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國大統領 雩南 李承晩 博士

성장기와 청년기

우리나라 건국대통령 李承晩(1875 ~ 1965) 박사는 1875년(고종 12)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왕조 태종임금의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두 아들이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1877년 한양(漢陽)으로 이사해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아펜젤러 등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특히 영어공부에 집중해 1895년 8월부터는 배재학당의 초급영어반 교사를 맡기도 했다. 1896년 이승만은 갑신정변 가담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hon) 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재필이 1886년 11월 학생들의  협성회를 만들자 이승만은 이에 적극 참여하는 1896년 배재학당 내의 청년단체로 토론모임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연설을 했다. 그 후 언론 및 정치 활동을 통하여 민중계몽과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891년엔 집안의 강요로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의 소환 ・ 서용(恕容)운동에 앞장섰다가 박영효 일파의 고종 황제 폐위음모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배재학당 아펜젤러 교장의 협조요청을 받은 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독립운동기

1904년 8월 9일 츙정공 민영환의 도움으로 고종황제의 특별사면령을 받아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이미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적극후원으로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독창성이 두드러진 탁월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당시 프린스턴대 스승인 우드로 윌슨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승만을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 義士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절하여 동포사회에서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한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1년 조선총독부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1912년 신민회 회원 105인을 검거하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조혼한 아내 박승선과 이혼하고, 그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주 Minneapolis)에서 열리는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여 위기를 모면한 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13년 3월 옥중 동지이자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朴容萬)의 요청으로 미주 한인의 절반 이상이 살던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이승만은 이 곳에서 한인 앙학원, 한인여자대학, 한인기독학원 등을 세우며 교육사업을 펼쳐 세를 확장했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한글 월간지인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될 무렵 박용만이 무장투쟁노선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의 운영을 주도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의해 국무 급(及)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었지만,  3.1운동 소식이 전해지기 전인 1919년 3월 3일 이승만은 미 국무부에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위임통치 청원서를 낸 바 있었다. 1919년 3 ・ 1운동 발발 후 국내와 중국 ・ 러시아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속속 조직 ・ 발표되면서 대한공화국의 국무경,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서울에서 선포된 세칭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4월 중순 서재필 ・ 정한경 등과 더불어 미주에서의 3 ・ 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일명 대한인총대표회)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민의 목표와 열망」이라든가 「미국에의 호소문」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여 한국민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6월 중순에는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본부’를 설치한 후 조선왕조와 조약을 체결했던 미국 ・ 영국 ・ 프랑스 등 열국에 공문을 보내 한국에서 새로운 민주국가가 탄생했음을 알렸다. 그 해 9월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인정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 수반인 임시대통령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 멸망 후 9년 만에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을 1932년 11월 당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1933년 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을 중립국으로 인정해달라는 탄원을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25살 차이의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씨를 만났고, 1934년 10월 8일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에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신랑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사라졌고 연상의 여인에게 간 것을 알게 되어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후 1933년, 이승만이 국제회의 때문에 스위스에 갔을 때, 호텔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합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고, 결국 나이차를 극복하고 1934년에 결혼했다. 위의 이승만 사진은 그 무렵의 모습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미모와 세련된 매너, 뛰어난 외국어 실력 등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에게 여비서 역할 이상의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승만의 태평양전쟁을 예고한 명저 "Japan Inside Out"(일본 군국주의 실상)은 사실상 이승만이 구술하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이핑하였으니 그 녀의 손끝에서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1941년엔 일본이 태평양의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의 태평양 전쟁을 예언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승만은 이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구미에 알릴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키 위한 연결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분할통치를 하기로 한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자유민쥬쥬위 체제로 대한민국 건국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뒤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이승만은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야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 미군정을 이끌고 있던 하지 중장은 대학선배인 이승만을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소개하는가 하면, 이승만에게만 라디오 방송에 나가 전 국민을 상대로 연설할 수 있는 특전을 줬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귀국 직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에 반대하였다.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서며 반공노선을 분명히 내세웠다. 남한의 좌·우익은 신탁통치의 찬성-반대로 갈려 극심한 대립을 빚었다.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을 주미한국대사로 임명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 협력하였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농지개혁을 추진·실시하였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군의 증강을 제한하였으나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공군 창설을 지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대전에 도전한 후 전쟁경과에 대한 특별방송을 통해 현 전선을 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을 촉구하는 내용을 공표했다.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지지로 재차 당선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집권기의 이슈를 중심으로 분석해 본다.

 

여순반란사건

정부 수립 후에도 제주도에서는 좌우대립은 계속되어 제주도에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던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에도 제주도로 1개대대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로당 소속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은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으나 10여 일만에 미군과 정부군에 진압당했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2600여 명에 달했고, 1만 7000여 명이 반란 가담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그중 866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승만은 군대 내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라고 지시해 4749명의 군인을 숙청했다.

 

국가보안법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국가보안법을 마련해 국회에 상정했다. 야당의원들의 반발에도 이승만과 한민당 연합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1948년 12월 1일 공포했다. 국가보안법 공포 이후 1년 동안 체포된 사람은 무려 11만 명에 달했고, 경찰은 2만 명이 증강되고 군인은 4배로 강화됐다. 언론에 대한 검열도 강화되어 정권을 비판하는 신문은 폐간되고, 방송국은 국영화됐다.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과거 좌익에 가담한 적이 있는 사람은 강제적으로 이 단체에 가입하게 했다.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가입을 거부하면 폭력을 일삼았고,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1950년대 초 국민보도연맹 회원은 무려 50만 명에 육박했는데, 좌우익을 구별하지 못하는 문맹자나 도시 빈민들이 다수였다.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은 6.25 전쟁 때 빨갱이로 몰려 대부분 처형됐다.

 

반민특위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이 가장 첨예한 문제로 등장했으나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부정적이었다. 1948년 9월 7일 국회에서 재석의원 141명 중 103명 찬성의 압도적 지지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됐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됐다. 이승만은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친일파 처단보다 나라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면서 친일파 처단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총 세차례의 대국민담화를 발표해 국회의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다. 사태가 진전되자 이승만은 경찰을 포함한 친일 고위관료와 추종세력을 동원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1949년 5월 17일, 6월 21일 반민특위의 주요 의원들이 남로당과 연계해 프락치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검거하는 '국회 프락치사건'이 벌어졌다. 또 무장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의 직원 35명을 체포, 구금하기도 했다. 한민당이 주축이 되어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한정시키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1949년 7월 7일 반민특위 소속자 전원이 사임했다. 같은해 8월 22일 국회에서 반민특위 폐지안이 통과되어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 청산은 무산됐다.

 

농지개혁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해방 당시 한국 농민들은 84%가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고, 농토의 63%가 소작지였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초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의한 전면적 토지개혁이 이뤄졌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차원에서도 농지개혁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책임질 초대 농림부 장관에 조봉암을 임명했다. 1949년 6월 "헌법에 의거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내지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농지개혁법이 제정됐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3월과 4월 농지개혁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잇달아 공포하고,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3000평 이상의 농지에 대해 정부가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서 소작농에게 파는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을 취했다. 땅값은 현금이 아니라 유가증권으로 지주에게 줬고, 땅을 받은 소작농은 땅값(수확량의 1.5배)를 5년에 나눠서 현물로 상환하도록했다. 농지개혁을 실시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57년에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농지개혁으로 전통적 지주제도가 일시에 해체됐다. 특히 6.25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주계급들이 받은 지가증권은 휴짓조각이 되어버려, 더욱 빠르게 붕괴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의 기틀인 사유재산제도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반발했다. 당시 남한은 국방과 치안이 극히 불안정한 상태였고, 미국은 에치슨 라인에 따라 1949년 5월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전쟁 발발 이틀만이 27일 새벽 이승만은 서울을 피난한다. 이승만은 3시 30분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대전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밤 9시 "동포여러분, 미군이 참전했으며 계속 진격하고 있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담화를 내보냈다. 전쟁 발발 66시간 처음 대통령의 육성이 나오자 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날인 28일 육군은 새벽 2시 30분경 한강 인도교 폭파작전을 시행했다.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 다시 대전을 떠나 이리-목포를 거쳐 선박편으로 부산까지 내려갔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6월 당시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미국 대사 브릭스와의 회동에서 휴전 후에도 한국을 지켜줄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립주의'로 흘러가던 미국은 이승만의 제안에 부정적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5000명의 반공포로를 직권 석방시켰다. 미국은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휴전에 응할 것을 제시해 1953년 7월 휴전협상이 체결되었다. 1953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호조약이 체결됐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줄 수 밖에 없는 나라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한 경우여서 미국으로써는 자존심을 구기는 조약이었다. 결국 미국은 한국에 2개 사단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2개 사단을 휴전선 서부전선에 배치함으로서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도록했다.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함께 미국은 국군 20개 사단을 유지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

 

발췌개헌 · 부산 정치 파동

전쟁 중이던 1951년 대통령 임기를 1년여 앞두고 피난 수도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간접 선거로 뽑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 판도로 볼때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1951년 11월 이승만은 국민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3일 뒤에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승만의 개헌안이 부결됐고 1952년 4월 17일 의원들은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승만은 이를 막기 위해 1952년 5월 25일 부산에도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대를 동원해 국회 통근버스를 끌고가고 국회의원 10명을 감옥에 가뒀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양원제 두 가지만을 발췌하여 만든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다. 같은해 7월 4일 야간 국회를 열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기립투표로 진행된 투표 결과는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표, 기권 3표로 반대는 아예 없었다. 정치파동에 동원된 경찰, 깡패 등이 조성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1952년 8월 5일 2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고 이승만이 당선됐다.

 

반공포로 석방 이후의 대미관계

미국의 정전협정 추진에 반대하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였다. 195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관할 하에 두는 대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56%의 득표로 당선,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해 1956년 경제개발계획을 미국에 제출하였지만, 미국 정부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 하였고, 1958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를 위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1월 산업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곧 이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 하였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사사오입에 의한 3선 개헌

재선한 이승만은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을 없애고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이승만은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민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원 수를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경찰의 물리력을 동원해 야당 후보의 등록과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이로써 자유당은 전국 203개 선거구에서 114석을 확보했다. 자유당은 무소속 의원 23명을 영입해 개헌에 필요한 136석을 넘겼다. 자유당은 1954년 9월 7일에 중임제한 철폐 개헌안을 제출했다. 그외에도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의 자동 승계제와 국무총리제 폐지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승만은 개헌안을 내놓으며 개헌 반대자들을 반역 행위자로 간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개헌안은 11월 20일에 본회의에 상정되고, 11월 27일에 비밀투표에 붙여졌다. 표결 결과는 재적 의원 203명에 재석 의원 202명,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의결 정족수 136명에 1명 모자라는 결과로 나와 부결로 선언됐다. 그러나 이틀뒤 최순주 부의장은 재적의원 203명에서 의결 정족수인 3분의 2는 사사오입에 따라 135명이지 136명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으며 결과를 뒤집었다. 당일 정부는 개정 헌법을 공포했다. 1956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확정했다.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확정했다. 민주당과 진보당추진위원회는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다. 1956년 5월 6일 최종 합의 직전 신익희 후보가 열차에서 급서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단일화는 무산됐다.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504만 6000여 표로 52퍼센트의 지지를 받아 승리했다. 조봉암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지만 216만 3000여 표를 획득하며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올랐다. 부통령에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제치고 장면이 당선됐다.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법 살인'

조봉암은 대선 직후 창당작업에 들어가 11월 11일에 창당대회를 열었다. 진보당은 1958년 5월 실시될 국회의원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수 있는 20석 이상 확보를 목표로 했다.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올라가자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또 검찰은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조봉암의 재심 청구는 같은해 7월 20일에 기각됐다. 다음날 7월 31일 조봉암은 사형당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이 정적 제거를 위해 '사법살인'을 벌였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3·15 부정선거와 대통령의 下野

1960년 3월 15일 4대 정 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병옥이 선거를 한달 앞두고 지병으로 쓰러져 사망한 탓에 이승만은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부통령을 뽑는 선거였던 3.15 선거에서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 후보 이기붕의 재대결이 벌어졌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 반공청년단, 정치깡패 등을 동원해 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자유당은 투표함을 열기도 전에 경찰과 내무부가 연합하여 투표 결과를 조작한 결과 이승만은 963만337표를 얻었고, 이기붕은 833만 7059표를 얻어 장면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직후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선거 무효를 주장했고, 부정선거에 대한 격렬한 국민저항이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김주열의 머리에 경찰의 시위진압용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확대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하고 공산분자들이 시위대를 조종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더욱 무력으로 진압하고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이 대학교에 난입하여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4월 19일 서울의 시민과 대학생 및 고등학생 10만 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실탄을 발포해 100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생겼다. 이승만은 내각 총사퇴를 지시하고, 이기붕의 정치 활동을 중단시키고 자신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고, 대학교수 258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거리 행진에 나섰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고령과 통신 수단의 미비로 4월 26일에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태에 대해 인지하게 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로 인해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 다음과같이 대화 하였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선거를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라고 이야기하며 학생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각계각층의 시위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국민의 뜻이라면 물러나야지." 하며 다음 날인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예전의 활동무대인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2년 3월 17일 귀국하려 했으나 이뤄지지 않았고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7월 23일 고국으로 운구되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된 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사랑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이승만이 1948년 5월 30일에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자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景武臺로 이주하여 살았다.  Francesca Donner Rhee / 李富蘭 여사는 영부인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남편 관련된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하며 수발을 드는 등 이승만에게는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  6.25사변의 전시피난살이에도 내조를 충실히 하고 하와이 망명시에도 간병에 전념하였다. 정장 단벌에 30년 넘게 쓴 양산, 유일하게 잘 말하는 한국어가 '쪼금쪼금'이었다는 일화를 보면 그냥 독일 문화권 고유의 근검절약심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아니오.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당 정권이 4대 대통령선거에서 이 대통령의 후계자였던 이기붕을 부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저지른 부정선거였다. 민심은 돌아섰고 마산 돌풍은 북상하여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4월 26일, 사태가 임계점을 넘은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긴급회의 소집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별관에서 김정렬 국방장관, 허정 외무부 장관,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등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김 장관이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 하야’를 조언했다. 허정도 거들었다. 참모의 전격 조언에도, 이 대통령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책상 귀퉁이만 만지작 거리던 이 대통령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 대통령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저분들의 말이 옳으니 결심을 하세요". 이 대통령은 이내 “그렇다면 물러나지”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박찬일 비서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부르는 대로 쓰라고 했다. 국방장관이 이 대통령의 말을 받아썼다. "나는 ..민간인으로 돌아가.." 4월26일 오전 10시, 그렇게 이승만의 하야는 결정됐다.  미국도 이 대통령이 정권을 내려놓으면 신변보호를 약속한 상황이었다. 참모들, 혹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조언도 어쩌면 이 대통령 결심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내의 귓속말이 '결정적' 까지는 아니어도 '최후'의 역할은 한 듯 하다.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 하지만 둘의 첫 만남 만큼은 여느 커플 못지 않게 풋풋했다. 그녀는 1933년 제네바 국제회의에 참석차 스위스를 방문했던 이승만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다가간 것은 프란체스카였다. 당시 회의 시작 전 호텔 로비에서 '혼밥'을 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라고 말을 걸었다. "코리아"라는 답에 아는 지식은 다 쏟아냈을 그녀.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 대화로 어느 정도 친해진걸까? 다음날 그녀는 이승만이 나온 인터뷰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스크랩해 호텔방에 전달해줬다. 그러길 두 차례, 이승만이 답례로 차 한 잔을 사주며 데이트가 시작됐다. 결혼한다고 했을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딸이 일제강점기여서 나라도 잃은 동양인 망명 외교관과 사랑에 빠진 게 탐탁치 않았던 듯하다. 딸을 내버려두고오스트리아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단단히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훗날 자서전에 이승만이 '혼밥' 메뉴로 절인 배추,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를 시켰던 것 까지 기억해내며 이렇게 썼다. "나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을 느꼈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대한민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목격했다. 한국이 광복을 맞은 뒤 이승만은 제헌국회의장 등을 거쳐 초대 대통령이 됐다. 프란체스카는 그에 따라 영부인이 됐다. 나라 잃은 외교관의 부인일 때는 자서전에 "바나나에 의존해 살았다"고 적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지위가 급상승한 것이다. 신분이 바뀌자 프란체스카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이전에 '내조 잘하는 부인'상으로 기술된 것이 많았다면 영부인이 되고는 '참견꾼' 등으로 소개된다. 경무대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한 탓에 보좌관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는 일화도 있다. 인색하다는 평가도 있다.  남편이 하야하고 나서도 함께 하와이에 가서 콩나물, 두부, 된장을 주식으로 살았다. 머잖아 남편을 여의고 한국과 오스트리아 등을 오가다 자신도 천수를 다했다. 프란체스카는 죽기 전 남편을 떠올렸다. 그는 주변에 "내 가 죽기 전에 틀니를 잊지말고 껴다오, 꼭 틀니를 끼고 남편을 만나야겠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부군의 서거후 梨花莊에서 양말을 기워신고, 우산을 고쳐 쓰시는 등 검소하게 여생을 보내던 우리나라 최초의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1992년 3월 19일 향년 92세로 돌아가시자 이승만 박사 묘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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