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王祖 1, 2차 王子의 亂

太祖 李成桂(1335 ~ 1408, 재위 1392 ~ 1398)는 첫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1337 ~ 1391)와의 사이에 여섯 형제를 두었다. 방우(芳雨)와 방과(芳果), 방의(芳毅), 방간(芳幹), 방원(芳遠), 방연(芳衍)의 순이었다. 또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1356 ~ 1396)에게서는 방번(芳蕃)과 방석(芳碩) 두 아들을 얻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가 1392년 8월 한씨 소생 왕자들 대신 강씨에게서 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부터 그 싹이 텄다. 한씨는 1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당시에는 강씨가 태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강씨는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을 비롯해 신진 사대부 출신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세자로 책봉될 때 방석은 나이가 열한 살에 불과했고, 때문에 정도전이 후견인 역할을 하며 방석을 보호했다.

당초 방원은 아버지 태조에게 맏형인 방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고, 공신 배극렴(裵克廉)과 조준은 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가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배극렴은 “시국이 평탄할 때는 적자(嫡子)가, 어지러울 때는 공(功)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라며 개국 과정에서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공을 세운 방원을 추천했다. 하지만 태조는 이 같은 의견들을 모두 뿌리치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선택했다.

이처럼 세자 책봉 문제에서 정도전과 방원의 길은 엇갈린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사병 문제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놓고도 팽팽하게 대립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재상이 최고 실권자가 되는, 이른바 신권 중심의 왕정을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여겼다. 이를 위해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 정부가 병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왕족들을 무력화하겠다는 뜻으로, 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안겨 줬다.

정도전은 때마침 불거진 요동 정벌론을 사병 혁파 및 병권 집중의 명분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1396년 조선에서 보낸 표전(表箋, 공식 외교 문서)과 국서(國書)에 자국을 모욕하는 무례한 구절이 있다며, 그 작성자인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태조와 정도전이 명나라와 정면 대결하기로 하면서 요동 정벌론이 대두됐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전시(戰時)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진법 훈련을 실시하겠다며 왕족이 거느린 사병까지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참에 사병을 국가의 군 지휘 체계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였다. 태조도 진법 훈련을 허락했지만, 정도전의 의도를 알아차린 방원과 방간, 방의 등은 자신의 사병을 훈련에 보내지 않았다. 이에 왕자들은 왕명을 어긴 셈이 되었고, 이들의 부하장수들이 태형(笞刑)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세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사병 문제까지 불거지자 방원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사병까지 내놓고 정도전의 실권 장악을 허용하든지 아니면 거사를 도모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사병을 내놓고 백기를 들더라도 정도전 일파에게 언제 제거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즈음에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沈孝生) 등이 병중인 태조가 위독하다고 속여 한씨 소생 왕자들을 한꺼번에 궁중으로 불러 모은 뒤 이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1396년 세자의 보호막이자 생모인 신덕왕후마저 41세를 일기로 승하하여 장례를 마치게 되자 거사를 결심한 방원은 1398년 8월 25일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이숙번(李叔蕃), 조준, 하륜, 이거이(李居易), 박포(朴苞) 등과 함께 정도전 일파의 음모를 미리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습격해 살해했다. 또 세자 방석을 폐위시켜 귀양 보내는 길에 죽였다. 방석의 형인 방번도 이때 죽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한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해서 무인정사라고도 부른다.

 

태조 7년(1398) 8월, 왕이 병환으로 병석에 있을 때다. 도성 안의 공기는 몹시 술렁거려, 이곳저곳에 두서너 사람씩 모여 서로들 숙덕숙덕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어젯밤 대궐 안에서는 큰 난리가 일어났다네.”

“대궐 안에서? 난리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말 말게, 이 사람아. 세자가 피살되고 공신들이 모두 맞아 죽었다네!”

하고 곁들었다.

“이거 세상이 또 뒤집히려는 게로군!”

아까 반문하던 사나이가 이렇게 뇌까리자, 이번에는 맨 처음 서두를 꺼내 놓던 젊은이가,

“뒤집히긴, 이 사람. 한번 뒤집혔던 게 그리 쉽사리 또 뒤집혀? 그 방원이라는 자가 세자 자리가 탐나서 장난한 짓이지!”

하고 응수했다. 사실 이들의 말대로 난리는 났었다. 하룻밤 사이에 대궐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참변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태조의 다섯째 왕자인 방원은, 자기가 부왕의 등극을 위하여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또 그러한 공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인격으로 보나 중망으로 보나 세자의 자리는 마땅히 자기에게 돌아오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부왕 태조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를 사랑하던 나머지 부당하게도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려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정도전이 깊숙하게 관여하였던 것이었다. 여기에 격분한 이방원은 그의 심복 하륜(河崙) 등과 모의하여, 결국 골육상잔의 참극을 빚어냈던 것이다.

 

하륜은 태조 밑에서 관직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태종에게 중용되어,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꾀와 지모가 출중하고 완력이 대단했으며 남의 관상을 잘 볼 줄 알아서 누구든 한번 보면 능히 그 장래를 판단하였다. 일찍이 태종 방원이 장가를 들 때에, 마침 그 잔치에 참여하였다가 방원의 상을 보고는 반색하여, 방원의 장인되는 여성부원군 민제를 보고,

“당신의 사위야말로 장차 세상에 으뜸가는 인물이 되겠소이다.”

하고 그 뒤부터 민제를 통하여 방원과 가까이 하면서 힘껏 그를 도왔으므로 방원도 그를 가장 신임하게 되었다.

태조 7년(1398) 8월, 하륜이 충청감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는 날, 방원은 작별인사 겸 그를 남대문 밖 사저로 찾았다. 그때 하륜은 풍문으로 정도전·남은·유만수 등이 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고 있다는 내막을 얻어듣고 있었다. 당시에 태조가 병이 들었는데, 정도전이 태조의 요양을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의논하자는 핑계로 모든 왕자를 불러 이 기회에 난을 일으켜서 대궐 안에서 한씨 소생 왕자들을 처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하륜이 놀라서 방원에게 통고하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그가 찾아오긴 했으나 좌석에 이목이 많고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방원이 술 한 잔을 따라 하륜에게 권하였다.

“하감사! 이 술은 작별주니 마시고 부디 괄목할 치적을 거두고 보국안민에 힘써 주오.”

이에 하륜은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륜은 술잔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엎질러버렸다. 이것을 본 방원은 그의 공손하지 못함을 괘씸히 여기는 듯, 만면에 노기를 띠고 일어나 문을 차고 나가버렸다. 좌중에 냉랭한 공기가 감돌 때 하륜은 여러 빈객을 향하여,

“내가 갑자기 수전증이 일어 잔을 놓쳤더니 이제 왕자께서 진노하신 모양입니다. 내 잠깐 나가 사과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변명을 한 후, 밖으로 뛰어 나와 말도 타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방원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방원의 집 대문 앞에 이르러서야 방원과 만나게 되었다. 방원은 그의 거동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러자 하륜은 입을 가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시늉을 해보인다. 방원은 더욱 괴이하게 여겨 그를 침방으로 불러들여 놓고, 좌우를 모두 물러가게 했다. 하륜은 그제야 나직한 목소리로,

“위급한 일이 다가왔기에, 이목의 번잡함을 피하고자 일부러 술잔을 엎었나이다. 즉 그 술잔처럼 둘러 엎어질 환란이 다가오고 있소이다.”

하고는 방원의 귀에 입을 대고 정도전·남은·유만수 등이 여차여차 모의하고 있다는 이야기며 언제 거사하기로 작정되었다는 전후 사정을 고해 바쳤다.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는 이설이 구구하여, 혹은 하륜이 아니라 방원의 심복 이무가 거짓 무고를 하였을 뿐, 당시 정도전 일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하륜의 고변을 듣고 난 방원은 놀라움보다 분노가 앞서, 치를 떨고 있다가 한참 후에 조처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은,

“안산군수 이숙번은 지략이 출중하오니, 그로 하여금 별초군 3백 명을 인솔하고 올라오게 하여 정도전의 무리를 소탕함이 옳을까 합니다. 그리고 두 분 대군(세자 방석과 형 방번)의 조처는 처분대로 하십시오.”

하고 계책을 말하고 나서 몸을 일으켜 작별을 한 다음 남문 밖 사저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러 빈객들과 술을 나누다가 작별하고 나서 자기는 임지로 떠났다. 한편 방원은 앞서 하륜이 세운 계책대로 급히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서 별초군을 거느리고, 그날 밤 어둠을 타서 정도전·남은·유만수 등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난의 책임을 도리어 세자 방석과 정도전 일파에게 돌려 태조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잡아, 멀리 귀양보내는 척하고 중도에서 살해하고, 그 형 방번도 같은 방법으로 죽여버렸다.

 

이방원의 거사가 성공한 데는 후일 왕후가 되는 부인의 준비와 노력이 컸다. 곧 원경왕후의 동생 대장군 민무구와 장군 민무질과 함께 모의하여 병기와 말을 몰래 준비하여 태종을 응원할 계책을 세우고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후일 태종이 《고려사》에 나오는 왕건(王建)의 부인 유씨(柳氏)의 일을 읽어 보고 세종에게 이르기를,

“정사(定社) 때에 너의 어머니의 도움이 매우 컸고, 그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병기를 정비하여 기다린 것은 유씨가 고려 태조에게 갑옷을 입힌 것보다 그 공이 더욱 크다.”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거사소식을 들은 태조는 천만 뜻밖의 일에 너무도 놀라워하며 어안이 벙벙해했다. 정도전 등의 죽음은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방석·방번의 피살에 대하여는 크게 진노하고 또 상심하였다. 이를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강비가 간 뒤,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일념에 병까지 얻었는데, 그래도 그의 소생 형제가 있기에 마음을 붙여 오던 태조이다. 사실 강비에 대한 태조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강비 승하 후에도 자기 주위에 두기 위해서 도성 안에는 능을 쓰지 않는 원칙을 어기고, 康妃의 능을 서대문 안 貞洞에 조성하니 그것이 바로 貞陵이었다. 이러한 터에 이제 그 상념이 오죽하랴…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방원을 불러들여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고 방원을 불러,

“너는 임금 자리만 생각할 뿐, 천리(天理)도 인륜도 모르는 놈이로구나! 네 아무리 임금 노릇을 하고 싶어도 내 이 자릴 내주진 않을 테다.” 하고 소리 높여 질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욕을 하고 꾸짖어도 쓰라린 심사는 풀리지 않았다. 당시 병중이던 태조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방원을 불러 “혈육을 무참히 죽이다니 천륜도 모르느냐.” 하며 진노했다. 1396년 강씨가 병으로 죽은 뒤 태조는 방번과 방석 두 형제를 극진히 아꼈다. 게다가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마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에 태조는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정치에서 물러난다.

 

방원이 정도전 일파와 방석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은 방원을 세자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방원은 스스로 이를 사양했다. 대신 둘째 형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돼 태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르니 그가 2대 정종(定宗, 재위 1398~1400)이다. 정종은 1399년 3월 한양의 터가 좋지 않다며 조정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고, 8월에는 권세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급 관리가 상급 관리를 방문하지 못하게 하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만들었다.가슴 속에 타오르는 노여움의 불길, 그리고 강비에 대한 미안하고도 그리운 정, 살해된 두 아들을 향한 무한한 연민,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인 것을! 인생이란 허무할 뿐인데… 이런 착잡한 분노와 애수의 상념으로 태조는 잠을 못 이루었다. 고민 속에 며칠을 지내면서 태조는 드디어 결심을 하였다.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전해주고, 자신은 한 많은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태조 7년(1341) 9월의 일로 이때 전위를 받은 이가 곧 제2대 정종이니, 정종은 즉위하자 바로 부왕을 높이어 상왕이라 존칭하였다. 정릉은 1408년 太祖가 승하하고 정종을 거쳐 태종이 즉위한 후 도성 밖으로 옮기라는 왕명으로 1409년에 지금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정릉 자리로 초라하게 옮기고 1410년 홍수로 청계천 흙다리 廣通橋가 무너져내리자 정릉 자리에 뒹굴던 석재를 광통교 石橋 건축공사에 박아넣어 버렸다. 父王이 총애하던 繼妃 康氏의 정릉 석재를 광통교에 써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한 것이다.

 

이즈음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 하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왔던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가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방원은 이를 알고 그를 죽주(竹州, 영동)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 다시 불러들였다. 박포는 방원에 대한 앙심이 깊어져 방원의 형인 방간을 찾아가 “방원의 눈초리를 살펴보니 조만간 공을 죽일 것 같다. 그러니 선수를 쳐야 한다.”라고 거짓말로 부추겼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지중추원사 박포가 공이 많은데 도리어 지위가 여러 공신들 아래 있다 하여, 몹시 불평을 하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무(李茂)가 비록 정사하는 데에 참여하였으나, 공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변덕이 많아 측량하기 어렵다.”

이방원이 이 말을 듣고 정종에게 아뢰어 박포를 죽주(竹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안 되어 소환하였다. 박포는 이에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회안군 방간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었는데, 이날 마침 우박이 내리자 박포가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겨울비가 길을 파손하면 병사가 시가에서 교전한다’ 하니, 마땅히 조심할 것이다.”

또 그때 붉은 빛의 나쁜 기운이 하늘에 나타났는데, 박포가 방간에게 가서 고하였다.

“하늘에 요사한 기운이 있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방간이 말하기를,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군사를 맡지 말고 드나들기를 삼가며 의관을 정돈하고 행동을 신중히 하여, 마치 고려조 자손인 여러 왕씨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말하기를,

“다시 그 다음 방책을 말하라.”

하니 박포가 말하였다.

“형만(荊蠻) 지대에 도망했던 태백이나 중옹처럼 하는 것이 그 다음의 방책입니다.”

중국 주나라 초기 태백이나 중옹이 동생 계력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은거한 것이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동생인 이방원의 공으로 돌리라는 표현이었다. 또 이르기를

“정안군은 군사가 강하며 많은 무리가 따르고, 공은 군사가 약하며 위태함이 마치 아침 이슬과 같으니, 먼저 선수를 써서 쳐부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방간이 이 말을 따라서 동생 방원을 자기 집에 오라고 청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방원이 그 집에 가려고 할 때 갑자기 병이 났다. 판교서감사 이래(李來)가 그 모의를 듣고 놀라서 방간에게 말하기를,

“공이 소인의 간악한 말을 듣고 골육을 해치려고 하니, 안될 일입니다. 하물며 정안군은 큰 공훈이 있습니다. 개국과 정사(定社)가 누구의 공입니까?”

하니, 방간이 성을 내며 좋아하지 않았다. 환관 강인부가 꿇어 앉아 손을 비비면서 말하였다.

“원컨대, 공은 이런 일을 하지 마소서.”

이래가 곧 이방원에게 고하기를,

“회안군의 광패하고 조급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급기야 방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화와 이천우가 이방원의 집에 가서 변을 고하고 맞아 싸울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방원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내 무슨 낯으로 남들을 보겠는가?”

하자, 이화가 말하였다.

“방간의 흉험함이 이미 극한에 이르렀는데 어찌 작은 절개를 지켜 종사의 대계를 돌아보지 아니하리요.”

하고, 힘껏 끌어 당겨서 외청(外廳)에 나오게 하였다. 이천우는 이방원을 끌어 안고 이화는 갑옷을 입혀서 말 위에 앉히니, 이방원이 사람을 시켜 정종에게 아뢰었다.

“마땅히 궐문을 굳게 지켜 비상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때 공신 중에는 다만 박포와 장사길(張思吉)만이 방간을 따르고 그 나머지는 이방원을 따랐다. 승선 이숙번이 앞장섰다. 방간의 아들 맹종은 본래 활을 잘 쏘았으나, 이 날은 병으로 활을 당기지 못하였다. 방간의 군사가 패하자, 이방원은 방간이 피살될까 염려하여 친히 연달아 부르짖으면서,

“내 형을 해치지 말라.”

하고, 말을 한길에다 세워 놓고 크게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방간은 말을 달려 곧 성균관 뒷마을에 이르러 활을 버리고 엎드려 숨는 것을 군사가 쫓아가 사로잡으니, 방간이 말하였다.

“나를 유혹한 이는 박포다.”

태조가 그때 상왕으로 송도에 있었다.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저 소 같은 사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우리나라에 세족대가(世族大家)가 많은데 나는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 박포는 죽이고 방간은 토산에 귀양보냈다. 태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병으로 죽고 맹종은 세종조에 이르러 대간이 청하여 죽였다.

 

당시 정종이 嫡子가 없었기 때문에 방간은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 이에 방간이 처조카인 교서관(校書館) 판사(判事) 이래(李來)에게 이를 의논하자, 이래는 방원에게 찾아가 방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일렀다. 결국 1400년 정월, 방간은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고, 두 형제가 이끄는 군사들은 개경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때 방원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내 형을 해치는 자는 목을 베겠다.”라고 말했다. 방간은 선제공격을 했지만, 군사 숫자가 워낙 많은 방원 쪽을 당해 내지 못했다. 결국 패하고 도망치던 방간과 박포는 방원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방원은 조정 대신들의 요청에도 방간을 죽이지 않고 토산으로 귀양 보냈다. 박포는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두 왕자 간의 싸움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박포의 난, 방간의 난으로도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의 반대파가 거의 제거되자 방원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심복인 하륜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1400년 2월에 방원은 세자로 책봉됐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분란의 불씨가 됐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집중시켰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권근(權近)은 “신하가 사병을 소유하면 반드시 군주를 위협하게 된다.” 하며 사병 혁파를 건의했다. 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중추원(中樞院)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고 양쪽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써 정무는 의정부가, 군정은 삼군부가 담당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다. 이 모든 것이 방원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 정종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았고, 동생인 방원이 조정을 거의 장악한 상태여서 왕위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왕비인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도 왕위에 계속 머물다간 방원에게 죽임당할 수 있으니, 정종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정종은 1400년 11월 왕위를 세자인 방원에게 물려준다.

이로써 3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시대가 열렸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직접 치른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제 확립을 위해 대다수 공신과 외척들을 제거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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