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革命과 나폴레옹 전쟁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 선언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재정 전문가 콜베르를 기용하여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국가의 부를 늘리려고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올라섰고,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나라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자신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는 힘을 가진 국왕)로서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8세기 초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팔츠 전쟁이나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 재정을 바닥냈다. 또 루이 15세 때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 참가하여 엄청난 재정만 낭비한 채 성과도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제2차 백년 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오랜 전쟁에서도 밀려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는 이미 국가 재정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왕실 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다. 루이 16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3 신분인 평민들만 냈던 세금을 제1 신분(성직자)과 제2 신분(귀족)에게도 거두려는 재정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비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16세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1614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삼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소집한 삼부회는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제1 신분과 제2 신분 대표는 각각 300명이고, 제3 신분 대표는 약 600명으로 숫자에서는 두 배였다. 그렇지만 표결 방식이 각 신분별 투표였기 때문에 관례대로 투표를 진행한다면 2:1로 제3 신분이 질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제3 신분 대표자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을 반대하면서 국민 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면서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시위를 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그들의 주장에 하급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합류하면서 드디어 국민 의회를 인정하고 헌법 제정에 나섰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 의회 활동을 위협하려 했다. 이를 본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도화선이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졌고, 무거운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은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여 성을 약탈하고 봉건적 의무가 기록된 문서들을 불태웠다. 농촌이 대혼란에 빠지자 국민 의회에서는 봉건제 폐지를 제의했고, 성직자·귀족들이 그 제의에 찬성하면서 새 헌법의 기본 원칙을 만들어 그 결과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프랑스 의회가 결의하여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 선언’이다.

그러나 헌법 제정 과정에서 루이 16세가 다시 의회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1791년에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부유한 상공업자와 부농 출신에 기반을 둔 지롱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입법 의회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은 다시 폭동을 일으켜 왕의 퇴위와 보통 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왕정이 폐지되고 국민 투표로 공화정(제1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 시민들에게 낡고 모순된 구제도(앙시앵 레짐)는 시정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비판 의식을 심어 준 것이 있었다. 바로 18세기 중엽 유럽을 지배했던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특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로크의 주장은 시민 계층인 부르주아들이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 바다 건너 미국이 독립 혁명에 성공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봉건적인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나폴레옹의 등장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집권 세력인 공화파는 지롱드 당(부르주아 기반)과 자코뱅 당(소시민층과 소생산자층 기반)으로 분열되었다. 새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자코뱅 당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루이 16세를 179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뿐만 아니라 1만 5천 명에 이르는 반혁명 용의자들을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이때 도시 빈민층이나 하층 시민인 상퀼로트(‘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극 참여하여, 반대파를 잡아들이고 숙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상퀼로트 시대’라고도 한다. 그 무렵 주변 국가들은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자기 나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93년 제1차 대불 동맹(영국 수상 피트의 주창으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네덜란드가 맺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정치에 떨던 시민들과 숨어 있던 부르주아지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르미도르의 반동’(프랑스 혁명력에서 ‘열의 달’ 을 뜻하는 말로 1794년 7월을 가리킴)을 일으켰다. 그 결과 로베스 피에르를 처형하고 공포 정치를 마감하면서 5인의 총재로 구성된 총재 정부가 들어섰다. 그 뒤 해외로 망명했던 왕당파들이 영국 정부의 지원을 얻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방데미에르 13일의 폭동’(프랑스 혁명력의 ‘포도의 달’ 13일. 1795년 10월 5일을 가리킴)을 일으켰다. 이때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핵심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로부터 사령관으로 기용되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나아가 이탈리아 북부와 벨기에를 프랑스 영토로 병합시켰다. 그 결과 제1차 대불동맹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군이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자, 프랑스 정부에서는 지중해를 장악하여 영국의 인도 항로에 타격을 주기 위해 나폴레옹을 이집트로 보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전투마다 계속 승리를 하는 동안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2차 대불 동맹을 맺고 프랑스 국경까지 쳐들어왔다.

그 무렵 프랑스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총재 정부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1799년 몰래 프랑스로 들어와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을 프랑스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시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브뤼메르는 혁명력에서 ‘안개의 달’로 11월을 가리킴. 1799년 11월 9일)이다. 나폴레옹은 3인의 통령 정부를 수립한 뒤, 임기 10년의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다가 1804년 12월 2일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99.8%가 넘는 엄청난 지지를 받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17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이 1814년 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주변 열강들과 치른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이라고 부른다. 마렝고 전투(1799),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 예나 전투, 러시아 원정(1812), 라이프치히 전투(1813), 워털루 전투(1815) 등이 주 내용이다. 이러한 제반 전투를 통해서 나폴레옹은 군사전략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의 활약은 이후 서양 군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현대의 전략전술 및 무기체계가 그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나폴레옹 전쟁의 배경

나폴레옹 전쟁의 배경은 10년간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을 강타한 프랑스 혁명(1789~1799)이었다. 나폴레옹은 혁명 속에서 성장하고 그 와중에 군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종국에는 프랑스의 통치자로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봉 왕조의 실정(失政)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 불평등한 신분제에서 배태된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 그리고 중산계급의 성장과 불만 등이 상호작용해 발발했다. 국왕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과 일명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대변되는 급진적 개혁으로 프랑스 사회는 요동쳤고, 이러한 혁명의 열기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 주변의 절대왕정 국가들로 확산됐다. 곧 ‘자유·평등·박애’라는 혁명 이념의 자국(自國) 전파를 우려한 주변 강대국들이 프랑스로 쳐들어왔다. 바로 이 전쟁의 바람을 타고서 지중해 코르시카 섬 출신의 시골뜨기 청년장교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코르시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은 10대 중반에 파리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약 6년간 수학하면서 그는 기베르·부르셰 등 당대 프랑스를 대표한 군사사상가들 및 볼테르·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의 저술을 탐독했다. 1785년 포병장교로 임관 후 자기계발에 몰두하던 나폴레옹은 드디어 1795년 툴룽 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자코뱅파의 실각 후 들어선 총재정부의 신임을 받았다. 정부를 위기에서 구출한 공로로 약관 26세에 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어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1796)됐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면서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798년 또 다른 승리를 기대하며 시도한 이집트 원정에서 영국의 넬슨에게 일격을 당한 나폴레옹은 1799년 이집트를 탈출해 파리로 돌아왔다. 마침내 그해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계속된 군사적 승리를 등에 업고 전 국민적 인기를 얻은 그는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의 새로운 황제가 됐다. 1814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그는 민법전을 편찬하고 가톨릭과 관계를 개선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쓰면서, 무엇보다도 대외 군사원정에서 클라우제비츠의 평가처럼 가히 ‘군사적 천재’에 어울리는 빛나는 승리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와 신성 로마 제국 해체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805년 영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18만에 이르는 군인들을 도버 해협 근처에 집결시켰다. 이에 영국은 다시 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과 함께 제3차 대불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맞섰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군이 프랑스 동맹국인 바이에른을 먼저 공격하자, 나폴레옹은 도나우 강을 건너 울름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해전에서는 빌뇌브가 지휘하던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 함대가 트라팔가 곶(이베리아 반도 남서쪽)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와 맞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비록 재해권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은 멈추지 않고 다시 진격하였다. 오스트리아 빈을 공략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아우스테를리츠(지금의 체코 동부 슬라브코프)로 몰아넣은 뒤 중앙을 돌파하여 격파시켰다. 삼제회전(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3명의 황제가 모두 모인 전투)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 바로 나폴레옹의 대관 1주년 기념일인 12월 2일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에 개선문을 세웠다.

한편 전쟁에 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프레스부르크 조약(1805년 12월 26일)을 맺고, 많은 땅을 이탈리아와 바이에른 등에 양도하고, 프랑스에는 금화 4천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영토를 받아 독립 왕국이 되었다. 2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낸 러시아 역시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각각 영토가 확장된 바이에른(독일 남동부 전체에 이르는 큰 주)·뷔르템베르크 왕국(지금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중부와 동부)·바덴(지금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서부)·헤센다름슈타트(지금의 헤센과 라인란트팔츠 주 일부)·나사우(지금의 헤센 주 서부와 라인란트팔츠 주의 베스터발트 지방)·베르크(지금의 독일 뒤셀도르프·쾰른 주) 공국 등을 통합하여 라인 연방을 결성하였다. 이것으로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거의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문을 닫게 되었다.


                                                                        파리의 개선문

대륙 봉쇄령과 틸지트 조약

라인 연방의 성립으로 인해 나폴레옹이 중부 독일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다급해진 프로이센은 그동안 지켜만 보던 중립적인 입장을 버렸다. 프로이센은 1806년에 영국·러시아·스웨덴과 제4차 대불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프로이센이 작센과 연합하여 나폴레옹의 서부 병력이 있는 곳을 향해 진군하자, 나폴레옹의 군대는 러시아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엘베강을 차단한 후 서서히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 뒤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공략하여 크게 승리한 나폴레옹은 10월 27일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해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영국에 대해 대륙 봉쇄령(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하여 유럽 대륙과 영국의 무역을 금지하도록 한 명령)을 발표하였다. 이는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프랑스 군대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하고 도주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계속 추격하기 위해 동프로이센으로 향하였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을 지원하러 온 러시아 군과 아일라우(지금의 러시아 바그라티오노프스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2월 눈바람 속에서 치러진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처음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고전하였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나폴레옹 군대는 같은 해 6월 후퇴하는 러시아 군을 프리틀란트(지금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 마을에 몰아넣고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 동맹군인 프로이센 군은 틸지트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 결과 1807년 7월,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패한 프로이센·러시아와 틸지트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맹국이되었고, 나폴레옹을 지원한 작센은 옛 폴란드 영토의 일부를 되찾아 바르샤바 공국이 되었다. 또 북부 독일에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세워져 나폴레옹 동생 제롬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프로이센은 전쟁 배상금으로 1억 2천만 프랑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 배상금을 갚을 때까지 프랑스 군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유럽의 서부와 중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전성기를 맞는 나폴레옹

1808년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의 왕위에 올리자, 이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 마드리드에서 에스파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때 영국이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직접 군대를 끌고 에스파냐를 침공해 영국군을 몰아낸 뒤, 부하인 술트에게 그곳을 맡기고 돌아왔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저항이 완강해 프랑스는 대군을 투입하고도 패배하고 말았다(반도 전쟁). 이를 지켜보던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불 동맹을 결성하고 바이에른을 침공하였다.
나폴레옹은 에크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빈으로 입성하였다. 이때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한 오스트리아 군이 도나우 강을 건너려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공격하자, 양측은 아스펜과 에슬링에서 크게 싸웠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최초로 패배를 경험했고, 프랑스 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본국과 이탈리아 등에서 지원군이 도착해 총 15만 4천의 병력을 갖춘 나폴레옹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카를 대공이 이끄는 15만 8천 병력의 오스트리아 군이 배치되어 있는 바그람을 선제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부하인 마세나 장군을 강의 오른쪽으로 상륙시켜 카를을 끌어내는 작전을 세웠다. 예상대로 카를 대공은 마세나를 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고, 이 틈을 타 나폴레옹은 카를의 측면을 공격하는 한편, 로바우 섬에 집중 배치해 두었던 포대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1809년 7월 5일과 6일, 이틀간에 걸쳐 대격전을 벌였던 바그람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7월 11일 빈의 쇤부른 성에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8만㎢가 넘는 영토와 주민을 프랑스에 넘겨주어야 했다. 그리고 영국과의 관계도 끊기로 했다. 1810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아내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제와 결혼하였다. 이듬해 둘 사이에 나폴레옹 2세가 태어났는데, 나폴레옹 2세는 곧 로마 왕이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교황령까지 흡수하여 유럽의 제국으로서 최고 절정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원정 실패와 나폴레옹의 몰락

1810년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미 1806년에 베를린 칙령을 발표하여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을 내렸던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으로 동맹 관계를 맺은 러시아에게도 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곡물 수출국인 러시아가 이에 협조하지 않자, 두 나라의 우호 관계는 1812년에 이르러 깨어지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그해 9월 나폴레옹의 군대는 보르디노에서 러시아 군과 싸워 많은 희생자를 냈음에도, 계속 전진하여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평화 교섭을 제의했지만 무시당했다. 프랑스 군이 모스크바에 들어갔을 때 이미 시내는 텅 비어 있었고, 화재까지 일어나 거의 모든 것이 불타 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보급도 끊기고 혹한까지 겹쳐 프랑스 군은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나폴레옹은 할 수 없이 철수를 명령했는데, 후퇴하는 동안 러시아 군과 농민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추위와 배고픔은 더욱 많은 사상자를 내어 결국 살아 돌아온 병력은 겨우 1만명 정도였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소식은 1813년에 프로이센·러시아·영국·오스트리아·스웨덴이 제6차 대불 동맹을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동맹군과 나폴레옹의 군대는 작센 지방의 라이프치히에서 3일 동안 치열하게 싸웠는데, 결국 나폴레옹 군대가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독일과 폴란드 등 라인 강 동부에 남아 있는 프랑스 병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투가 바로 동맹군에 가담한 모든 나라들이 다 참여하였다 하여 ‘여러 국민들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라이프치히 전투이다. 나폴레옹이 연이어 패하자, 라인연방을 비롯한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있던 나라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에 비해, 승리한 동맹군은 이듬해 봄 파리에 입성했다. 결국 나폴레옹 1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 지중해에 있는 엘바 섬으로 귀양을 갔고, 새로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무능한 루이 18세에 대해 프랑스 시민들이 불만을 갖자, 언제든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와 복위하였다. 그때 빈 회의를 개최 중이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서둘러 제7차 대불동맹을 맺고,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다시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워털루 근방에서 영국의 웰링턴이 이끄는 부대와 프로이센의 블뤼허의 부대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에 영국군과 프로이센 군은 힘을 합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 군대는 적을 공격할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되었고,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사이에 네이 부대가 상대에게 무너졌다. 그 여파로 나폴레옹 부대는 패하고 말았다. 결국 나폴레옹의 재기를 위한 노력은 百日天下(실제로는 95일)로 끝나고,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감금되어 인생을 마감했다.

나폴레옹 정권이 무너진 뒤 유럽의 각국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복잡해진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15년 6월에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 주도로 열린 이 회의는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으로 되돌려 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나폴레옹 전쟁이 파급시킨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했고, 그리스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불러왔다. 하지만 1848년 혁명(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1830년 프랑스에서 또다시 혁명이 일어났고, 1848년에는 전 유럽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는 낡은 체제가 무너지고, 국민국가가 자리 잡기 위한 힘든 과정이었다. 이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꽃피우게 되는 계기를 불러오게 되어 Wien 체제는 무너지고 각국은 근대귝가체제에 진입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국의 산업혁명이 유럽의 경제적 근대화를 촉발했다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근대화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근대유럽이 전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고 다른 나라들도 근대유럽을 모델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통하여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유럽 전역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 보충자료 : 나폴레옹의 전략전술개념

 

1. 나폴레옹은 각종 병과간 합동전술을 중요시했다.

나폴레옹은 군대를 유기적으로 움직였고 서로 다른 병과(당시 크게 포병 보병 기병)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도록 사용했다

나폴레옹은 경보병으로 적 전선을 교란시키고 보병을 전진시켜 상대 전선을 압박하면 기병을 우회시켜 상대방 전선에 균열을 만들고 포병으로 그 균열을 크게 만들고 보병으로 균열이 일어난 전선을 종심돌파해여 전선을 찢어버린 다음 적 진영에 기병을 투입시켜 적을 격파시켰다. 세계2차대전 소련군교리를 만든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종심돌파이론도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의 군대가 공군,포병으로 쑥대밭으로 만든뒤 기갑부대를 투입시켜 전선에 구멍을 내고 기병과 보병이 뒤따라가며 돌출된 전선을 유지시키고 점령하는것처럼 나폴레옹은 시대를 앞서나가 제동합병작전의 창시자라고 할수있다.

 

2. 보급과 기동력

군대란 먹어서 움직이고 보급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보급로 확보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나폴레옹은 보급을 매우 중요시 여겨 보존식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나온게 통조림의 아버지 병조림인데 통이 아니고 병이라서 잘깨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당시에 보급이란게 군대란 조직을 아주 무겁게 만드는 물건이어서 보급을 재대로 하려면 군대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형편없는 교통시설과 보급능력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과거 기동력의 전형인 몽골군대처럼 현지조달이란 이름의 반약탈을 허용했다. 현지조달을 곁들이면서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 군대보다 1.5배 이상의 기동력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며 나폴레옹의 간판전술로 작용했다.

 

3. 전쟁을 시작하면 흩어진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대육군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기동력을 가지고있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전쟁이 나면 나폴레옹은 이 거대한 육군을 분산배치 했다. 그랑드 아르메, '대육군'이라는 이름이 어색하게 소규모 부대로 나눠서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둔채 전장으로 나갔는데 이는 적성국이 나폴레옹의 주목표가 뭔지 알수없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면서도 부대간의 연락은 계속 가능한 거리를 유지했는데 선봉부대와 후열부대의 행군거리가 일주일이상 차이 안나도록 유지를 해줬다고 한다.

 

4. 각개격파(Defeat in detai)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동원 했던 병력은 대부분 상대방보다 숫적열세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온갖 주변국가를 적성국으로 두어 상대방이 연합인 경우도 많았고 병력을 한군데로 집중하기 힘들었기에 프랑스는  많은 인구를 가지고도 막상 전쟁을 할 때면 동원가능한 병력이 상대보다 적은 경우가 너무 많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한가지 원칙을 뒀는데 그건 바로 나폴레옹의 주 목표는 항상 적 본대의 괴멸이었고 모든 부대는 그걸 알고 본대를 돌파하는데 총력을 다했다., 그 때문에 부대를 잘게 나눠 진군시키는 연막작전을 펼쳤다. 분산된 프랑스군을 본 적들은 자기들도 거점의 방어를 위해 군대를 분산배치하는데 애초에 나폴레옹의 목표는 적 본대의 전투능력 상실이고 휘하의 모든 부대는 그걸 목표로 움직인다. 적과의 거리가 좁혀지면 나눠져 움직이던 부대들은 상대방의 나눠진 부대를 붙잡아둘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둔채 나폴레옹의 본대와 합류하고 나폴레옹의 본대는 나누어진 상대방의 본대보다 병력상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상대방이 더 많지만 전투 돌입시의 병력은 나폴레옹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나눠진 병력을 돌아가며 차례차례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전술능력으로 처리하면 이미 상대방의 병력은 나폴레옹에 대항할만큼 유의미하게 남아있지 못해서 나폴레옹은 이곳저곳에서 항복서명만 받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나폴레옹 전략의 본질은 비록 적군보다 약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격할 때나 적으로부터 공격 받는 곳에는 항상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유지하는데 있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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