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의 원인

프랑스 대혁명은 구제도(앙시앙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혁명의 근본적 원인은 봉건제를 지탱하고 있는 신분제 모순이었다.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에서 제1신분은 성직자였고, 제2신분은 귀족, 나머지가 제3신분이었다.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이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였다. 그런데 그들이 토지의 54%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특권층은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평등을 제도화시키고 합리화시켜준 것이 바로 신분제였다. 따라서 신분제를 폐지하지 않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신분(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부터의 과도한 전쟁, 토목건축공사 등 왕실의 무리한 지출로 인해 프랑스 재정은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신생 미국 독립참전으로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매꾸려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 졌고, 루이 16세에 이르러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복잡, 다양하였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이자 현재 프랑스 국경일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루이 16세와 그의 국민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었던 불화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기운은 1700년대 들어서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이상을 중심으로 사회 정치적인 비약적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루소의 계몽주의 운동은 18세기 프랑스 문인, 과학자, 사상가들이 지지하면서 유럽의 엘리트 계층을 사로잡았다. 자유주의 사상이 엘리트 계층과 시민들을 사로잡으면서 절대왕정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되었고, 결국 1789년 6월 20일 제 3계급 대표자들이 프랑스 헌법 제정에 관해 서약하기에 이른다. 즉, 대혁명은 계몽사상의 영향과 여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원인들이 작용하여 일어났다.


 중세와 특권 계급에 눌린 제3신분 계층을 풍자한 그림

重稅와 특권계급에 눌린 제3신분 계층을 풍자한 그림


첫 번째 원인은 프랑스가 봉건제 사회였다는 점이다. 이미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는 여전히 영주의 각종 지대와 시설 독점권, 하급 재판권 등 봉건제적 잔재가 남아 농민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두 번째 원인은 프랑스가 특권적 신분 사회였다는 점이다.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세 개의 신분으로 구분된 신분제 사회였다.제1신분에 속한 성직자들은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분의 1 가량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십일세를 징수하였고 교육과 구빈사업, 출판물의 검열에 의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제2신분에는 혈통 귀족인 대검 귀족(帶劍貴族)과 관직 매입으로 귀족이 된 법복 귀족(法服貴族)이 있었다. 귀족들 역시 전국의 5분의 1의 해당하는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전통적으로 직업을 가지거나 상업행위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르주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특히 지방의 하층귀족들은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경제적 몰락에 더해 18세기 말에 경제 침체가 악화되자 귀족들은 이른바 '봉건적 반동'을 일으켰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성직자와 귀족으로 구분되긴 했지만 그들 모두 사회의 특권계급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였다. 그들이 누리는 특권 중에 가장 큰 것은 면세 특권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매우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토지에 대해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1, 2신분에 속한다고 모두 상류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제1신분 내의 하위 성직자의 지위는 제3신분과 다를 바 없었으며, 제2신분 내의 시골 귀족들 역시 부르주아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96퍼센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제3신분이었다. 혁명 직전의 베스트셀러였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이예스가 "제3신분이란 바로 국민 전체이다."라고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제3신분에는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제3신분의 핵심을 구성하는 계층은 부르주아들이었다. 부르주아에는 대금융업자와 상공업자로 구성된 상층 부르주아, 자유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된 중간 부르주아, 소수공업자와 소상인으로 구성된 하층 부르주아들이 있었다. 이중 자유주의적 개혁정신으로 무장하고 혁명을 주도한 계층은 중간 부르주아들이었고, 이들이 제3신분의 핵심이긴 했지만 숫자상으로 제3신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계층은 농민들이었다. 농민에는 부농과 소작농, 절반 소작농, 농업노동자, 소토지 보유농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 중 몇몇 부농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18세기 봉건적 반동과 경제적 악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처럼 제3신분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들 모두 특권에서 제외된 비특권계급이었다. 이러한 비특권계급으로서의 동질감이 혁명 이후 그들을 하나로 묶는 근거였다. 그들 모두는 특권에 저항해 신분 없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에 가담했다.

 

대혁명의 세 번째 원인은 절대 군주제였다. 프랑스는 유럽의 대표적인 절대군주제 국가였다. 루이 14세가 확립한 절대군주제의 제도적 기반은 관료제와 상비군이었고, 사상적 기반은 왕권신수설이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우선 관료제와 상비군의 유지에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재정을 악화시킨 주요한 원인이었다. 18세기의 프랑스 정치사는 이런 재정 적자를 해결하려는 국왕과 그것에 저항하는 고등법원의 갈등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국왕은 이 문제를 삼부회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바로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이었다. 절대군주제는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국왕의 절대적 권력을 강조했는데, 이것 역시 영국식의 의회민주주의를 바라고 있던 부르주아들에게는 불만이었다. 그들이 혁명을 성공시키고 가장 먼저 취한 조치 중의 하나는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것이었다.

 

대혁명의 네 번째 원인은 이 모든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부르주아들의 역동성이었다. 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가 봉건적인 특권 사회였고 절대군주제 사회였지만 결코 정체된 사회는 아니었다. 프랑스 경제는 18세기 내내, 최소한 1770년 전까지는 번영을 누렸다.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농업 생산량도 완만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상업과 공업도 번성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을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계층이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들은 상공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경제번영의 혜택이 누구에게나 골고루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부르주아에 비해 빈곤해졌고 하층민들 역시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다. 번영의 결실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을 때 사회에 불만이 쌓이고, 그러한 불만은 때를 기다려 대혁명으로 폭발한다.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경제적 불평등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첨예해졌다. 번영의 수혜자인 재정가와 제조업자, 선주, 무역상, 토지 임대업자 등과 그 피해자인 도시와 농촌의 하층민들 사이의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진 것이다. 그러자 사회에 퍼진 불만이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혁명 직전 파리에는 거의 매일 빵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골에서도 역시 조세에 반대하는 농민 폭동이 발생했다. 귀족들이 경제적 침체로 인한 손해를 봉건적 반동을 통해 만회하려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들의 봉건적 반동은 농민과 부르주아 모두를 자극했다. 귀족들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봉건적 제 권리들을 들추어내어 농민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농민의 불만이 증가했고 이것은 혁명 이후 '대공포'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부르주아에 대항해 전통적인 특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1781년에 군대법을 개정하여 혈통 귀족만으로 장교를 충원하게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봉건적 반동은 지대를 더 내야하는 농민들의 불만을 샀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의해 신분 상승을 원하고 있던 부르주아들의 비난도 샀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에 어울릴만한 정치적 권력을 원했지만 귀족들의 봉건적 반동 때문에 그 길이 점점 좁아졌다. 한 사회의 역동적이고 활력적인, 그러면서도 그 사회의 모순을 체험한 부르주아들에 의해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일으킨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17세기 이래 궁정의 골칫거리였던 재정 문제였다.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제와 궁정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지속적인 해외 전쟁, 불균등한 조세 제도, 이 모든 것들이 원인이 되어 혁명 직전 궁정의 재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다. 재정 장관들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공채 발행에 의지하곤 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공채 발행에는 고율의 이자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불균등한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면세자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빈번이 특권 신분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칼론느는 더 이상 조세 개혁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모든 토지 소유자들이 현물로 세금을 내도록 하는 토지세 신설을 제안했지만 실패하였다. 토지세 안은 그의 후임 브리엔에 의해 계속 추진되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명사회와 고등법원은 토지세의 신설을 반대하였다. 결국 토지세 신설을 위해서는 삼부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결국 1789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귀족 300명, 성직자 300명, 평민 6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하였다.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코트의 선언을 하고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왕이 이러한 시민들의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7월 14일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쟝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사회 개혁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8월 4일에 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26일에는 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흔히들 인권선언의 요체를 자유와 평등, 박애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유와 평등, 소유권)이다.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선언문에도 박애는 거론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유권을 “신성하고 거룩한 권리”라고 강조하였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자, 부인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은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행진하여 왕을 파리로 압송해 왔다. 1791년에는 제한 선거와 입헌군주제를 골자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10월에 입법의회가 구성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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