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의 웰링턴 공작

Arthur Wellesley ( 1st duke of Wellington 1769년 5월 1일 ~ 1852년 9월 14일)는 후에 영국의 총리(1828~30)가 되었다. 웰링턴 공작 1세 아서 웰즐리는 유례없는 오명의 시대 사이사이에 2차례에 걸쳐 명성을 빛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무찔러 세계의 정복자를 정복한 사람이 되었다. 워털루 전투 이후 그는 억압적인 정부에 가담했고, 나중에는 총리로서 헌법 개정 압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릇된 자존심 때문에 전쟁터에서나 의회에서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일은 없었으며 나라를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정책이라도 지지했다. 노년에는 비할 데 없는 대중의 공복(대공)으로 추앙받았다. 이에 대한 반발은 그가 죽은 뒤에 일어났다. 그는 우유부단한 장군으로 평가되었고, 한때는 19세기의 영국 총리 가운데 가장 무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군사적인 면에서 그의 천재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인격에 대해서도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타락하지 않은 정직하고 사심 없는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다.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초기생애

아서 웨즐리 웰링턴(1798년부터는 웰즐리)은 1769년 5월 1일 더블린에서 모닝턴 백작 1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이튼 학교에 다니다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졌고, 미망인이 된 어머니의 말처럼 "총알받이에 불과한 신세"가 되었다. 18세 때 육군 장교로 임관해 아일랜드 총독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790~97년에는 가족 영지가 있는 트림의 대표로 아일랜드 의회에 진출했다. 24세 때 빚더미에 올라앉은 신세로, 캐서린(키티) 패커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웰링턴은 도박을 그만두고 자신의 직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제33보병대의 중령 계급을 돈으로 산 그는 플랑드르에서 적극적으로 복무하면서(1794~95) 상관들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었다. 공직을 얻는 데 실패하자 1796년 자진해서 인도에 배치되었다. 인도에서 그는 절제하며 명랑하게 사는 방식을 택했다. 큰형 리처드가 인도 총독으로 부임하자,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단 하나를 맡아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과 싸워 이긴 뒤 마이소르 총독이 되었고(1799), 총사령관으로서 마라타족과 싸웠다. 그가 거둔 승리, 특히 아사예에서 거둔 승리(1803)는 평화를 가져왔고, 그는 직접 협상을 이끌었다. 나중에 유럽의 전쟁터에서 보여준 성공적인 자질들, 결단력, 상식, 세부적인 면에 대한 주의력, 부하 장병들과 보급품에 대한 관심, 민간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모두 인도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나중에 편지에서 그를 '인도 민병 부대 장군'쯤으로 여겼는데, 이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웰링턴에게 새로 맡겨진 임무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노버 원정 계획이 무산된 뒤, 그는 헤이스팅스에서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무가 요구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의무는 아름다움이 시들어버린 키티와 결혼하는(1806) 것이었고, 또 하나는 형의 인도 근무 기록에 대한 과격한 비난을 물리치기 위해 의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토리당 서기장이 되어 2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지냈다. 1807년 잠시 코펜하겐에 원정한 것은 휴식이 되었고 이 원정에서 덴마크의 소규모 부대를 무찔렀다. 1808년 포르투갈인들이 나폴레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웰링턴은 그들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웰링턴 공작 가문의 문장(紋章)

 

  • 세습귀족의 시작, 초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1814년 - 1852년)
  • 제2대 웰링턴 공작 아서 리처드 웰즐리 (1852년 - 1884년)
  • 제3대 웰링턴 공작 헨리 웰즐리 (1884년 - 1900년)
  • 제4대 웰링턴 공작 아서 리처드 웰즐리 (1900년 - 1934년)
  • 제5대 웰링턴 공작 아서 찰스 웰즐리 (1934년 - 1941년)
  • 제6대 웰링턴 공작 헨리 웰즐리 (1941년 - 1943년)
  • 제7대 웰링턴 공작 제럴드 웰즐리 (1943년 - 1972년)
  • 제8대 웰링턴 공작 아서 발레리언 웰즐리 (1972년 - 2014년)
  • 제9대 웰링턴 공작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 (2014년 -)

 

웰링턴과 나폴레옹 전쟁

웰링턴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절반쯤 지고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럽 대륙의 군대들은 대개 나폴레옹의 우월성에 미리 주눅이 들어, 싸워보기도 전에 반쯤 지고 들어가는 상태였다. '끈기있고 성실한 군대'로서 프랑스의 공세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영국군 보병대의 '가늘고 붉은 선'은 비메이로에서 앙도슈 쥐노 장군의 부대를 무찔렀지만(1808. 8. 21), 영국군 상급장교 2명이 도착하자 패배한 프랑스군을 추적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두 장교는 인기없는 신트라 협정을 맺는 쪽을 택했고, 이에 따라 쥐노의 군대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대중의 항의로 웰링턴과 동료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 토리당 서기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철수한 뒤, 그는 아직은 포르투갈을 지킬 수 있다고 정부를 설득해 1809년 재원정을 허락받았다. 이것은 유럽에 매우 중대한 결정이었다. 리스본에 상륙한 그는 프랑스의 니콜라 장 드 디외 슐트 원수를 기습,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쫓아 스페인으로 진격했다. 반도전쟁에서 영국과 스페인 연합군은 탈라베라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7. 27~28), 마드리드 진격은 실패했다. 이 공격에 대한 보상으로 귀족의 지위를 받아 웰링턴 자작이 되었지만, 프랑스군보다 훨씬 적은 병력을 이끌고 포르투갈 기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 도중 부사쿠에서 앙드레 마세나 원수를 무찔렀다(1810. 9. 27). 그는 리스본 반도를 가로지르는 유명한 '토레스베드라스 요새선'을 은밀히 구축했다. 마세나 원수가 1811년 봄 포르투갈에서 철수하고 푸엔테스데오뇨로를 빼앗기자(5. 3~5), 웰링턴의 초토화 방어 정책은 그 정당성이 충분히 입증되었고, 그에 대한 부하 병사들의 신뢰는 더욱 굳어졌다. 이들은 그를 '코쟁이'라는 별명으로, 장교들은 '멋쟁이'라고 불렀다. 그는 175cm의 날씬한 키에 완벽하게 재단된 사복을 입기 좋아했고, 갈색 곱슬머리와 반짝이는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그의 병력은 서서히 늘어나, 1812년에는 스페인의 시우다드로드리고 요새와 바다호스 요새를 점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이후 살라망카에서 '40분 만에 4만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르고(7. 22) 마침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8. 12). 그러나 부르고스 포위전이 실패해 다시 포르투갈로 후퇴했다가 1813년 5월에 마지막으로 스페인 진격을 시작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돌진한 뒤, 비토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어 궤멸시키고 그들의 휴대 장비를 모조리 빼앗았다(6. 21). 이 빛나는 전리품은 승리자들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그들이 승리에 도취해 있는 동안, 프랑스군은 피레네 산맥으로 달아났고, 웰링턴은 술취한 병사들을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라고 비난했다. 비토리아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고무받은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대(對)프랑스 동맹을 형성했으며, 프랑스의 술트가 피레네 산맥에서 초기에 거둔 성과도 웰링턴이 산세바스티안과 팜플로나를 점령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건기가 시작되자 웰링턴은 프랑스를 침공해 강의 방어선을 하나씩 돌파했고 1814년 4월 10일 툴루즈로 진격해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끝냈다(그보다 4일 전에 나폴레옹은 퇴위했음). 이미 후작작위를 받고 원수로 진급한 웰링턴은 공작이 되었으며, 나라에서 주는 50만 파운드의 포상금까지 받았다.

나중에는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햄프셔 주에 있는 스트랫필드세이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떠난 뒤, 웰링턴은 복위한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 궁정에 주재하는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1815년 2월에 그는 외무장관인 캐슬레이 자작 대신 영국 대표로 빈 회의에 참석했으나, 각국 대표들이 강화 회담을 끝내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프랑스에 상륙했고(3. 1).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시작되었다. 웰링턴 공작은 프로이센의 게프하르트 레베레흐트 블뤼허 원수와 함께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가장 기쁨에 넘친 영웅은 아니었지만)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는 전사자들을 위해 울면서, "나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 전투이기를 하느님께 바란다"고 말했다. "항상 싸운다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다." 그의 소원은 실현되었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한 동맹군 총사령관으로서 가혹한 강화조약에 반대했고, 프랑스 재정을 구하기 위해 차관을 주선했으며, 3주 뒤에 점령군의 철수를 건의했다. 이런 정책으로 그는 강화 회의에 참가한 대표자들의 호의를 얻었고, 1818년 귀국 시에는 6개국의 지휘봉(육군 원수의 상징)을 갖고 있었다.

 

내각에서의 역할

웰링턴은 해외에서 경험을 쌓는 동안 결코 정당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리버풀 백작의 토리당 내각에서 병참사령관이 되었지만, 뒤이은 휘그당 내각을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았다. "당파심이 앞선 반대는 국가 이익에 큰 해를 끼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의 불만이 폭동으로 발전해 의회개혁을 요구하는 맨체스터 시위에서 피털루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내각 각료들을 암살하려는 케이토가(街) 음모 사건이 적발되자, 웰링턴은 차츰 법과 질서를 정당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1822년 인기있는 조지 캐닝이 캐슬레이 자작의 뒤를 이어 영국 외무장관이 되었다. 캐닝은 빈 체제에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웰링턴은 이 체제가 이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캐닝에 대한 조지4세의 개인적 혐오감을 억눌렀다. 그러나 캐닝이 유럽 대륙에서 발을 빼자 웰링턴은 씁쓸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베로나 회의(1822)에서 유럽 동맹국들 사이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하고, 러시아에서도 외교적 실패(1826)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의 자책감은 더욱 심해졌다. 실수에 솔직한 웰링턴은 캐닝의 미묘한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는 정직한 보수당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1825년에 웰링턴은 아일랜드 문제에 전념해 아일랜드 문제를 근본적 딜레마라며 공식화했다. 정치적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의회에 의석을 달라는 가톨릭교도들의 해방 요구를 수락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신교도의 권력 체제 또한 보호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애썼다. 로마 교황이 영국정부와 협정을 맺어 가톨릭 성직자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권을 영국정부에 보장하는 것이 가톨릭교도 해방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철저한 해방자인 캐닝이 1827년 4월 총리가 되자, 웰링턴은 신교도의 지배권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웰링턴과 로버트 필은 많은 지지자들을 이끌고 내각에서 탈퇴했다. 웰링턴은 사령관 자리도 사임했다. 이런 행동은 왕이 그의 경쟁자를 총리로 선택한 데 대한 반발로 해석되었다. 웰링턴은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부인하면서, 군인인 그가 총리직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미쳐도 이만저만 미친 게 아닐 것"이라고 경솔하게 단언했다. 그해 8월에 캐닝이 죽은 뒤, 그는 사령관 자리를 되찾았다. 그로부터 5개월도 되기 전에 캐닝의 후임자인 고드리치 자작이 임무를 포기했고, 1828년 1월 9일에 왕은 웰링턴 공작을 불러 내각구성을 맡겼다.

 

총리시절

웰링턴 공작의 목표는 토리당을 재통합해 강력하고 균형잡힌 정부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총사령관 자리를 다시 마지못해 사임한 그는 윌리엄 허스키슨이 이끄는 캐닝파를 받아들이는 한편 급진파 토리 당원은 자신의 온건 정책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했다. 이리하여 우익이 소외되자 좌익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하는 야당은 허스키슨파의 공감을 얻었다. 현명한 웰링턴 공작은 처음 부닥친 교회 문제에서 뒤로 물러나 비국교도를 처벌하는 심사율 및 지방자치 단체법을 개정했고, 곡물법(값싼 외국산 농산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 문제에서도 다시 뒤로 물러나 그와 농민측이 원하는 것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개혁안을 도입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그 직후에 야기된 의회개혁 문제에서는 허스키슨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5월에 허스키슨파는 모두 사임했다. 그 직후 아일랜드 클레어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는 더 큰 위기가 일어났다. 허스키슨의 후임으로 장관이 된 윌리엄 비지 피츠제럴드가 의석을 지키기 위해 이 지역에 출마했다가 아일랜드 가톨릭 지도자인 다니엘 오코늘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기있는 친가톨릭파인 비지 피츠제럴드의 패배는 웰링턴 공작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가톨릭교도에게도 신교도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가톨릭교도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어떤 토리 당원도 아일랜드 남부에서는 승리할 수 없으리라는 교훈이었다. 자칫하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웰링턴은 1828년 8월 생애에서 가장 힘겨운 정치적 의무에 착수했다.

조지 4세와 하원의 지도자가 된 로버트 필, 그리고 토리당의 다수파를 설득해 그들이 그때까지 입에 담기조차 싫어한 가톨릭교도 해방을 찬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막후에서 끈질긴 설득 작업을 벌인 끝에 웰링턴은 마침내 왕의 동의를 얻었다. 필의 입장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공공연한 신교도인 그는 하원 지도자가 아닌 평의원의 입장으로만 가톨릭교도 해방을 지지하겠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그러나 웰링턴의 끈기와 필의 관대함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고, 필은 하원을 계속 이끌기로 동의했다. 수많은 급진파 토리 당원들은 웰링턴의 '전향' 명령에 끝까지 저항했지만, 토리당의 대다수는 복종했다.

그리하여 토리당은 분열했으나 1829년 4월에 가톨릭교도 해방이 법률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웰링턴 공작이 거둔 최대의 정치적 승리였다. 공작이 자신을 모욕한 급진파 토리 당원인 윈칠시 백작과 결투를 벌인 것은 이 승리에 멜로드라마 같은 요소를 덧붙여주었다. 웰링턴은 이따금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일관성이 없었던 게 아니라 대중에게 좀더 일찍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비밀주의자일 뿐이었던 것 같다.

그는 1825년에 어떤 형태의 가톨릭교도 해방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속마음을 효과적으로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웰링턴의 업적은 더 많은 변화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고, 1829~30년에 일어난 전국적인 경제 위기는 이 요구를 더욱 강화했다. 휘그당 지도자인 그레이 백작 2세 찰스 그레이는 이 요구의 물줄기를 새로운 선거법 개정안으로 끌어들였다.

귀족과 젠트리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독점 선거 대신, 버밍엄 같은 신흥산업 도시에서 의회 대표자를 낼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그의 선거법 개정안의 골자였다. 조지 4세가 죽은 뒤 1830년에 윌리엄 4세가 즉위해 총선거가 실시되자, 가난과 실업에 대한 웰링턴의 숙명론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국민들은 그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7월 혁명)은 영국의 개혁론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웰링턴 내각은 살아 남았지만 크게 약해졌고, 허스키슨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화해 계획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좌절되었다.

웰링턴은 선거법 개정을 만병 통치약이 아니라 헌법의 자살 행위로 간주했다. 의회가 열리기 2주 전에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선거법 개정을 파멸적인 것으로 비난하고,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밝혔다. 그는 11월 2일에 어떤 개혁에도 반대한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의회를 놀라게 했다. 개혁론자들과 복수심에 불타는 급진파 토리 당원들은 합세해 11월 15일 그를 무너뜨렸다. 로버트 필은 이튿날 그를 사임했다. 그레이 백작이 웰링턴의 뒤를 이어 영국의 총리가 되었다.

웰링턴은 군인으로서는 '언덕 저편에' 있는 것을 알아맞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치적 상상력은 부족했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언덕 저편에는 혁명('법률이라는 정당한 절차에 따른 혁명')이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이런 착각 때문에 그는 반동주의자라는 당연한 비난을 받았다.

 

말년

야당이 된 웰링턴 공작은 상원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그레이의 노력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과격한 폭도들은 웰링턴의 창문을 2번이나 박살냈다. 그러자 웰링턴은 창문에 쇠로 만든 덧문을 씌웠는데, 이때문에 '철공작'이라는 그의 별명은 더욱 그럴 듯해 보였다. 이 강력한 투쟁은 1832년 5월의 위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위기는 프랑스의 7월 혁명처럼 끝날 우려가 있었다. 왕은 적대적인 상원을 압도하기 위한 새로운 귀족 직위를 만들기를 거부했고, 그레이는 사임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그레이 내각을 대신할 새 내각을 구성하지 못했다. 혼미의 교착 상태에 부딪힌 웰링턴은 여전히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지만, 나라를 위해 한 걸음 물러서서 6월에 선거법 개정안이 법률로 제정될 때까지 의회에 출석하지 말자고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그런데도 성난 군중은 위털루 전승 기념일에 웰링턴을 습격했다. "묘한 날을 골랐군." 이것이 그의 유일한 논평이었다.

투표에 불참한 웰링턴 공작의 자제는 상원을 구했고, 그는 토리당 상원의원들을 이끄는 동안 상원이 하원과 치명적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가능할 때마다 왕의 정부를 지지했다. 윌리엄 4세는 1834년 웰링턴 공작을 불러 내각을 구성하라고 명령했지만, 65세의 공작은 로버트 필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정치가한테서는 지극히 보기 드문 이 자기 희생은 당연히 인정받았다. 그는 필 내각에서 외무장관(1834~35)과 무임소장관(1841~46)으로 일했다. 또한 옥스퍼드대학교 명예 총장, 런던 탑 감찰총감, 햄프셔 주지사로도 일했고, 수로안내협회 간부를 거쳐 수로안내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역할까지 맡았다. 그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총사령관 자리를 지킨 것은 잘못이었다. 그는 나중에 절실히 필요해진 개혁을 주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1848년에 임박한 차티스트 운동의 봉기를 침착하게 처리해 폭력사태를 막아냄으로써, 노련한 천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가 곡물법을 둘러싸고 또다시 상원의원들에게 '전향'을 명령한 덕분에, 로버트 필은 곡물법을 폐지할 수 있었다. 웰링턴은 1846년 공직에서 은퇴했지만, 그후에도 모든 정당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이드파크 모퉁이에 있는 그의 런던 저택 앱슬리 하우스는 런던 1번지로 알려졌다. 웰링턴 공작은 오항(五港)의 총독으로 있던 중, 그가 좋아하는 거처인 월머 성에서 1852년 9월 14일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엄한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영제국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진 웅장한 의식이었다. 그는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사생활

'왕과 국민의 공복'이라는 말과 표현을 바꾼 비슷한 말들은 웰링턴 공작이 자신을 표현할 때 되풀이해 사용한 것이며, 공작이 존경받는 주요이유인 자기헌신을 보여주는 적절한 표현이다. 그는 재치있는 응답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옷차림과 편지에도 재미있고 별난 특징이 많았다. 이것이 그를 영웅인 동시에 '괴짜'로 만들어주었다. "발표하면 저주받으리라!" 이것은 협박자에 대한 그의 유명한 대꾸였다.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내 키티는 그를 지나치게 두려워했고, 지나치게 숭배했다. 키티는 1831년 4월 24일에 죽었다. 두 아들 가운데 맏아들은 아버지의 최신 〈공문서 Despatches〉를 편집했고, 막내아들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웰링턴에게 손자를 낳아주었으며 웰링턴은 이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그는 해리엇 아버스넛(찰스 아버스넛의 아내)과 앤젤라 조지나 버뎃 쿠츠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과 깊은 애정을 맺었는데, 이것은 그가 영리한 여자와 결혼했다면 행복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참모들(그의 군대 가족)의 우정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일부 근대 역사가들은 웰링턴이 냉혹하지도 않았고 무자비하지도 않았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그가 죽은 뒤에 붙여진 철공작이라는 칭호에 반대했으나 군대의 규율을 엄격하게 유지하는 것을 종종 자랑하곤 했다. 그는 매력적인 소박함을 지녔고 놀랄 만큼 허영심이 없었다. 이런 성격은 그가 즐겨 입에 올린 "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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