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雄 Napoleon Bonaparte

생애 초기

나폴레옹 1세(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이탈리아 제노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코르시카 소귀족 출신의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 즉 이탈리아어로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1년 전 그의 고향 코르시카는 1768년 루이 15세 치세하에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며, 그가 태어날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라 불렸다. 모친 레티지아의 엄격한 규율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이 지난 1779년 1월 코르시카를 떠나 오툉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의 교사였던 샤르동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조용하고 사색적인 학생이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보통 홀로 산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코르시카 방언만 아는 나폴레옹에게 프랑스어는 외국어였고, 자연스레 프랑스 학생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5월 나폴레옹은 브리엔르샤토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문학과 어학보다는 수학 쪽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나폴레옹은 이후 그의 비서가 될 루이 앙투안 포블레 드 부리엔만을 친구로 만났다.

 

프랑스 혁명군 시절
1785년 9월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6세의 나폴레옹은 11월부터 라 페르 포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작은 키와 빈약한 몸매 때문에 수학자라는 별명을 얻는 이 소년장교는 8년 후인 1793년인 툴롱에서 천재적인 전략으로 영국군들을 몰아냄으로서 무기력했던 프랑스 혁명군의 영웅이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고 자코뱅파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열렬한 코르시카 민족주의자였던 나폴레옹은 당시 코르시카 민족운동 지도자였던 파스쿠알레 파올리에게도 지지를 보냈다.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코르시카를 방문했던 나폴레옹은 1792년 혁명정부 아래에서 코르시카 제2 의용대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혁명전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그는 영국식 입헌군주정을 추종하는 파올리와 여러모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1793년 마르세유로 피신하게 되었다.

다시 정규군 대위로 편입된 나폴레옹은 자코뱅 혁명정부의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고, 군인으로서도 툴롱 공성전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자코뱅 정권에 반대하는 연방주의자들이나 왕당파 세력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25세의 나이로 소장으로 진급, 마음속에 찬란한 별을 품고 이탈리아 국경군의 포병장군이 되었다. 1795년에는 프랑스 국민공회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정치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폴 바라스는 당시 27살의 나폴레옹이 급성장할까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앨리스테어 혼은 당시 나폴레옹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병사들은 월급도 받지 못하고 굶주린 데다 무기마저 빈약해서 거의 반란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여겼던 이유(훗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속았다면서 이러한 생각을 버렸지만)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합지졸의 군대를 단 며칠 만에 최정예 부대로 변화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1797년 10월까지 16만 명의 포로와 2천대 이상의 대포를 전리품으로 취한다. 프랑스의 영웅, 우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나폴레옹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기라도 하듯이 이 땅덩이가 벌써 발 밑에서 달아나는 것 같았다.”


1794년에 그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 정권이 몰락하고 온건한 총재정부가 들어서자 잠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풀려난 이후에는 방데 전선에 배속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잠시 한직으로 물러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795년 10월 5일에 발생한 왕당파 반란을 파리 시내 포격으로 과감하고도 잔혹하게 진압함으로써 총재정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796년 나폴레옹은 연인 데지레와 헤어지고 귀족 미망인이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한 후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이곳을 통한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피에몬테를 2주 만에 돌파한 그는 1797년 1월까지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해 나갔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수도 빈이 위험해지자 뢰벤 조약과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프랑스에 북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지역을 할양하였다. 나아가 그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한 베네치아를 정복하였는데 이는 베네치아가 탄생한 110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장군이 이루어낸 놀라운 전승 소식은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을 양산해 냈다.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총재정부는 그의 정치세력화를 염려하여 국민들의 시선에서 멀리 떼어 놓고자 하였다. 이에 총재정부는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길목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고,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 5천 명의 병력과 167명의 과학자들을 대동하여 이집트로 떠났다. 6월 몰타 섬을 점령한 후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곧 기자의 피라미드 전투에서 마물루크 왕조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8월 1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두 척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 전함 들을 격침시켰고 이집트 곳곳에서도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그 사이 나폴레옹과 함께 온 학자들은 이집트의 중요한 유물들을 약탈하고 수집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군대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보급 부족과 풍토병으로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유럽에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8월 24일 일시적인 영국 해군의 철수를 이용하여 군대를 클레베르 장군에게 맡기고 이집트를 몰래 빠져나와 프랑스로 향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으로 이집트와 프랑스 간의 연락망은 두절된 상태였고 본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의 승리,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지역에서의 잔혹한 정벌로 이어지면서 그는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철저히 한다. 그리고 혁명 이후 위태롭던 집정부를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무너뜨려 버리고 1799년 11월 9일 집정부의 시대에 마감도장을 찍어버렸다. 나폴레옹의 등장을 본 프랑스 국민들은 “공화국 만세! 나폴레옹 만세!”로 화답했다. 나폴레옹은 집정부의 지도자들을 위선자와 사기꾼들이라고 몰아붙이고,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스스로 절대 권력인 제 1통령의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훗날, 샤토브리앙과 더불어 나폴레옹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던 프랑스의 지성 스탈 부인도 이 순간에는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즐거워했다. 말렝고 전투 이후 귀국 길에 나폴레옹은 공식적인 환영의 자리를 피하기 위해 새벽 2시에 몰래 파리시의 정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이 영웅의 귀가를 환영하기 위해 더 일찍 모여 폭풍우 같은 기쁨의 환성을 터트렸다. “앙리 4세 이후 어떤 정복자도 그렇게 환영 받은 적은 없다.”고 한 역사학자는 현장을 기록했다. 말렝고는 나폴레옹이 파리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걸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1804년 12월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탄생했다. 나폴레옹은 절대 권력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의 대변혁을 추구했다. 이 부분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빛나게 했다. 그는 종교의 신성도 정치에 이용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하느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라는 문장은 그가 종교를 국가 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한 면을 잘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말한다. “한 국가가 종교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잘 통치될 수 있겠는가? 사회는 불평등한 재산을 제외하면 존재할 수 없고, 불평등한 재산은 종교 없이 유지될 수 없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됨으로서 방데 지역을 진정시켰다. … 유대민족을 통치했다면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했으리라.” “나는 당신들을(성직자들)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종교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가 몰락 한 후, 도덕, 군사 정치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프랑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프랑스는 활기차고 교회의 종소리는 다시 울려 퍼졌다. 나폴레옹의 권력 아래서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즐겼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루이 다비드 작 1801년

 

브뤼메르 쿠데타와 황제 즉위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한 때는 10월로 프랑스의 전황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재정은 파탄이 났고 총재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다. 오백인회와 원로원이 나폴레옹의 전선 이탈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지도자들인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그의 동생 루이 시에예스, 로제 뒤코스, 조제프 푸셰, 탈레랑 등의 협력으로 1799년 11월 9일, 즉 안개달(Brumaire) 18일에 쿠데타를 감행하여 체제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 체제를 수립하였다. 3명의 통령들이 선출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내정과 외교, 군사권 등을 담당한 제1통령이 되어 사실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대 프랑스 동맹에 대한 공격을 위해 알프스를 넘어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였다.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오스트리아로부터 제국 서부 라인 강변 지역과 북이탈리아를 양도받았다. 이후 1802년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짧은 평화의 시기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정 각 분야에 수많은 개혁들을 실시하였다. 조세 제도와 행정 제도의 정비는 물론 프랑스 국내경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산업부흥에 매진했다. 또한 1801년 교황과의 정교 협약을 통해 프랑스 내 가톨릭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유대인이나 개신교도들에게도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1802년 종신통령에 취임하여 자신의 독재권을 확립한 나폴레옹은 이제 권력의 화신으로 변모해 나갔다. 물론 주변 인물들의 부추김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새로운 군주가 들어서면 부르봉 왕조의 복귀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자코뱅파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나폴레옹은 이제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1804년 12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자신과 부인 조제핀의 축성식을 열었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나폴레옹은 구체제의 부르봉 왕조와 다른 혁명의 유산을 이어받은 황제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공화정을 건설했던 혁명과 제정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그의 황제 즉위는 혁명에 대한 배반을 의미했고 실제로 베토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에게 깊이 실망하였다.

그의 황제 직위는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803년 영국의 아미앙 조약 파기 이후 1805년까지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이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 수도 빈을 함락하였고, 이후 아우스터를리츠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 서부 라인 강 유역에 라인 동맹이라는 프랑스 종속 지대를 설정하면서 독일 지역을 재편하였다. 이는 962년부터 내려져 오던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해체를 의미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바다에서는 뼈아픈 패배를 맛봐야 했다. 1805년 10월 21일에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가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궤멸되었기 때문이다. 섬으로 고립된 영국은 대 프랑스 동맹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원정 실패는 대륙에 대한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을 불완전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나폴레옹은 1세는 영국을 철저하게 고립시켜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영국과 대륙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이미 많은 식민지를 가진 영국에게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폴레옹의 치하에 있던 대륙의 많은 나라들에게 경제적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3차 동맹에서는 중립을 지키던 프로이센이 결국 프랑스에 반대를 표명하면서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 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10월에 벌어진 예나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또한 나폴레옹에게 커다란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다음해인 1807년 폴란드로 진격한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동유럽 지역의 영토들을 재조정하여 프랑스 제국의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 및 나폴리 왕에, 동생 루이와 제롬은 각각 홀란드와 베스트팔리아 왕에 임명하는 등 프랑스 주변 지역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통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폴레옹 1세는 에스파냐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유럽을 제패할 당시 나폴레옹에게 남은 유일한 근심거리는 바로 황후 조제핀이었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이상하게 나폴레옹과의 사이에서는 후사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불임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806년 혼외자식인 샤를이 태어나면서부터 갑자기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불임의 문제를 조제핀에게 돌리면서 1810년 조제핀과 이혼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루이즈(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811년 마리 루이즈는 기대했던 것처럼 나폴레옹 1세에게 남자 아이를 선사하였다. 후일 나폴레옹 2세라 불릴 이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나폴레옹 1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로마왕’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몰락
1812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를 어기고 있던 러시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6월 나폴레옹 1세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출정하였는데 러시아는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대응하여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점령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어려움 없이 진군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별 다른 전투도 없었고 무엇보다 점령당할 사람들이 없었다. 결국 12월에 들어와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자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 혹한기의 귀국길은 그의 군대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병력의 대부분이 동사로 사망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1813년부터 또 다시 결성된 대 프랑스 동맹의 공격을 맞이해야만 했다. 초반에는 나폴레옹 1세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기를 잡았으나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하여 동맹군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1814년 3월 31일 파리가 함락되면서 나폴레옹은 폰텐블로(Fontainbleau)의 항복(1814)으로 제국을 상실하고, 퇴위를 당하고 이탈리아 서쪽에 위치한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가 섬을 탈출, 프랑스로 잠입하여 마지막 동맹군과 전면 충동을 시도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하려는 빈체제가 결성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부르봉 왕가를 다시 프랑스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는 임시정부위원회가 제안한 1814년 헌장을 승인한 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혁명의 세례를 받은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왕정복고에 강한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왕정복고 초기 무질서한 상황은 나폴레옹에게 다시 재기의 기회를 주었다.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몰래 탈출하여 28일 프랑스 본토에 상륙했고 파죽지세로 파리로 올라오면서 자신의 세력들을 규합했다. 3월 20일, 마침내 나폴레옹은 파리에 도착했고 루이 18세는 다시 벨기에로 피신하였다. 권력을 다시 잡은 나폴레옹은 주변국들과의 평화를 원했으나 동맹국들이 볼 때 이는 나폴레옹의 세력 확대를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하였다. 초반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6월 18일 영국과 프로이센이 주축이 된 동맹군과 벌인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약 100여 일 동안 이루어진 나폴레옹의 재기 시도는 완전히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식물처럼 되어 버렸소. 이제 사는 것이 아니오."

나폴레옹 1세는 6월 22일 자신의 황위를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영국 해군에게 체포되어 남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네 살밖에 안 된 나폴레옹 2세는 모친 마리 루이즈와 함께 외가인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양위선언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퇴락한 나폴레옹은 애당초 미국으로 향했으나 영국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영국 선박에서 나폴레옹은 대접을 잘 받았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런던 근교에서 감시는 받겠지만 안락한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탄 벨레로폰 호가 영국 플리머스에 닻을 내리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통신이 두절되었고,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짐을 뒤져 귀중품까지 약탈해갔다. 프랑스 황제는 영국의 전쟁포로, 혹은 유배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나폴레옹은 8월 9일 노섬벨랜드 호를 타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향했다.

 

아프리카 대륙 서쪽 기슭에서 약 1,900km 떨어진 남대서양에 있는 영국 식민지 작은 섬으로 나폴레옹은 유배된 것이다. 10월 14일 나폴레옹은 라스 카즈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 섬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할 생각을 하고 눈앞에 보이는 세인트헬레나 섬을 마주했다. 유배 생활 동안 그의 회고록을 정리하던 다정한 라스 카즈도 강제로 떠나야 했다. 이후 라스 카즈는 <세인트헬레나 회고록(1823)>을 남겨 나폴레옹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프랑스의 작가 샤토브리앙은 <저승 비망록(1841)>으로 반 나폴레옹의 선두에 섰다. 나폴레옹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외로운 영웅에게 하나, 둘 등을 돌렸다. 1820년 7월 나폴레옹의 병세는 완연해졌다. 유럽 전역을 안방 드나들 듯 하던 강인한 한 사나이는 환자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침대가 내게 아주 달콤한 공간이 되었소. 이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요.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지. 내가 얼마나 쇠락했는지 …,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면 힘겹게 노력해야만 한다오 … 내 근력과 사지가 나를 버렸고 … 나는 식물처럼 되어 버렸소. 이제 사는 것이 아니오.” 그는 아들인 나폴레옹 2세에게 역사를 깊게 성찰하고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자신처럼 살지 말고 평화롭게 유럽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1821년 5월 5일 새벽 5시 나폴레옹은 전설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후, 이 영웅의 죽음에는 독살설 등 여러 가지 추측들이 어지럽게 떠돌아 다녔다.

 

임시정부위원회는 벨기에에 도피해 있던 루이 18세를 받아들여 입헌군주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은 이후 6년 동안 영국인 간수 허드슨 로우의 경멸적인 학대와 감시 아래에서 지내게 되었다.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 점차 병약해졌던 나폴레옹은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사망 원인으로 비소에 의한 독살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1840년 루이 필리프 1세에 의해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1861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현재 전쟁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나폴레옹은 종종 키가 작고 왜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척도 단위인 푸스(pouce)와 영국의 단위인 인치(inch)가 서로 달라서 생긴 오해이다. 현재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키는 미터법으로 환산하여 168cm 정도로 당대인들의 평균 신장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해는 프랑스에서는 1인치에 해당하는 1푸스가 영국식 1인치보다 긴 데서 유래하며 당대인들의 시각에서도 키가 큰 근위대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이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던 탓도 있었다고 한다.

 

소설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나폴레옹은 군인으로서 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단순히 군인의 몸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라면, 아프리카 우간다의 무자비한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는 보다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법전, 교육, 종교, 국가를 움직이는 모든 장치를 재정비하고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매진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유럽 어디에 있던 연락이 가능한 커뮤니케이션과 우편제도의 간소화까지도 포함된다.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이나 에세이가 60만 종이 넘는다는 건 나폴레옹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나폴레옹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유배지에서 말했다. 화무십일홍, 회자정리라는 한자성어는 영웅 나폴레옹을 빗겨가지 않았다. 모든 권력과 인생에 가을과 겨울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는 예수의 진언처럼 그는 결국 유배지였던 엘바 섬을 탈출해서 1815년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프러시아의 블루허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과 전투인 워털루 전투의 패배와 무리한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장엄했던 나폴레옹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조세핀과의 사랑과 이별, 마리 루이즈 공주와의 재혼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조세핀과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황제가 되어 조세핀을 버리고,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도 했지만, 그의 부인이자 연인이었던 조세핀과 함께 한 말메종 성에서의 생활은 인간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이었다. 조세핀은 아름다운 육체와 열정을 지닌 여인으로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애증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그녀가 너무 야한 옷을 입는다고 그 옷을 찢어버리는 행동도 했다. 그때 조세핀은 옷장에 걸려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야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과 질투의 감정에 충실했던 나폴레옹의 이러한 면은 연애와 사랑에 헤매고 상처받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었다. 이제 시절이 좋아져서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인물은 될 수 없어도, 나폴레옹과 조세핀과 같은 사랑과 열정은 오늘날 연예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연애와 사랑은 나폴레옹이거나 귀족 일부의 특권이었다. 난잡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특권을 누구보다도 잘 누렸던 황후 조세핀도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된 뒤 버림받은 여인의 몸으로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장소인 말메종 성에서 쓸쓸히 죽었다. 1815년 6월 배신자 푸셰(푸셰 역시 자신이 추대한 루이 18세로부터 국외 추방 명령을 받는다.) 주도로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버렸다. 하지만 민중들의 지지와 권력을 되찾자는 측근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나폴레옹은 말메종으로 향했다. 워털루 전투 이후 마지막 망명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곳을 방문해서 “나의 불쌍한 조세핀! 그렇게 사랑하던 장미를 꺾으며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라고 탄식했다. 나폴레옹은 “내 안에는 다른 두 인간이 있다. 머리를 가진 인간과 가슴을 가진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의 가슴을 가장 강력하게 차지하고 휘저어 놓은 여인은 조세핀이었다.

 

나의 영광은 마흔 번의 전쟁 승리가 아니라 내가 만든 법전이다

가장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화려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머물면서 자신의 영광을 회고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읽는다. 그는 우선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다. 모두 다시 합치고 모두 화해시키고 모든 증오를 잊고 모두를 하나로 모으고 여러 이질적인 요인들을 통합하여 새로이 하나의 프랑스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혁명의 원칙과 성문법과 관습법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문헌으로 작성했다. 모두 102번의 법률 회의에서 전쟁을 하느라고 바쁘신 몸인 나폴레옹은 57번 이상을 참석했다. 그가 프랑스 민법전(속칭 나폴레옹 법전)에 들인 공력을 잘 보여주는 숫자이다. 역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회고한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민법전>은 나의 행정재판 절차를 글로 옮긴 것이며 장관들과의 서신을 수집한 것이다. 행정가로서, 또한 광대한 ‘프랑스 가족’을 재조직한 자로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 ”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보드로노브는 나폴레옹의 법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법전은 출생, 결혼, 이혼, 분배, 증여, 상속, 사망과 같은 개인과 가족에 관한 모든 사항을 다루고 있다. 법 앞에 평등하고, 양심의 자유와 국가의 비종교화를 이루었다는 면에서 이 법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또한 소유권에 대단히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가족 내 위계질서를 세워 남편의 권위를 아내의 상위에, 아버지를 자식의 상위에 둔 점에서는 ‘나폴레옹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민사법은 그 동안 약간 개정되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전이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일리리아 같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법률제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1806년에는 민사소송법을, 1807년에는 상법을, 1810년에는 형법을, 그리고 1814년에는 지방법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발전에 금강석과 같은 초석을 놓은 절대 권력자였다.

 

* 보충자료

청야작전 : 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방어측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초토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병법 중 작전 편에는 식량 현지 조달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食敵一鍾, 當吾二十鍾;𦮼秆一石, 當吾二十石(식적일종,당오이십종;기간일석,당오이십석)은 적에게서 빼앗은 식량이 아군 식량의 20배의 값어치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손자의 말에서 알 수 있 듯, 적으로부터 식량을 빼앗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청야 전술로 적의 자급자족을 막는 것은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줌과 동시에 치명적인 식량 문제를 발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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