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 一代記

金佐鎭 將軍


1889년(고종 26) 11월 24일 ~ 1930년 01월 24일.  향년 42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1.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김좌진 장군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의 감시와 억압 때문에 제대로 된 항일 투쟁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특히 무기와 군사 훈련이 필요한 무장 투쟁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뜻이 있는 독립투사들은 좀 더 여건이 좋은 만주나 연해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자체적으로 부대를 만들어 훈련을 하다가 기회가 되면 국내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1919년 국내의 3·1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릴 때까지, 만주 일대에는 여러 무장 독립투쟁단체들이 연립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 속해 있던 북로군정서도 그중 하나였다. 북로군정서는 1919년에 대종교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무장 독립투쟁단체다. 서일(徐一)과 현천묵(玄天默)이 각각 총재와 부총재로 참여했고,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에서 사령관을 맡았다.


김좌진은 1889년(고종 26)에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며,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의 11대손이다. 김좌진의 집안은 재산이 많아서 어린 시절을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그의 나이 13세 때 형 김경진(金景鎭)이 서울에 사는 친척 김덕규(金德圭)의 양자로 갔다. 그때부터 김좌진은 편모(偏母)를 모시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그는 글공부보다는 말타기, 활쏘기 등의 무예에 더 관심이 많았다. 몸집이 크고 힘도 장사였으며, 동네에서 친구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대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좌진은 1905년에 서울로 올라와 무관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애국 계몽사상에 눈을 떴다. 1907년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홍성으로 내려온 김좌진은 가산을 털어 호명학교를 설립했다.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다.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권수호의 의지를 불태웠다.


1910년에 한일병합으로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리고 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군자금을 조달하려고 동분서주했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서울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대종교에 입문해 서일과 함께 대한정의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919년에 대한정의단이 군정부로 개편되면서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군대를 지휘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다.


2. 독립전쟁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청산리대첩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 독립군 연합에 합류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1920년 9월에 300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김좌진은 이들을 핵심 전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과 훈련병까지 포함해 총 1,100여 명에 이르는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로 향했다. 청산리는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지역을 우리 식으로 일컫는 말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이 새로운 군사 기지로 삼기 위해 그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편 우리말로 어랑촌이라고 부르는 인근의 이도구(二道溝)에는 홍범도와 안무의 부대가 주둔 중이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에게 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자니 중국의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토벌대를 이끌고 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20년 2월 '훈춘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琿春)의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게 했다. 이 일로 일본인 피해가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군경을 만주 지역에 투입했다. 그리고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고 건물과 곡물 등을 불태웠다.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 독립군의 근거지를 말살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어쨌든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에 일본군이 밀고 들어와 있는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였고, 결국 이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가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독립군들이 이동을 시작해 청산리 일대에 주둔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일본군은 곧바로 대규모 토벌대를 출동시켰다. 일본의 토벌대는 19사단을 중심으로 3개의 대대와 2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는데, 실제 청산리 전투에 투입된 2개 중대의 군사만 2만 명이 넘었다. 여기에 항공대, 포병대, 공병대까지 포함된 그야말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었다. 김좌진이 이끄는 부대는 일본군의 대규모 침략 소식을 접하고, 청산리 골짜기를 지나 노령(露領) 지역 쪽으로 더 들어가기로 했다.


10월 20일, 김좌진 부대는 청산리 골짜기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백운평(白雲坪)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고 계속 이동을 했다. 그런데 김좌진 부대가 숙영지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야마다(山田) 부대가 그곳에 당도했다. 김좌진은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부대 본진은 계속 이동을 하는 한편, 부대 일부를 백운평의 험준한 고지대에 매복시켰다. 이때 매복한 후위 부대는 사관연성소 교관 출신의 이범석(李範奭)이 지휘를 맡았다. 마침내 일본군의 추격대가 매복 지역에 들어서자 김좌진 부대는 이들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상황에 대해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적의 전위보병중대가 우리의 후병잠복(後兵潛伏)이 약 10미터 되는 근거리에 이르도록 안심했다가 우리의 후병은 여기에 이르기까지 자약불동(自若不動)하다가 충분한 호기(好機)를 맞이해 맹렬한 급 사격을 행한 지 약 20여 분 사이에 한 명도 남김없이 적의 전위중대를 전멸하니 그 수는 약 200여 명이더라. 그 후방에 쫓아오던 적의 본대는 창황실조(倉惶失措)해 미처 원전(援戰)을 전개하지 못하고 혼란 상태에 빠져 황겁(惶㤼)한 행동으로 산포기관총을 난사하나 조준과 방향목표가 맞지 아니한 중 천연적지물이 유리해 우리 군의 해(害)는 소무(少無)하고 반대로 우리 군의 지기(志氣)는 왕성케 되다. -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 자


백운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김좌진 부대는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등에서 단독으로 혹은 홍범도 등의 다른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결과는 모두 승리였다. 결국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26일에 병력을 철수했다. 이것이 바로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이 일본을 상대로 벌인 독립전쟁 중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였다. 김좌진 부대가 청산리 전투를 단독으로 승리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과의 첫 접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그 이후의 전투들을 유리한 고지에서 치를 수 있도록 작전을 지휘했다. 그런 점에서 후대 사람들은 김좌진을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라 칭하는 것이다.


3. 반일단체 통합에 앞장서다

청산리대첩 후 북진을 강행하며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 자유시로 넘어갈 때, 김좌진도 우수리강을 건넜다.


그러나 1921년 6월에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만주로 돌아왔다. 당시 레닌 적군들이 우리 독립군을 공격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지만, 김좌진은 미리 탈출한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앞장섰던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은 자유시 참변으로 반일 무장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좌진 역시 책임감을 느끼고 와해된 독립군 잔존 세력을 규합해 새로운 반일 단체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김좌진은 1925년 3월에 북만주 지역에서 새로운 항일민족단체인 신민부 창건에 앞장섰다. 신민부는 김좌진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는데, 무장 투쟁을 우선으로 하는 단체로 친일 인사 암살 등의 활동을 펼쳤다. 신민부는 참의부, 정의부와 함께 1920년대 말까지 북만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성장했다. 이들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단체 내부에 군사부와 민정부를 함께 구성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신민부 군사부에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직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민부 내부에서는 군사부와 민정부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두 조직은 단체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반목했고, 결국 그것이 신민부 해체의 이유가 되었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김좌진은 1928년에 신민부가 해체되자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에 참여했다. 유일독립당 운동은 신민부, 참의부, 정의부를 하나로 통합해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러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좌익과 우익 독립단체들을 하나의 민족주의 운동단체로 통합하자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결국 유일독립당 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김좌진은 이어서 1929년에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신민부 출신의 정신(鄭信)과 함께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군소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는 한편 무정부주의단체인 흑색동맹파와 연합해서 만든 단체가 한족총연합회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셨다. 


4. 안타까운 죽음과 그에 얽힌 견해들            

지금까지 김좌진의 암살과 관련해서 알려진 내용은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의 박상실(朴尙實)이라는 사람이 김좌진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상실이 무슨 이유로 김좌진을 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일제에 매수당한 김봉환(金奉煥)이 박상실을 포섭해 암살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먼저 김봉환이 일제에 매수된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공도진 혹은 이복림에게 김좌진의 처단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도진, 이복림, 박상실은 모두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조선공산당은 김좌진을 암살해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김좌진이 한족총연합회를 통해 무정부주의자들과 연합한 것을 조선공산당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처럼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여러 이견들이 존재하는 것은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좌우익 양 진영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김좌진 한 명의 문제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평가보다는 이념적 잣대에 따라 서로 상반된 주장들이 양립해 왔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김좌진을 비롯해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여러 무장들의 행적이 지나치게 과장 혹은 반대로 폄훼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발점인 해외 독립운동사에 대해 보다 중립적이고 정확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쨌든 김좌진이 무장투쟁이라는 길을 택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점은 누구나가 인정할 부분이다. 그래서 그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그는 자신의 애국심을 담아 다음과 같은 우국(憂國) 시를 남기기도 했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 독립기념관 김좌진 어록비 〈단장지통〉

                

김좌진이  탁월한 항일독립투사였으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무장(武將)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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