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 무장독립운동의 블랙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독립군의 이야기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까지다. 그리고 그 대첩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의 이름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둔 독립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전쟁들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 김좌진 장군은 그 뒤에 무슨 일을 했을까?

그 뒷이야기의 중심에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는 엄청난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예전의 역사 교과서에는 봉오동 ‧ 청산리 대첩 이후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이 뜬금없이 등장한다. 그냥 1921년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만 쓰여 있었을 뿐이지 ‘자유시’가 어디이고 ‘참변’의 전모가 무엇인지, 또 그 사건이 우리 독립군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 먼 러시아 땅 ‘자유시’에서 일어난 참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독립군이 사실상 궤멸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제목만 알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자유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횡단열차로 25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현재의 러시아 지명은 스바보드니(Svobodny)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흔히 ‘자유시’라고 불린다.


러시아 남동부 아무르 강의 지류인 제야 강 오른쪽 연안에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로변에 있으며 1912년에 건설되었다. 오늘날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해 철도작업장이 있으며 아무르 강 기선함대의 작전 및 정비 기지의 역할도 한다. 조선업과 금속세공업 등도 발달했다. 스보보드니는 바이칼-아무르 기준(BAM) 철도의 한 철도역인 페브랄스크와 간선도로로 연결된다.

                            

 스보보드니

자유시참변(일명 :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난 날짜는 1921년 6월 28일이다.

바로 전 해인 1920년은 봉오동 ‧ 청산리 대첩이 있었던 해이다. 봉오동 전투에서의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을 하기 위해 간도를 침략했다. 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그 수습을 빌미로 간도에 군대를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다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보복 학살과 독립군 토벌작전인 경신대학살을 펼쳤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혁명 이후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적군(赤軍)과 혁명을 반대하여 짜르 황제편의 백군(白軍)과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처음 일본은 백군 편을 들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병력으로 러시아 내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한 것이다.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잠시 몸을 사려야 했던 우리 독립군은, 분산되어 있던 여러 조직을 모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김좌진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10개 부대를 모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약 3천5백 여 명  정도의 병력이 중국 헤이룽장 성 미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무기를 포함한 군수 물자가 변변찮을 수밖에 없었다. 남의 땅에서 군대 조직을 꾸려가려니 오죽했을까? 당연히 다른 나라의 군사 지원에 의지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1919년 만주 북간도에서 조직. 대한독립군단의 주도 조직. 대종교 계열.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조직. 사령관 홍범도(洪範圖).
  •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 :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 기독교 감리교 계열. 단장 김규면(金圭冕).
  •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 1919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조직. 개신교 계열. 구춘선(具春先).
  • 혼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 1919년 만주 혼춘에서 조직. 회장 이명순(李明淳).
  •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의동(鳳義洞)에서 조직. 사령관 최진동(崔振東).
  • 의군부(義軍府) : 1919년 만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조직. 총재 이범윤(李範允).
  • 혈성단(血誠團) : 191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 단장 김국초(金國礎).
  • 야단(野團) : 1919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조직. 동학의 한 교파인 청림교(靑林敎) 계열. 단장은 신포(申砲)로 일명 아소래(我笑來)로 불림.
  •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 1919년 만주 안도현(安圖縣)내도산(內島山)에서 조직. 총재 이규(李圭).


이 외에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은 대한독립군단 결성을 위해 12월 밀산(密山)에 대한신민회의 대표로 김성배(金聖培)를 파견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무장부대를 살펴보면, 우선은 간도지역의 독립군부대가 주축인 대한독립군단은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다. 다음은 러시아 지역의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들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일리아의 이항군, 오항묵의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에 집결한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과 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과 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제1여단에는 여단장 김규식(金奎植)과 참모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에는 여단장 안무(安武)와 참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에는 기병대장 강필립과 중대장 김창환(金昌煥), 오광선(吳光鮮), 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 여단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 여 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과 피복, 군량 등 여러가지 군수품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군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세력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보니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부대가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박일리아의 이항군대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까지 총 3개가 있었다. 상하이파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그 무렵 소련의 적군(​赤軍)과 군주제, 자본주의, 반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군이 대립하고 있었디. 우리 독립군은 일제에 대항하다보니 소련 적군 편에 섰다. 적(敵)의 적(敵)은 우리 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적군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돕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소련 적군(공산군) 정부의 도움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톡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일본군을 피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도 근거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는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만군대는 사령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 김덕보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반군대는 사령관 최니콜라이가 이끌고 있었다. 소련 적군을 아군으로 믿고 있었던 대한독립군단에게 자유시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했다. 대한독립군단은 만주-러시아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러시아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김좌진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독립군은 1921년 6월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사이 일본은 극비리에 赤軍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적군은 일본으로부터 오오츠크 해 어업권을 받고 독립군을 배신했다고도 한다. 소련의 적군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에 먼저 집결한 우리 대한독립군에게 공산당을 위해 싸워달라고 요구했다. 소련 국내의 이념차이로 인한 전쟁에 우리 민족이 피를 흘릴 일이 있겠는가? 대한독립군은 당연히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돌연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다. 적군은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대한독립군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렸다. 그리고 저항하는 독립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보를 미리 알게 된 김좌진은 이만에서 군사를 돌려 간도지방의 미산[密山]으로 돌아와버렸다. 김좌진은 당초부터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반도와 너무 멀어지면 일제에 맞서 독립군으로서 활동하기 어려워질 것도 우려했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 까지도 칼란다리쉬빌리(Nestor Aleksandrovich Kalandarishvili)에게 투항했다. 칼란다리쉬빌리(Nestor Aleksandrovich Kalandarishvili)는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에는 상하이파 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대한독립군 부대도 함께 있었다.


6월 28 오후 4시 칼란다리쉬빌리(Nestor Aleksandrovich Kalandarishvili)가 이끄는 소련의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와 대한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장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은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기관총, 장갑차, 대포 등을 이용해 몰아부쳤다. 독립군 뒤쪽에는 강이 있어 도망가지 못해 피해를 더욱 키웠다. 독립군은 270 여 명이 사살되고 31명이 익사했다. 250 여 명은 행방불명이 됐고 970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강제편입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족해방을 부르짖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머나먼 타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이용되었다. 또한 칼란다리쉬빌리(Nestor Aleksandrovich Kalandarishvili)의 명령을 이행하여 자유시로 미리 들어왔던 홍범도, 지청천도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학살이 시작된 자유시의 작은 역에 가면 아직도 그날의 참상을 지켜본 급수탑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급수탑 근처에 집결해 있던 우리 독립군에게 총격이 시작되었다. 아비규환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일부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일부는 총격을 피해 무작정 달렸다. 지리도 알 수 없는 낯선 마을이었다. 달리다보니 강이 앞을 가로막았다. 중국의 헤이룽[黑龍] 강과 이어지는 제야(Zeya) 강이었다. 총탄을 피하려면 강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총에 맞아 혹은 강물에 빠져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자유시에 집결한 병력이 1천여 명,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 등으로 끌려가 공산 치하 소련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적군의 포로가 된 대한독립군 중에는 극장 경비원으로 살다가 카자흐스탄 크슬오르다에서 숨진 봉오동 전투의 사령관 홍범도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우리 독립군은 그렇게 허망하게 궤멸되고 말았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참변이었다. 이로써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독립군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되돌아 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홍범도와 같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이 지청천의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삼아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이즈음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월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주의 독립군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인 이르쿠츠크파 및 상해파에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독립운동이 내외부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예다.


자유시참변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일본과 소련 공산당과의 결탁, 독립군 세력이던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사이의 정치적 투쟁 등, 그 복잡한 배경들 자체가 이 사건을 희석해버릴 정도이다. 심지어 현재 자유시에 서 있는 ‘자유시 사건 독립군 순절지’ 비석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도록”이라고도 쓰여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데 ‘우리끼리’라니, 마치 북한의 남침이 분명한데 6.25는 쌍방 과실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을 궤멸시킨 이 사건을 정리하면 정말 한 마디로 단순해진다.

“우리 독립군이 공산당에게 배신당하고 학살당한 사건이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김좌진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해 다시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 간부를 육성하는 데도 힘썼다. 그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독립군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었고 김좌진은 주석이 되었다. 그런데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길고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이 글의 본론을 쓸 배경이 마련되었다. 빨갱이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못해 자유시로 가지 않아 휘하부대의 궤멸을 피했던 김좌진은 이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의 확실한 적이 되었다.

 

자유시참변과 민족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거짓말과 배신을 밥 먹듯하는 공산당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의 배신과 일본의 음모

하지만 혁명이 어느 정도 진척돼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느끼게 되자 소비에트측은 한인들의 수족을 묶을 궁리를 하게 됐다. 이를 눈치챈 일본은 러시아와 독립군을 이간시키기 시작했다. 1920년 일본은 북경에서 러시아와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간 어업조약을 맺으면서 그 대가로 러시아땅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이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 소비에트군은 마침내 제야강 자유시(현 스보보드니) 주둔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령을 내렸다. 한국독립군으로서는 볼세비키 적군과의 협력관계나 그들의 혁명투쟁을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보거나 무장해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마땅히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 일명 흑하사변’이라 부르는 소비에트군의 한인독립군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자유시 참변은 일제 치하 항일무장독립투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 최대의 참사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항일독립투쟁 사실상 종식

자유시 참변에서 소비에트군의 공격으로 한인독립군은 960여명이 전사하고 1800여명이 실종되고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전사자 숫자는 전하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엄청난 피해였다. 이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됐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총재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고 만주에 그냥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 장근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김좌진은 러시아령 이만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 회군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한인공산주의 독립군들이 소련공산당을 끌어들여 동포인 독립군을 공격한 이 비참한 사건을 목격한 이후 김좌진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김좌진 장군, 한인 공산주의자 손에 암살

당시 김좌진 장군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는 러시아 볼세비키의 괴뢰이며, 볼세비키는 대한독립군을 내란음모에 이용하고 있을 뿐이며, 목적을 달성하면 가차 없이 숙청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런 성토가 원인이 되어 교육사업 등으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며 동분서주하던 김좌진 장군은 고려공산당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홍범도 장군도 역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 오르다로 강제 연행된 뒤 시골 극장의 수위로 쓸쓸한 여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무렵 대통령 이승만이 이끌었던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등 모든 사회주의자와의 관계를 끊었고, 이후 어떤 공산주의자들과의 연합도 시도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선열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통일된 항일 무력을 키우는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소련 공산당과 여기에 사주를 받은 한인공산당의 음모 때문이었다. 독립운동 시기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빨갱이 공산당 세력이다. 일치단결해서 싸워도 독립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먼 시베리아 땅에 가서도 동포인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 공산당이었다.


문재인 정권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봉오동 전투의 독립군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봉오동 독립군을 학살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었다. 1921년 국제공산주의세력이 독립군을 궤멸시켜 항일독립투쟁을 사실상 종식시킨 안타까운 사건이 바로 자유시참변이다.

​1920년 11월 23일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목숨울 걸고 낙동강 방어선을 굳게 지켜낸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1943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간도특설대 중위로 근무한 전력을 빌미삼아 "친일파"로 공격하는 야만적인 선동을 자행하고 있다. 20대 청년 백선엽이 만주에서 복무하던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독립투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백선엽 장군의 말씀대로 그가 맞서 싸운 상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팔로군에 조선인 부대도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은 중국군이었다. 망한 나라의 젊은이들이 하필 중국군과 일본군으로 나뉘어 싸울 수도 있게 된 것을 두고 독립군에 총질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웃기는 개소리다. 빨갱이들의 적화통일을 좌절시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잔젱영융의 戰功에 대한 적대감의 엉뚱한 표현일 뿐이다.


 

자유시참변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                                        

스보보드니 소베스킷 마을에 자유시참변 대한독립군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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