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을 百日天下로 끝낸 워털루 전투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1세(Napoleon Bonaparte I, 1769~1821)는 이듬해 퇴위하여 엘바 섬(Elba Island)으로 유배되었다. 연합군은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Louis XVIII, 1755~1824)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루이 18세의 통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나폴레옹 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소집되었던 빈 회의도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나폴레옹은 1815년 2월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부하 1,000여 명과 함께 파리로 진군하였다. 루이 18세는 관군을 파견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관군을 이끌고 있던 네이 원수와 술트 원수가 나폴레옹에 가담하게 된다. 결국 루이 18세는 영국으로 도피하고, 나폴레옹은 20여 일만에 파리에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 각국은 즉각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군을 결집한다. 나폴레옹은 서둘러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프랑스 주력군 12만 5,000명을 프랑스 북쪽 국경에 배치시켰다. 이때 북쪽 방향에서 진군 중이던 연합군은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이 이끄는 약 9만 5,000명의 영국군과 블뤼허(Bluecher, 1742~1819)가 지휘하는 약 12만의 프로이센군이었다. 나폴레옹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프랑스 군의 질적인 우위를 이용, 조기에 각개 격파할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 군과 연합군은 벨기에의 워털루(Waterloo)에서 격돌하였다.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에 1만 6,000여 명의 사상자를 안기고, 블뤼허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병력의 3분의 1을 내어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하고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나폴레옹이 유배지였던 엘바섬을 탈출해 다시 프랑스를 장악했다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결국 세인트헬라나섬으로 유배를 간 시기를 일컬어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시기라고 부른다. 이 백일천하를 끝장낸 워털루 전투의 패배요인을 두고 여러 설들이 존재하지만, 역사가들은 공통적으로 나폴레옹의 고질병이었던 '치질(痔疾)'을 패배의 가장 큰 요인으로 손꼽는다. 나폴레옹을 위해 그의 주치의가 워털루 전투 전날 대량의 아편주사를 놓았고, 아편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지휘를 하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참패하면서 그의 백일천하가 끝장났다는게 정설이다. 하지만 실제 그의 군대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나폴레옹이 걸린 치질이 문제가 될 만큼이나 나폴레옹 한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데 있었다. 나폴레옹은 천재적 군사전략가였지만, 전선 시찰부터 전술 입안, 결정, 명령 전달, 성과파악을 위한 재시찰 등 모든 작전과정에 개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령관으로 유명했다. 사령관들이 보낸 전령을 믿지 않고 본인이 모든 전장을 시찰하러 다니며 모든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불침번을 서다 조는 초병을 대신해 불침번을 섰다는 일화부터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했다는 각종 에피소드들은 미화된 측면도 있겠지만, 그가 얼마나 꼼꼼히 부대시찰을 다녔는지 보여준다. 나폴레옹은 보통 하루평균 말 안장 위에 16시간이나 앉아 시찰을 다니며 밤을 세우기 일수였고, 하루 4시간밖에 못 잤다고 한다. 딱딱한 말 안장 위에 그렇게 오랜시간 앉아 전선시찰을 다니다보니 당연히 악성 치질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편에 취해 내린 말도 안되는 명령조차 군말 없이 수행하는, 흡사 산업용 로봇과도 같이 움직인 나폴레옹군의 조직문화와 체계가 백일천하를 끝장낸 셈이다. 그의 부재시 전체 전략을 이끌 참모가 있었거나 그가 실수할 때 바로 잡아줄 만한 측근이나 조직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6월 17일 저녁부터 18일 새벽까지 폭우가 내려 땅이 질어진 탓에 육중한 대포의 기동이 어려워진 점과 프러시아군 추적차 멍청한 그루쉬 원수에게 할양한 4개 군단 3만 8천 여 군대가 주전장이 어딘지 몰라 워털루 전투에 합류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그러나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영국군에 가담하면서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듯하던 전세가 한 번에 연합군으로 기울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4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그는 6월 22일 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Island)로 유배되었고 6년 후인 1821년 5월 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이후, 프랑스에서는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외국으로 도피해 있었던 귀족들도 대거 프랑스로 돌아왔다. 진척이 없던 빈 회의도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최종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절대 왕정의 복고로,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전파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었다.

 

전투 이전의 상황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숙련병을 대부분 잃은 탓에, 산병과 종진·횡진의 혼성 전술을 취할 수 없게 된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병력의 대부분을 동맹국에서 소집하였다. 하지만 결전에서도 외국인과 신병으로는 왕년의 전술을 제대로 펼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패배한 나폴레옹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엘바 섬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유럽을 재분할하기 위해 집결한 빈 회의에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충돌하였다. 회의는 전혀 진전되지 못했고, 불안에 흔들리는 프랑스의 상황을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최후의 희망을 걸고 엘바 섬을 탈출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상륙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연합군 수뇌는 당황했고, 왕위에 복귀한 루이 18세는 잇달아 토벌군을 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접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깃발을 바꾸어 들어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자꾸 늘어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카드로 내민 ‘용사 중의 용사’ 네 원수가 나폴레옹에게 투항하자 마침내 루이 18세는 파리를 탈출했다. 드디어 튈르리 궁전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주변 나라들에 강화와 공존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수뇌들은 이를 거절하고 군을 동원하여 프랑스를 침공한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본 나폴레옹 역시 대동원령을 내리고 12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출격했다.
연합군은 각 방면에서 프랑스 국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나폴레옹은 군을 분산하고 스스로 7만 2천 명을 이끌고 서부 전선으로 갔다. 목적지는 벨기에였다. 그곳에서는 연합군의 중심인 숙적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정예를 자랑하는 프로이센군과 연합하여 국경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양군이 합치면 그 전력은 프랑스군을 웃돈다. 나폴레옹은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합류하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서 각개 격파하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서전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프랑스군은 이어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결정타를 주지는 못하여, 후퇴한 프로이센군을 섬멸하기 위해 3만 병력을 분리해낸 나폴레옹은 그 지휘를 그루시 원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웰링턴을 쫓았다. 후퇴한 웰링턴은 동서 4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릉을 따라 포진하였다. 뒤는 삼림이고 앞에는 라에생트를 비롯한 몇 채의 농가들이 있었다. 밤중에 이 농가들을 요새화한 웰링턴은 방어 진형을 만들어놓고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결전의 장은 브뤼셀 동남부에 있는 워털루 근처의 완만한 구릉지대였다.

 

농가에서의 공방전
대치한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각각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포진하였다. 웰링턴이 지휘하는 대군은 영국과 벨기에, 네덜란드 혼성군이었다. 전장 북쪽의 언덕을 방어선으로 삼은 웰링턴은 우익에 있는 한 농가를 요새화하여 프랑스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지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시간은 웰링턴 편이었다. 전초전에서 패한 프로이센군이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쪽으로 오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전선을 유지하며 병력 소모를 피하기만 한다면 승리는 자연히 웰링턴의 차지가 된다. 웰링턴의 여유는 곧 나폴레옹의 초조였다. 전날 밤에 내린 비로 질척이는 길이 마르기를 기다리지만, 그렇게 소비한 시간이 줄곧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동서로 길게 뻗은 연합군의 포진을 보고 작전을 결정했다.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은 문제가 아니다. 적은 영국군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면에 늘어놓은 80문의 대포로 집중 사격을 하여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웰링턴의 사령부를 분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치열한 백병전 공방
공방전은 점차 격렬함을 더해갔다.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요새화한 곳이지만, 프랑스군이 좌익의 전 사단을 집중할 정도의 기세로 공격에 나서자 웰링턴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웰링턴이 중앙을 지키는 사단을 농가 방위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 프랑스군의 포진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나폴레옹은 이 대회전에 전술 단위로 오더믹스 진형을 채택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진형은 거대한 T자형을 이루었고, 좌우에 펼쳐진 7개 사단의 대군은 그대로 적을 교란하는 산병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산병의 공격으로 생긴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폴레옹이 직접 인솔하는 친위대를 포함한 3개 사단이 종진으로 돌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 그대로 거대한 창이 되어 포진하고 있다. 웰링턴은 농가에 대한 지원을 포기했다. 중앙의 방비를 약체화하려고 하는 나폴레옹의 노림수는 어긋났다. 영국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농가를 방위하는 영국 병사들도 열심히 방어전을 계속하고 프랑스군 병력이 그쪽으로 쏠리자 나폴레옹의 작전이 묘하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프로이센군은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을 터였다. 나폴레옹은 작전을 수정했다. 영국군의 방어를 약화하는 전법은 포기하고 실력으로 돌파하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작전 명령을 알리는 북소리가 일제히 울려퍼졌다. 소년 고수가 작은북을 치자 대열을 갖춘 우익의 4개 사단이 정연하게 전진한다. 이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능선에 포진한 채 총격과 포격을 펴는 영국군을 향해 프랑스 보병대는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진격한다. 그리하여 중앙에 위치한 또 하나의 요새 라에생트 농가를 함락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에서 산병이 전개하여 영국군을 공격해야 한다. 산병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사격 목표를 변경하기도 하고 전력을 집중하거나 분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전후 20년에 걸쳐 많은 전쟁을 치러온 육군에는 이미 그럴 만한 노련한 병사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채택한 1열 횡대였지만, 압박 능력은 산병보다 훨씬 뛰어났다. 영국군 좌익을 담당한 동맹국군은 크게 동요하여 벨기에군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돌파구를 내기 전에 먼저 영국군 일단이 맹렬하게 돌진하여 무너진 곳을 메웠다. 그 지휘관은 전장에서도 군복을 입지 않고 실크 햇과 플록 코트를 고집하는 맹장 픽톤 장군이었다. 성난 파도 같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낸 픽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지만 영국군의 견고한 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프랑스군의 정연한 공격도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웰링턴이 중기병을 출격시킨다. 보병 전열의 결절점을 찌른다는 기병 이론에 따른 영국군의 반격에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영국군 중기병은 그 기세를 몰아 혼합 여단의 보병과 함께 맹렬한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기병대도 밀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나팔이 적막하게 울려퍼지자, 정렬한 창기병들이 창 끝을 가지런히 하고 반격에 나선다. 칼을 뽑아들고 보병을 물리친 영국군 중기병도 더 긴 창을 든 창기병 앞에 대열이 찢어지고 만다. 중기병은 줄곧 나폴레옹 사령부 쪽으로 진격하려고 하지만, 거기에는 나폴레옹이 중앙 돌파를 위해 집결시켜 놓은 친위대 직속의 포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6파운드 대포의 집중 포화가 대지를 뒤흔들자 직격탄을 맞은 기병들이 말과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영국 중기병이 당황하여 후퇴하지만, 그 대열 한가운데로 포병대는 일제 포격을 가했다.

 

무모했던 네 원수의 기병대 단독출격!
영국 기병대와 픽톤 사단의 맹공격을 격퇴한 나폴레옹은 승패를 가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선에 배치된 포병대를 총동원하여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포격을 개시했다. 작렬하지 않는 철구탄이기는 해도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밀집해 있던 영국군은 땅에 떨어졌다 튄 포탄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갔다. 이대로 가면 병력만 소모될 뿐이라고 생각한 웰링턴은 다시 전군에게 뒤쪽 비탈로 물러서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의 자색 군복이 썰물처럼 능선을 넘어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본 네 원수는 웰링턴이 전면적인 후퇴에 들어갔다고 오판했다. 돌격 나팔이 울렸다. 기병대의 또 하나의 쓰임새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완전 붕괴로 몰아넣는 결전 병력으로서의 역할이다. 기병은 방어가 불가능한 패주하는 적을 상대할 때 최대의 타격력을 발휘한다.

그동안에도 영국군은 능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이대로 놔두면 기회를 놓친다. 초조해진 네는 보병이 집결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휘하의 중기병 5천 기로 총공격에 나섰다. 대지를 뒤흔들며 5천 기의 기병이 돌진한다. 웰링턴은 크게 놀랐다. 충격력은 절대적이지만 방어가 취약한 기병대를 보병이나 포병의 엄호 없이 돌격시킨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짓이다. 웰링턴은 서둘러 보병대에게 방어 진형을 짜게 하였다. 구릉 경사면에 20개의 거대한 방진이 자리를 잡았다. 중앙의 보병들은 총검의 장벽을 만들었고, 그런 방진들이 제단으로 편성되어 5천 기의 중기병을 기다렸다. 나아가 총검의 안쪽에서는 머스킷 총이 연발 사격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포병대가 대포를 죽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프랑스군 기병은 정지하지 않았다. 사벨을 번쩍이며 용맹하게 돌격해오는 기병집단을 향해 영국 포병대가 불을 뿜었다. 기병은 보병과 격돌하기 전에 먼저 원거리 병기로 공격한다. 크레시나 나가시노에서 확립된 이론은 워털루에서도 살아 있었다. 탄알이 흙먼지를 뿜어올리며 쏟아지자 재앙을 당한 기병들이 나뒹군다. 쓰러진 동료에 걸려 그 몇 배나 되는 말들이 연달아 쓰러졌고, 내동댕이쳐진 기병들이 직격탄에 날아간다. 그리고 접근한 기병을 향해 머스킷 총이 일제 사격을 한다. 뿜어져나온 피가 허공을 물들이고 군복을 적시는 격전의 와중에 웰링턴은 말을 타고 방진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힘차게 명령을 내린다. 그래도 중기병의 파괴력은 역시 무서운 것이었다. 굳세게 방어를 하던 보병 방진도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고 기병의 노도는 조금씩 웰링턴의 사령부로 육박했다. 그때였다. 프랑스군의 오른쪽 저 멀리에서 프로이센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폴레옹은 돌격하는 종진 중에서 4개 사단을 급히 쪼개어 우익으로 보냈다. 4개 사단으로 막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프로이센군의 전선 도착을 늦출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나폴레옹은 귀중한 예비대를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네의 공세도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네는 보병의 엄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하였고, 그동안 웰링턴은 병사를 다시 모아 중앙 진용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웰링턴의 전열에는 이미 커다란 균열이 생긴 상태였다. 라에생트는 함락되고 동맹국 군대는 동요하고 있어 이미 강고한 방어를 바라기 힘들었다. 이곳을 지켜야 할 픽톤 장군은 이미 죽었고, 승리를 확신한 네는 나폴레옹에게 예비대를 보내라고 진언하는 전령을 급파했다. 하지만 보내야 할 예비대는 이미 프로이센군 쪽으로 보낸 상태였다. 남은 예비 병력은 무적을 자랑하는 근위군. 그러나 이것은 나폴레옹의 마지막 카드였다.

나폴레옹의 망설임이 운명을 바꾸었다. 나폴레옹이 근위군의 투입을 결의하고 공격을 재개했을 때는 이미 영국군도 균열의 보강을 마친 상태였다. 영국군은 4열 횡대를 짜고 차폐물이 될 만한 것은 전부 쌓아올려서 몸을 가렸다. 전군이 거대한 산병이 된 듯한 영국군 앞에, 어렵게 투입된 근위군이 위풍당당하게 진격한다. 자부심 강한 결전 사단은 정연하게 행진하여 영국군이 진을 친 언덕 능선을 넘었다. 그 순간 몸을 숨기고 있던 영국군은 일제히 포격을 했다. 무방비한 친위대에 탄환이 비처럼 쏟아진다. 여기저기 쓰러지는 전우들 모습에 마침내 근위군은 그 역사상 처음 보는 행동에 나섰다. 도망친 것이다. 일단 균열이 생긴 보병은 취약하다. 웰링턴은 그 균열을 노리고, 온존시켜 두었던 기병대를 투입했다. 나아가 방어용으로 투입된 프랑스의 4개 사단을 무찌르고 가까스로 전선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이,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이제 프랑스군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뿔뿔이 패주하는 프랑스군은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기사회생을 노리던 나폴레옹의 야망은 석양 속에 스러지고 말았다. 붕괴한 프랑스군 가운데 친위대만은 끝까지 긍지를 지켰다. 그들은 견고한 방진을 짜고, 전우와 나폴레옹이 도피할 때까지 항복을 권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싸웠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 명도 남김없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전투 와중에도 3만이라는 대규모 분파군을 맡은 그루시 원수는 프로이센군의 발을 붙들라는 명령을 지키며 정처 없이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나폴레옹 곁에 있었으면 결정적인 예비대로 기능했을 병력은 무능한 지휘관에 맡겨진 탓에 전황에 기여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웰링턴이 가진 중앙부 병력을 가능한 한 엷게 만들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은 그 농가 Mont Saint Jean 에 주목했다. 웰링턴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지만, 나폴레옹은 이곳을 전략의 요지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농가를 점령하면 웰링턴의 목에 검을 들이대는 형국이 되고 웰링턴으로서는 방어가 불리해진다. 그래서 웰링턴이 방어를 위해 중앙의 병사를 돌릴 것이 분명하다고 본 나폴레옹은 동시에 좌익에도 공격을 가하도록 명했다. 1815년 6월 18일 오전 11시 30분. 프랑스군 좌익 제2군단이 농가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80문의 포열이 요란하게 불을 뿜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포탄이 영국군의 전열에서 연달아 작렬한다. 그러나 병력 소모를 두려워한 웰링턴은 수하 각 사단을 능선 배후로 후퇴시켰고, 프랑스군의 포탄은 공연히 땅에 구덩이를 팔 뿐이었다. 나아가 농가를 지키는 영국군은 분전을 하여 프랑스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나폴레옹에게는 농가를 공격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점차 흥분하여, 영국군의 전선 압박을 위해 배치된 각 사단은 무엇에 빨려들듯 농가로 몰려갔다. 나폴레옹의 전성기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사태였다

 

전술의 의의

알렉산드로스와 나폴레옹은 2천1백50년의 세월 차가 있는 천재들이다. 그럼에도 두 천재의 전법은 거의 동일했다. 산병을 중시하고, 원거리 공격 병기로 적 전력을 소모시키고, 주력의 종대 돌격으로 승부를 냈다. 유일한 차이점은 알렉산드로스의 적이 그의 전법을 배우지 못하여 그가 마지막까지 불패를 자랑한 데 반해 나폴레옹의 적은 그의 전술을 배우고 그대로 모방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산병으로 적 병력을 점진적으로 삭감하고 혼란을 유도하며, 나아가 횡진으로 전면적으로 압박한 뒤에 정예 부대를 종진으로 돌입시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확립한 마케도니아식 전술의 발전형인 것은 틀림없으며, 개량된 점이라면 병기의 발달로 대포를 보병 머리 너머로 사격함으로써 격돌 직전까지도 적군을 혼란시키고 병력을 삭감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병력이 아무리 늘어나도 지휘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의 부하들 중에 실전형, 더구나 공세에 강한 맹장이 많았던 것을 아울러 고려하면 대병력의 집결과 운용 수완에서는 역사상 최고 자리에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 때는 나폴레옹이 길러온 숙련병이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황제의 친위대인 근위병이나 그 선발 부대인 친위대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싸우는 사단의 병사들은 주로 프랑스나 주변국에서 새로 소집한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움직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 양동 작전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농가 공격에서도 흥분한 장군들이 필요 이상의 대병력을 투입하였다. 또 네의 기병대 돌격만 해도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헬리콥터나 보병 사단의 지원도 없이 전차만 돌격한 꼴이다. 상대가 동종의 기병뿐이라면 또 모르되, 혼합 병종 사단을 상대로 보병 및 포병의 지원 없이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 게 없었다.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몸소 지휘하는 기병대와 보병부대를 함께 돌격시켰다. 또 자신이 전투의 와중에 있는 만큼 전황의 변화에 따라 즉시 적확한 지시를 내려 승리를 차지하였다. 나폴레옹은 대개 후방 사령부에서 지휘를 했다. 예전의 나폴레옹이라면 전선을 뛰어다니며 스스로 전황을 확인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네의 돌격으로 동맹군이 붕괴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결전 사단의 투입을 즉시 결단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 망설임이 승패를 가른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전황에 따라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그루시의 맹종적인 태도 때문에 3만이라는 대병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허수아비로 만들어 패배를 불렀다. 나아가 곁에 두었던 예비 병력도 프로이센군 쪽으로 투입한 탓에 최후의 결정타를 가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최후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여 패배하지만, 전성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못지않은 훌륭한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나폴레옹 전술이란 산병의 사용이나 예비 병력에 의한 종진 돌파가 아니라, 자기 본류의 전술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채택했던 밀집 횡진에 의한 전면 압박 전법이다.

전술의 역사는 인간의 발전사이기도 하다. 이미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완성의 경지에 달한 혼성 전술이 그뒤 오랜 잠에 빠졌다가 나폴레옹 시대에 다시 부활한 이유에는 분명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졌다는 배경이 있다. 지배자만 전능한 존재이며 병사는 노예 상태에 있던 시대의 군대는 경직화된 전술 이외는 취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사들이 자유 의식을 갖게 되고 진정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던 그리스 시대를 거쳐 마케도니아군의 병종 혼합군이 나타난다. 한니발의 카르타고 시민군이나 로마 시민군의 존재가 있었음에도 자유로운 병사에 의한 혼합군은 중세의 어둠과 함께 잊혀졌다. 귀족의 사병으로 변한 군대는 전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의식화한 전투 속에서 에드워드 왕 같은 예외적인 존재가 근근히 나타나는 데 지나지 않았다. 13세기 말의 르네상스에 이르러 인간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의식을 각성하고 동시에 그리스·로마시대의 전술도 발굴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 인간은 자유를 획득한다. 나폴레옹의 힘은 곧 자유시민의 힘이었다. 전술도 인간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인 만큼 자유를 아는 인간만이 분명 최강의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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