御史 朴文秀의 급제시 落照(낙조)

박문수(朴文秀).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경종 3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뽑혔고 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종사관으로 도순무사 오명항을 도와 이를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암행어사로서 공이 많았고,

지방관으로 있으면서도 선치를 베풀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균역법 제정에 진력하였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고령박씨(高靈朴氏)의 시조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강직한 성품까지 닮은 어사공파로 직계후손이다.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은 박문수의 시이다.
33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했던 그는 그날도 과거에 응시하고자
길을 떠났다.
서울에 들어가기 전, 시흥에서 해가 넘어가려고 하자 그는 주막을 정했다.
그런데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나 박문수는 내일에 대비해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서너 칸이나 실히 되는 방에 너댓 명의 길손이 코를 골고 있었다.
모두가 자기와 똑 같은 차림새인데, 다른 것이 있다면 자기가 그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사실뿐이다.
여러 사람이 묵는 주막이라서 밤새 희미한 등잔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에 급제를 해야 할 텐데.......」
이렇게 생각하자,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다.
과거를 보기에는 이미 나이가 많은 33세요, 만일에 낙방을 한다면 고향의
어머니를 어떻게 뵈올까. 그 때 문득 지난 저녁 무렵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일찌감치 이 주막을 정했었다.
내일 새벽에 길을 나서면 넉넉히 과거장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짐을 풀고 몸을 씻으려고 계곡으로 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몸을 정결히 씻고 시냇가에서 잠시 쉬었다.
마침 멀리 서산에 해가 지고 있었다.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때였다. 체격이 당당한 백발노인이 황소를 끌고 다가왔다.
그 소의 등에는 한 소년이 타고 있었는데 손에는 퉁소가 쥐어져 있었다.
좀 낯선 행색이어서 박문수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그의 등뒤를 지나갈 때, 노인은 들어보라는 듯이 소리쳤다.
「이 놈의 황소야 ! 피리를 불어야 하겠니 ! 」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새롭다.
특히나 박문수의 별호가 황소였다.
그러기에 더욱 그 소리가 귀에 남았다.  
그는 성품이 온순하나, 한번 화가 나면 황소처럼 무서웠고 어떤 일이든
한 번 하려고 들면, 소처럼 끈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슴푸레 잠이 왔다.
그런데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한 정신 가운데, 아까의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계곡 냇가에 앉아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이, 어디로 가는 길이오?」
「서울로 갑니다.」
박문수는 앉음새를 고치며 공손히 대답했다.
「서울에는 왜?」
「내일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과거라니 ? 이미 끝나지 않았소 ?」
「뭐요 ?」
이번에는 박문수가 더욱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그 장원한 글귀까지 듣고 왔는데」
「아니, 어르신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되묻자 노인은,
「그래 맞았어, 글의 제목이 "낙조"였었지. 해지는 저녘이란 뜻의 낙조 말일세.」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자 노인은 태연히 장원에 뽑혔다는 시구를 외는 것이 아닌가.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추위에 떠는 갈가마귀가 흰 구름 사이를 날아간다.
나루터를 찾는 길손은 응당 말에 채찍질을 빨리 할 것이요.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할 리가 없다.]
이것이 첫 수 4 구절이고 다음 수는 ,


[방목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고,
남편을 기다려 높은 대 위에 섰는 아내의 쪽 그림자가 낮다.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여기까지 외고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생각을 자아내는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글귀가 뭐더라?」
노인은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하다가 사라졌다.
박문수는 번쩍 눈을 떴다.
노인이 보이지 않을 뿐, 주위의 모습에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역시 등잔불은 깜박이고 있었고, 자기처럼 과거를 보러 가는
나그네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노인은 분명히 어제 저녘 때 그 노인이었는데.......)
아니,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꿈속에서 외던 그 시구는 너무나 머리에
뚜렷했다.
(낙조라구? 참 이상한 일이다.)
하고는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여보시오, 그만 일어나시오.」
박문수가 눈을 떠보니 세수를 하고 들어온, 곁의 나그네가 자기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날은 이미 밝았고, 밖에서 아침 준비를 하느라고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곤하게 잘도 주무시는 군요.」
박문수는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어젯밤의 꿈이 너무나 뚜렷하게 떠올랐다.
다시 한 번 시구를 되풀이하여 보았다.
기가 막히게 뛰어난 구절이었다.
역시 노인이 잊었다는 마지막 글귀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는 새벽에 자기를 깨워준 길손과 나란히 남대문을 지나 과거장으로
들어섰다.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선비들이 모두 자기의 실력을 겨루고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무리 뱃심이 두둑한 박문수였지만, 몹시 가슴이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글의 제목이 나붙었다.
박문수는 너무나 놀라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글제는 틀림없는 落照(낙조 : 해지는 저녘)였다.
극도로 흥분한 박문수는 곧 익숙한 솜씨로 붓을 휘둘렀다.
외고 있던 일곱 구절을 순식간에 써내려 간 다음,
잠시 손을 쉬고 붓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다시 어제 계곡에서 자기의 등뒤를 지나가던 노인의 생각이 났다.
「이놈의 황소야! 피리를 불어야 하겠니?」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아직 먹도 다 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다.
박문수는 다시 한번 글귀를 되새겨 보았다.
자기가 보아도 놀라운 솜씨였다.

과거장에는 큰 파문이 일었다.
가장 일찍 제출된 시가 장원을 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를 일컬어 신선이 가르쳐 준 시라고 하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문수가 계곡 시냇가에서 바라보던 낙조가 그의 머릿속에서
시로 엮어져서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생각된다.
꿈에 시를 쓴 예는 많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시는 박문수의 장원시로 널리 전하여지고 있다.



낙조(落照)


어사박문수의 과거급제 장원시입니다

늦가을의 저녁노을 풍경을 잘 표현한 글입니다.

낙조토홍괘애산(落照吐紅掛碍山)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차거운 하늘 갈가마귀 는 자로재는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문진행객편응급(問津行客鞭應急)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심사귀승장불한(尋寺歸僧杖不閑)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방목원중우대영(放牧園中牛帶影)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망부대상첩저환(望夫臺上妾低 (髮+環=쪽지을 환)
남편을 기다려 높은 「루대」위에 섰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다.

창연고목계남로(蒼然古木溪南路)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단발초동농적환(短髮草童弄笛還)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조선시대의 숭례문(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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