그리스의 여러 세력들을 매수헤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테네의 변론가 이소크라테스는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결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세계를 통솔하는 역할을 아테네에 기대했지만 이 도시에는 이미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차선책으로 북방변경의 전투적 신흥 국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기대를 걸게 된다.

 

태생 - 마케도니아 왕국

전설에 의하면 마케도니아 왕국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해안 아르고스 출신의 페루디카스가 세운 나라인데, 페루디카스가 현재의 그리스와 알바니아의 국경 근처 일리리아 지방에서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마케도니아인은 파란 눈에 금발, 하얀 피부를 가졌고, 그리스인과 혈연 관계는 있지만 독자적 언어를 사용하며 변경(邊境)을 생활권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리스인으로부터 오랫동안 야만족이라는 뜻의 '발바로스'로 불렸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상류계급은 그리스 문명을 받아들이려 애썼고 왕국은 점차 그리스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기원전 454년,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페루디카스 2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가하여 마케도니아가 미개국이라는 오명을 씻는 데 성공했다.

그후에 마케도니아는 왕위쟁탈전이 계속되어 내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으나 기원전 356년에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필리포스 2세는 청년 시절에 테베에서 3년 동안 인질로 있었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장군 에파미논다스와 페로피다스가 이끄는 강력한 테베군(軍)을 보았을 터이고, 그런 까닭에 조카 아민타스 4세의 섭정을 할 때부터 군사력 증강에 힘썼던 것이다.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 해상동맹에 의한 동맹시(同盟市) 전쟁에 참여해 정복한 안휘폴리스의 판가이온 광산을 비롯하여 새로운 정복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자금력을 기초로 군정을 개혁하고 군대를 더욱 강화하고 영토 확장에 눈을 돌린다. 필리포스 2세의 아내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 왕국 서쪽에 위치한 에페이로스의 공주였다. 기원전 356년 10월 폭풍우가 치던 어느 날 밤, 올림피아스는 훗날 대왕이 될 왕자 알렉산드로스를 낳았고, 필리포스 2세는 수도 페라에서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소년기 - 대두되는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는 어린 알렉산드로스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불안정한 정세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도 했거니와 아내의 정조를 의심한 탓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사정으로 자연히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올림피아스는 매우 사려 깊은 여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 강인한 여인은 자신의 생각대로 알렉산드로스를 교육할 수 있었다. 올림피아스는 엄격한 어머니였으므로 그를 응석받이로 키우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들에게 신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었고, 그 생각을 어린 아들에게도 숨기지 않았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감독자이며 양부(養父)인 레오니다스는 그에게 사치와 낭비를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충동적인 면이 있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 엄한 양부에 의해 필리포스 2세에게는 부족한, 감정을 억제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높은 자긍심과 자제심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의 신비적 사상을 듬뿍 주입받은 알렉산드로스의 몽상가적 기질은 필리포스 2세에게는 항상 고민거리였다. 소년 알렉산드로스는 근육은 발달했지만 몸은 가냘프고 살결도 부드러워 어딘지 중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속세를 초월한 듯한 왕자의 성향을 바꾸기 위해 필리포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가 상식을 갖추고 현실에 눈을 돌리게 만들 교사를 찾았다. 그 교사는 아테네로 대표되는 그리스인의 지성을 갖춘, 동시에 마케도니아인의 용감함을 이해하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인물이 아민타스 2세의 궁정의사였던 니코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에게 교육받은 2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현자(賢者)도 알렉산드로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린 신비주의적 엘리트 의식을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말타기

알렉산드로스는 마마보이였고 어른스런 말투로 얘기하고 별로 웃지 않았으며 독서를 즐겨했다. 호방한 성격의 군인 필리포스 2세의 눈에는 이해하기 힘든 아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알렉산드로스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한 일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 앞에서 사납게 날뛰는 말을 탄 것이다. 부케팔로스(소의 머리)라는 크고 검은 털의 훌륭한 말이었는데 사나워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필리포스 2세는 말을 타러 나간 초원에서 부케팔로스의 사나운 모습을 보고 테살리아인(人) 말 상인에게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부왕과 함께 승마장에 와 있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무심코 "명마를 솜씨없고 배짱이 없어 잃어야 하는가?"라고 내뱉고 말았다. 필리포스 2세는 윗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아들의 태도에 화를 내며 호되게 그를 꾸짖었다. 하지만 왕자는 굽히지 않고 "저 같으면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이 말을 잘 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필리포스 2세가 "그럼 해보거라. 하지만 만약에 말을 잘 타지 못하면 어떤 벌을 받겠느냐?"라고 묻자 알렉산드로스는 "제우스 신에 맹세컨대 이 말값을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말 상인은 그 말에 아주 비싼 값을 내걸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말의 머리를 태양을 향하게 하여 안심시킨 후에 완벽하게 이 말을 타 보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음악과 독서를 즐기던 알렉산드로스이지만 결코 허약한 소년은 아니었던 것이다. 칼을 다루는 솜씨도 좋았고 달리기도 빨랐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것은 마술(馬術)이었다. 이때부터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애마가 되었고 이 말은 인도의 히다스페스 강에서 죽을 때까지 그와 함께 광활한 세계를 내달렸다.

 

재능 - 천재적 군인

이 무렵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사력은 그리스 세계에서 최대 규모였고 정예병력으로서 모델이었던 테베군을 능가할 정도였다. 압도적인 병력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대항할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했는데, 장소는 페린토스 외곽의 폐허였다. 알렉산드로스의 활약은 눈부셨고 전공(戰功)에 의해 섭정역으로 임명된다. 마이디족(族)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사관 후보생인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으로서 출발하여 문제 없이 진압을 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338년에 있은 카이로네이아(그리스 보이오티아 지방 북서쪽 끝에 있는 고대 도시)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은 아테네, 테베 동맹군을 격파하고 그리스 지배를 확립한다. 이 전투에서 열일곱 살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라기보다는 동료 관계에 있는 기병 부대를 이끌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공을 세웠다. 이로써 소년 알렉산드로스는 천재적인 군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반항 세력을 물리친 마케도니아 왕국에 의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독립 시대는 끝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 세계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숙적 페르시아 제국과 겨루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337년 가을, 필리포스 2세는 코린트(=코린토스)에서 대회의를 열었는데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대표자들이 모두 모였다. 신코린트 동맹(페르시아 전쟁 때 한 번 코린트를 중심으로 동맹이 맺어졌으므로 신코린트 동맹, 혹은 헬라스 동맹이라 한다)이 결성되었다. 필리포스 2세는 소아시아 공격을 선언하고 만장일치로 동맹군의 총사령관으로 뽑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필리포스 2세는 공인으로서는 이처럼 순조로운 상태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장군이며 친척인 아타로스의 조카딸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왕비 올림피아스도 그러했지만 그는 성격이 강한 여자를 좋아했다. 이 젊은 애인 또한 야심만만하고 자존심 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필리포스 2세에게 왕비와 헤어지라고 간청했다. 알렉산드로스를 비롯해 주위의 충고를 무시하고 필리포스 2세는 이 여인이 제시한 조건대로 올림피아스와 정식으로 헤어졌다.

 

왕위 - 아이가이의 흉사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페라를 떠나 필리포스 2세의 친구 데마라토스가 중재할 때까지 수도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일단 화해는 했지만 새 왕비는 이미 임신중이었다. 새 왕비의 아들 알리다이오스 외에도 알렉산드로스 앞에 왕위를 둘러싼 경쟁자들이 잇달아 나타나게 된다. 필리포스 2세의 형 페르디카스 왕의 아들 아민타스와 새 왕비의 아들 카라노스가 왕위 계승을 놓고 겨루었다. 기원전 336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필리포스 2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한다. 옛 수도 아이가이의 어느 극장에서 마케도니아 귀족 청년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부왕의 뒤를 이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절대군주제 국가가 아니라서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민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백성들의 환호로 즉위를 인정받은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라 칭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군대의 지지를 얻은 알렉산드로스는 아이가이에서 필리포스 2세의 장례식을 치르고 왕위 계승을 선언했다.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2세의 젊은 아내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고, 아들 카라노스를 신의 제물로 삼아 제단의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 알렉산드로스도 어머니의 이런 행위에는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뮨타스를 마케도니아 왕으로 삼으려는 아타로스를 내버려둘 수는 없어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반역자로서 처형하기 위해 친구를 파견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그 왕위를 지키고 있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

 

반역 - 테베의 파괴

젊은 알렉산드로스를 승부의 상대로 그리 두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그를 만만하게 보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약체화에 기대를 걸고 지배에 대한 반항을 개시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와 아테네의 반란을 군사력으로 제압했는데 그가 북방 에시아족(族) 원정에 나서자, 테베는 다시 한번 마케도니아를 배반했다. 호메로스를 사랑하고 그의 시에 등장하는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알렉산드로스는 전쟁터에서 여러 번 큰 부상을 당했다. 그것이 그가 죽었다는 소문으로 와전되어 그리스에 전해졌던 것이다. 아테네의 선동으로 테베는 앞질러 나서, 파견되어 있던 마케도니아 장교를 죽이고 마케도니아 수비군을 포위하여 반역을 선언함으로써 그리스 세계의 본심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멀리 있는 페르시아가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장 군대를 돌려 하루 평균 32㎞라는 위협적인 속도로 진군해 테베로 향했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의 병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테베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도시 안에서 포위당했던 마케도니아 수비군이 전투에 참가해 승리는 결국 알렉산드로스에게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로스는 신코린트 동맹의 도시 국가들에게 테베의 처분을 맡겼다. 마케도니아를 두려워하는 여러 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짐작대로 테베를 철저히 파괴했다.

 

다짐 - 소아시아 정복

왕위에 오른 지 2년 후인 기원전 334년 4월, 그리스를 통일한 스물두 살의 청년 알렉산드로스는 성대한 축전을 열어 마케도니아에 이별을 고하고 소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이 동방 원정을 위해 알렉산드로스가 이끈 병력은 주력이 되는 밀집방진(플랑크스)을 형성하는 보병대가 약 3만이었는데, 사리사라는 유명한 장창을 사용하는 보병대는 무적을 자랑했다. 그리고 코린트 동맹에 의해 7천 명의 보병들이 참가했다. 마케도니아 기병(騎兵)은 귀족 계급 출신으로 그 수는 대략 2천, 기병은 그밖에 강력한 테살리아 기병 부대가 있었고 수는 적지만 신코린트 동맹에서도 기병이 참가했다. 북방의 여러 부족들도 동방 원정에 참여했다. 가족을 데리고 간 병사도 있었고 낯선 동방의 국가들을 조사하려는 학자들, 상인들도 동행했다. 마케도니아 군과 그리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보병 3만에 기병 5천 규모였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주력 기병, 창기병, 투창병, 궁수, 중무장 보병, 경보병 등 다양한 부대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운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원정대는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 군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고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333년 11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섬멸했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페니키아 해안의 함대 기지를 점령해 철저히 파괴해버렸고,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발하던 이집트를 어렵지 않게 정복했다.

 

그는 이집트에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상업과 행정 중심지 구실을 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강물이 실어오는 침적토가 쌓이지 않는 나일 강 하구 서쪽 끝에 자리하게 된 이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이집트를 떠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10월 티그리스 강 동쪽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와 다시 결전을 벌였다. 철저하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몇 달 뒤 파르티아 사막에서 자신의 친척인 박트리아의 왕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최대의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를 정중하게 장사 지내주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전쟁에서 공도 세운 필로타스의 반란 음모를 해결하고, 기원전 329년 봄 박트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그리스 기병대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큰 위기가 발행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주력군의 상당수를 아시아인으로 편성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지역)에서 보낸 2년 간 적군의 기습과 원정군 내부의 배신, 부상과 질병이 이어지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포로로 사로잡은 박트리아 왕의 딸과 결혼하고 부하 병사들에게도 현지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는 등, 무력과 유화책을 동시에 구사하며 정복지를 넓혀갔다.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 터키 서쪽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국제간의 분쟁지)를 끼고 있는 그리스 세계와 소아시아의 거리는 대략 1.5㎞. 알렉산드로스의 군선 160척은 페르시아 해군의 습격을 경계하며 해협을 지났는데 페르시아 군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의 대응이 늦었기 때문인데, 300척 이상이나 모인 페르시아의 군선은 출동 허가를 얻지 못하고 항구에서 대기중이었다. 해전(海戰)을 예상했던 알렉산드로스는 맥이 빠졌다고 한다.

마케도니아군이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소아시아에 상륙한 것은 아니다. 헬레스폰토스의 맞은 편 해안에 있는 아비도스 시(市)에는 이미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시대에 지어진 교두보(橋頭堡)가 있었다. 아시아에 상륙하여 아비도스의 병사 1만과 합류한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움(=트로이)으로 향한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쪽의 조상이라 전해진다. 호메로스의 「일리어스」를 사랑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일리움은 특별한 곳이었다. 여신 아테네에게 기도를 한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묘지에 기름을 칠했다. 이곳에서 운동과 투기 경기를 개최한 알렉산드로스는 관람하러 온 일리움 시민들과 이웃 도시의 시민들에게 페르시아인들을 소아시아에서 추방하겠다고 맹세했다.

 

여러 전쟁들 - 그라니코스 강

한편 페르시아군은 소아시아 북부의 제레이아에 결집해 있었다. 거기에는 필리포스 2세가 소아시아에 파견했던 원정군을 격파한 장군 멤논이 있었다. 그는 로도스 섬 출신의 그리스인이었는데 그 뛰어난 수완을 다리우스 3세가 높이 사서 페르시아군의 용병대장(傭兵隊長)으로 참가했다. 멤논은 마케도니아군이 막강하며 사기가 높다는 사실을 알고 초토전술(焦土戰術)을 주장했으나 이것은 페르시아의 주(州)장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지휘관들은 멤논의 작전을 그리스인의 의견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케도니아군을 정공법(正攻法)으로 격퇴해야 한다며 그라니코스 강 해반(海畔)에 병력을 배치했다.

페르시아군의 전투대형은 알렉산드로스가 당황할 정도로 기묘했다. 페르시아군의 주력인 기병대가 깎아지른 듯한 둑 위에 배치된 것이었다. 창을 던지고 활을 쏘기엔 유리하지만 기병대의 전력은 반감되는 그런 위치에 배치된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중장(重裝) 보병들은 좁은 강변에서 옴쭉달싹 못하는 페르시아군 기병대를 기계적으로 죽여갔다. 페르시아 기병대 2만 명 중 3천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도망쳤다. 페르시아군 보병대는 거의가 그리스 용병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반역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평소대로 스스로 기병이 되어 적진으로 들어가 다리우스 3세의 사위 미트리다테스와 그 형제인 로이사케스를 일대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라니코스 강 전투는 마케도니아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방치된 페르시아군 야영지에서 대량의 전리품을 획득한 마케도니아군은 당장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해협 헬레스폰토스를 알렉산드로스가 차지했으므로 이 승리는 알렉산드로스의 배후를 위협하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반란을 잠재우게 하는 전략적인 효과가 있었다. 이 승리로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생명선 흑해 연안의 곡물 유통을 장악하고 그리스 세계에 무언의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후 알렉산드로스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호메로스가 묘사한 영웅들에 비유하며 행동하는 알렉산드로스를 정말 영웅으로 받들었다. 이 영웅의 군대가 오면 많은 도시들은 저항하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 또한 그 도시생활에 변화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방 행정 조직의 형태는 변경하지 않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인이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정복의 시작 - 멤논과의 전투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이 사는 도시에서는 알렉산드로스를 동포로 여기고 마케도니아군을 환영했지만 미트레스만은 달랐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帝國)에 종속하여 평화를 선택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도시는 자치를 허용받기는 하지만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린트 동맹에 세금을 내야 했고 알렉산드로스에게 군자금을 제공해야만 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이 아닌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자로 선택하는 그리스인 도시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중립을 원하는 미트레스가 제시한 조건을 거절하고,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로서 미트레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미트레스의 성벽은 견고해 공략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미트레스는 페르시아 해군에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선 160척의 마케도니아 함대는 강력한 페르시아 해군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미트레스에 도착하여 해상을 봉쇄하고 말았다. 해전 경험이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선수를 쳐서 별동대를 보내 페르시아 함대의 보급을 막고 400척이나 되는 군선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포위당하면서도 미트레스는 잘 싸워 마케도니아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은 점령당하여 저항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에페소스에서 추방당해 미트레스에서 반격을 생각하고 있던 장군 멤논은 이 도시의 전투에서도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하여 할리카르나소스로 탈출했다.할리카르나소스는 카리아 왕국의 수도였고, 시민들은 그리스인과 카리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엄하고 강력한 이 마케도니아군을 요격할 준비를 해놓았고 멤논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알렉산드로스를 기다렸다. 철통 같은 도시의 방어 태세를 보고 알렉산드로스는 장기전을 결의했는데 예상대로 격전(激戰)이 벌어졌다. 도시측이 시가지에 불을 놓고 곶 위에 구축된 요새로 물러났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멤논이 숨어 있는 요새만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감시를 위한 군대를 남겨 놓고 알렉산드로스는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두 왕의 대결 - 다리우스 3세

알렉산드로스는 군의 본대(本隊)를 사르디스에 보내고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리키아 지방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판퓨리아, 프리기아 지방을 정복했다. 멤논은 이때 다리우스 3세에 의해 소아시아와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에게해(海)를 석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333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갑자기 병으로 죽고 말았다. 멤논의 조카 파르나바조스는 멤논의 뜻을 받들어 에게해에서의 작전을 계속했다. 함대를 해산시켰던 알렉산드로스로서는 해상 전력을 재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기원전 333년 초봄, 알렉산드로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유명한 고르디움을 출발해 카파도키아를 평정한 다음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남하했다. 페르시아 해군의 본거지 키리키아 연안 지대로의 진군을 서둘렀다. 적의 공격 없이 알렉산드로스는 무사히 수도 타르소스에 도착했으나 페르시아의 수비대는 이미 도시에서 도망친 상태였다. 타르소스의 무더위를 견디지 못한 알렉산드로스는 알몸으로 큐도노스 강으로 뛰어들었다. 이 강은 물이 차기로 유명했는데 몸이 식은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이 지방 풍토병인 '키리키아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여름이 지나자 열병은 회복되었지만 이때가 마케도니아군으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윽고 다리우스 3세가 출전, 알렉산드로스와 싸우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건강을 회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시리아로 출발한다. 다마스쿠스를 경유하여 키리키아에서 남하하는 페르시아군과, 유리한 지형을 찾아 시리아 안에서 이동하는 마케도니아군은, 한 번 스친 후에 서로 방향을 전환해, 이소스(모자이크로 된 벽화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 3세의 대군을 무찌르는 전투 장면을 묘사한 '이소스 전투'가 있다 - 옮긴이) 땅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마케도니아군의 불행은, 이소스에는 알렉산드로스와 마찬가지로 키리키아의 풍토병에 걸린 병사들이 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마케도니아 후방에서 습격한 페르시아군은 병에 걸린 병사들을 학살하고 마케도니아군의 연락선을 끊어 놓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쟁터에서는 용감무쌍한 군인이었지만 그 이외의 곳에서는 실책을 범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소스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서둘러 이소스로 향했고 기다리고 있던 페르시아군과 격돌했다. 전략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다리우스 3세였지만, 급경사 지역인 이소스에서는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페르시아군은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마케도니아군의 중앙을 차지하는 중장 보병의 밀집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다리우스 3세는 전차를 타고 싸웠으나 다리에 부상을 입고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전쟁터에 남겨진 전리품은 마케도니아군이 놀랄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테살리아 기병을 다마스쿠스로 파견하여 더 큰 소득을 거둔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로가 된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 왕비, 두 명의 딸을 정중하게 대했다. 한편, 도주한 다리우스 3세가 인질이 된 가족의 반환과 강화를 요청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시아 제국 전체의 정복이 목적임을 선언했다.

 

티루스 - 최강의 도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즉시 추적하지 않고 페르시아 해군의 근거지 페니키아로 향했다. 에게해에서는 여전히 페르시아가 우세했고, 마케도니아군은 페르시아가 퇴로를 차단할지도 모른다고 겁내고 있었다. 해안선을 남하하는 마케도니아군 앞에 페니키아 여러 도시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지만 페니키아의 옛 수도이며 연안 지역 최강의 도시 티루스는 마케도니아군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섬에 건설된 이 도시를 육지에서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고 제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성구(攻城具)로 성벽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티루스는 전술이 뛰어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격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이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는 7개월이나 걸렸다. 남하하여 마침내 이집트로 들어간 알렉산드로스는 이 땅에 그리스풍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고, 나일 강 델타 지대의 파로스 섬을 선택한다. 훗날 이집트 수도가 되기도 하는 알렉산드리아는 이 계획에 의해 착공된 도시이다.

 

복수 - 페르세폴리스의 소멸

기원전 331년에 알렉산드로스는 티루스에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페르시아는 모든 재력을 동원해 군을 재정비했고 바빌론에 전보다도 더 큰 규모의 군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가우가멜라 마을 근처의 평원에서 두 나라의 군대는 격돌한다. 격전 도중에 다리우스 3세는 다시 말을 타고 도망쳐,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끝났다.

다리우스 3세를 쫓는 알렉산드로스 앞에 옛 수도 바빌론의 주(州)장관 마자이오스는 싸우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에서도 해방자로서 환영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궁전의 재물과 보화를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약탈이 행해지는 것을 막았다. 가우가멜라에서 그의 부장(副將)인 페르메니온을 괴롭힌 바빌론의 주장관 마자이오스를 알렉산드로스는 용감한 자로 인정하고 바빌로니아 전체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주장관직을 페르시아인에게 맡기게 되었다.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항복한 스사에서도 주장관 아브리테스는 지위를 빼앗기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금고라 불리는 도시 스사의 보물창고에는 금 1천 톤에 상당하는 미가공 귀금속 200톤이나 되는 금화가 쌓여 있었다고 한다.

페르세폴리스도 저항 없이 문을 열기는 했지만 바빌론이나 스사와는 다르게 취급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병사들에게 약탈 행위를 허용했던 것이다. 약탈은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물건이 약탈당하고 남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으며, 여자들은 죽음보다 더 비참한 일을 당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야수처럼 약탈하고 마구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약탈과 학살을 묵인했다. 그는 시와 전설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의해 100년 전에 불에 탄 신성한 아테네를 동정하여 그 보복의 기분을 눈앞의 장엄한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발산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이 도시에서 금 3천 톤에 상당하는 재물과 보화를 손에 넣었다. 그는 약탈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및 이집트의 예술과 건축 기술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 왕궁에 불을 질러 이 페르시아의 낙원을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였다.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1년에 다리우스 3세가 바빌론에 동원한 병력은 이전보다 훨씬 컸다. 가장 적은 숫자를 참고로 하더라도 기병 약 4만5천, 보병 20만으로, 강력한 바크티아리 기병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다리우스 3세는 낫이 부착된 전차의 위력에 기대를 걸었는데,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이 대형전차는 창과 검으로 바늘쥐처럼 무장했고 주위의 말과 병사를 베기 위한 낫이 네 개의 차바큇살에 장착되어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200대 준비했고, 코끼리 15마리도 전열에 배치했다. 또 이소스 전투의 패전을 거울삼아 다리우스 3세는 기병전에 유리한 가우가멜라 마을 근처의 평원에 군사들을 배치시켜 놓았다.

티루스를 출발하여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을 건넌 마케도니아군은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치한다. 전투의 발단은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알렉산드로스는 평소처럼 몸소 기병대 선두에 서서 다리우스 3세를 향해 돌진했다. 페르시아군은 지휘관이 선봉에 선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맹돌격을 강한 바크티아리 기병과 스키타이의 갑옷기병으로 요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을 따르던 그리스 기병대가 이들을 맞아 싸우게 했고,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결전 병력으로 돌입시켰다.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 보병대를 향해 낫이 장착된 전차를 전진시켰는데, 마케도니아군은 창과 활로 대항하고 말과 마부를 쓰러뜨리는 전법으로 전차를 무력화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는 이소스와 마찬가지로 적군을 분단(分斷)하고 다리우스 3세에게 다가갔다. 귀신처럼 다가오는 알렉산드로스를 겁낸 다리우스 3세는 전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다시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지휘하던 중앙 부대도 왕을 따라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페르시아군이 당장 붕괴된 것은 아니다. 바빌론의 주장관 마자이오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마케도니아군 우익을 맹공격하여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 추적하기를 포기하고, 파르메니온을 구원(救援)하러 떠났다. 왕이 전쟁터에서 사라진 페르시아군은 즉각 퇴각하기 시작했고, 은 100톤에 상당하는 재물과 보화, 귀중한 전차를 전쟁터에 남겨놓고 도망치고 말았다.

 

결말 - 다리우스 3세의 죽음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추적을 피해 다니는 사이에, 박트리아 기병을 이끄는 주장관 베소스의 음모로 죽게 된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왕을 죽인 왕위 계략자는 베소스이고 알렉산드로스는 복수자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를 공략할 준비를 하는데, 병사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이미 지쳐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다리우스 3세가 죽었을 때 이미 끝나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소스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원전 329년부터 자주 일어나는 반란 진압에 분주해진다. 박트리아의 북방 소그디아나 지방을 돌며 저항 운동을 진압한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귀족 오크슈알테스의 딸 록사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협조 정책으로 효과가 있어, 소그디아나 지방의 유력자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따랐다. 이미 이 당시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식의 전제군주로서의 행동이 두드러졌고 알현 의례에 있어서 마케도니아인에게까지도 페르시아식의 궤배례(무릎꿇고 절하기)를 요구했다. 협조 정책의 일환인지 전제자의 사치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평정하고 기원전 327년 봄에 인도로 향했다.

 

재위 13년 중 10년 간 원정하며 33세에 세상을 떠나다 

알렉산드로스는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남하하여 카이버 고개를 지나 인도로 진입해 펀자브를 통과하고자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진군을 막아선 것은 펀자브 일대를 지배하는 포루스 왕이었다. 히다스페스 강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전투보다 상대적으로 큰 희생을 치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 왕이 그 지역을 계속 통치하도록 했다. 히다스페스 강 전투 이후 원정군은 계속 진군했지만, 하루 60~80킬로미터를 걸으며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사이 지친 병사들은 귀국하기를 바랐다. 더구나 지금까지 마주한 적들보다 훨씬 강한 적이 있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열병과 기후 악조건도 심했다.

사실상 진군을 거부하는 병사의 뜻을 접한 알렉산드로스는 사흘을 기다리며 병사들의 맘이 바뀌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귀환을 결정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11월 인더스 강을 따라 남하하여 이듬해 7월 인도양에 도착했다. 이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발루치스탄 사막을 거쳐 기원전 324년 초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지역에 조폐소를 만들어 페르시아 제국에서 입수한 막대한 금을 화폐로 바꾸어 제국 전역에 걸친 경제권을 형성하려 했고, 바빌론을 수도로 삼아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기원전 323년 6월 13일 바빌론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 13년 중 10년을 원정으로 보내며 대제국을 건설한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원정과 탐사 계획을 세우고,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구상을 하는데 바빴지만, 심신의 과로와 제국 운영이라는 사명의 중압감, 원정 때 입은 여러 차례의 부상(그는 후방에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전투에 가담해 용맹하게 싸웠다.) 후유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 상태에서 걸린 열병이 과도한 음주로 악화되어 더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옛 인도의 자료에는 마케도니아군이 야만족으로 등장한다. 마지막 최대의 적인 인도 왕 폴로스와의 격전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 강 맞은편 기슭에 위치한 마가다국(國)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인더스 강의 지류 중 하나인 비파사 강(베아스 강)과 갠지스 강 사이에는 지나는 데 1년이나 걸리는 타르 사막이 가로놓여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사막을 건너 이 나라를 공략하기로 했는데, 마케도니아군의 인내심은 여기서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사기를 돋우려는 알렉산드로스의 연설에 호응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알렉산드로스는 양보하여 인더스 강을 내려가 군대를 돌리기로 했다. 해로와 육로로 나누어 돌아가기로 했는데, 육로를 지나는 병사들은 불모의 사막에서 식량과 물 부족으로 잇달아 쓰러졌다. 이 지옥 행군을 거쳐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5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돌아온다. 스사에 정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축하연을 성대히 열고 합동 결혼식을 거행해 이민족과 마케도니아인의 융합을 꾀했다. 또한 페르시아의 청년 3만 명에게 마케도니아식 군사교련을 실시하고 군에 편입시켜 페르시아 기병대에게 '동료'로 불리는 명예로운 칭호를 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 마케도니아인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왔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는 수도 바빌론으로 돌아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말라리아로 추측되는 병에 걸렸다. 열흘 후인 6월 13일 해가 질 무렵, 그는 후계자도 정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후계자를 묻자 알렉산드로스는 '크라스토(가장 강한 자)'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그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는 설도 있다. 측근들은 후계자를 결정하는 회의를 우선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는 관에 넣은 채 며칠 동안 방치되었다. 피비린내나는 권력 투쟁이 있는 동안에 알렉산드로스의 애매모호한 한 마디는 현실이 되었다. 측근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분할하고 말았다.

 

이루지 못한 꿈 - 한 시대의 종말

알렉산드로스는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통치자의 재능은 있었다 해도 그것이 발휘될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어머니로부터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대를 받은 고뇌하는 소년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인들이 페르시아를 이기기 위한 영웅을 원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동안에는 알렉산드로스를 지지했으나 그렇게 못할 때는 그를 버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업적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가 정복한 땅에 많은 헬레니즘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결과 문화, 인종, 기술이 확산·융합되었다. 불교 미술로 알려진 간다라 미술도 그중 하나이다. 그가 정복한 땅은 그의 부하들이 네 개의 왕국으로 분할했다. 대제국 페르시아를 적당한 크기로 되돌려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방이 다시 한번 통합될 때까지는 로마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산, ‘동서 문화의 교류와 융합’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그의 사후 제국은 세 나라로 갈라졌지만, 알렉산드로스 이전과 이후는 결코 더 이상 같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은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캘커타 지역에 이르는 인도를 정복했고, 간다라로 불리는 카이버 고개 지역에서는 동서양이 절충된 새로운 예술양식, 간다라 미술로 불리는 양식이 탄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융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도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기원전 330년경부터 이집트가 로마에 정복당하는 기원전 30년에 이르는 약 300년의 시기, 즉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연 시대였다. 헬레니즘 시대는 로마 제국의 토양이 된 것은 물론, 이후 비잔틴 세계, 이슬람 세계, 서유럽 세계에도 공통의 유산으로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2세기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세계는 단절된 사건들뿐이었지만 이제 역사는 진정으로 연결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시아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헬레니즘 시대를 (고전 시대) 그리스 문화의 쇠퇴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리스 문화의 융합적 보편화와 확산의 시기로 평가하는 시각도 많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은 살육과 파괴로 피정복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그는 대부분의 세월을 원정으로 보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제국을 안정시키고 다스리는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여줄 기회도 사실상 없었다. 말년에는 격분과 우울을 오가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편협한 세계인식에서 벗어나 세계주의를 지향하며 지리적, 문화적, 상업적 측면에서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확장시키고 보편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은, 그의 정복사업이 남긴 분명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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