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國海軍의 自尊心 Horatio Nelson 子爵

Viscount Horatio Nelson(넬슨 子爵, 1758년 9월 29일, 영국 노퍽 버넘소프 ~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트라팔가르곶)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는 일본이 자랑하는 해군 제독으로 러일전쟁(1904~1905) 때 쓰시마해전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쳐 일본에 결정적인 승리의 전기를 만든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동양의 넬슨’으로 불리며 일본에서는 군신으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런데 도고 제독은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설에 의하면 도고 제독이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전세계 해군의 주목을 받던 당시, 임관을 앞둔 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일본을 방문해 도고 제독을 접견했을 때 도고는 존경심에 가득 찬 학생들에게 “나의 업적을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는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순신에게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세계 해군사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은 아무래도 영국의 넬슨 제독일 것이다. 그래서 도고 제독 역시 ‘동양의 넬슨’으로 불렸으며,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존경하는 바를 알지만,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소개할 때도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친 한국의 넬슨 제독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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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레이시오 넬슨 자작(Viscount Horatio Nelson)

 

초기생애

호레이쇼 넬슨은 교구목사였던 에드먼드 넬슨과 그의 아내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11명 가운데 여섯째 아이였다. 그의 집안은 품위와 학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가난했다. 이 가문에서 넬슨이 그의 입신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할 만한 주요 인맥은 먼 친척이자 18세기초 총리를 지낸 로버트 월폴 경의 후손인 월폴 경이었다. 그러나 넬슨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나중에 영국 해군 회계검사관을 지낸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 대령이었다. 넬슨의 어머니가 죽자 서클링 대령은 어린 넬슨을 바다로 데려가기로 작정했다. 해군에 입대하고 처음 몇 해 동안 그는 템스 강 어귀에서 지낸 평범한 해군생활부터 상선(商船)을 타고 서인도제도를 항해한 일, 1773년 실패로 끝난 위험했던 북극탐사 등 아찔한 모험을 고루 겪었다.

그는 첫번째 전투를 인도양에서 치렀는데 얼마 후 말라리아 인 듯한 열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와 병약자가 되었으며, 그결과로 인한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는 낙천주의적 생각이 파도처럼 마음 속에서 우러나옴을 경험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교도의 깊은 사랑으로 강화된 애국심이 솟아나 그의 포부와 대망이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적어도 자기가 명망있는 친척 월폴 경과 동등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1777년 대위 시험에 합격해 미국독립전쟁 당시 식민지 미국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서인도제도로 항해했다. 1779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함장으로 승진하고 프리깃 함의 지휘를 맡아 니카라과에 있는 스페인 정착민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 정착민들은 스페인이 프랑스와 더불어 미국 독립군과 연합한 뒤부터 영국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산후안 공격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은 황열병으로 영국군이 거의 전멸한 큰 재난이었다. 넬슨은 운좋게 살아남았다. 미국독립전쟁이 끝난 후 1783년 넬슨은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다.

1784년 런던에 돌아와 곧 서인도제도로 가는 프리깃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기뻐했으나 이것은 즐거운 임무가 아니었다. 이미 공식적으로 상실해버린 영국의 특권을 누리며 아직도 교역을 하고 있던 미국의 선박에 대해 넬슨은 항해조례를 엄하게 시행했으므로, 그는 상인과 선박소유주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항해조례를 적용하지 않았던 그곳 주재 영국 당국과도 적이 되었다. 이런 어려움과 지휘자로서 겪는 고독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고 가장 유혹받기 쉬운 상태에서 넬슨은 1785년 3월 네비스 섬에 들렀다. 이곳에서 5세 된 아들 조시아를 둔 미망인 프랜시스 니즈벳을 만나 정식으로 결혼신청을 했으며, 마침내 1787년 3월 네비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를 데리고 고향인 버넘소프로 돌아왔으나 다른 자리에 임명받지 못했고, 봉급은 반으로 줄었다. 그는 5년 동안 실직상태로 있었으며 "그 이유는 추측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으나 분명히 해군본부가 나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항해조례를 준수하도록 강조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93년 1월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처형된 며칠 후 그는 64문의 포를 갖춘 '아가멤논호'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지중해 복무

이때부터 넬슨은 열성적인 직업군인에서 차츰 천재적인 지휘관으로 변해갔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정신적으로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집에서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들을 데리고 항해하기도 했다. 배는 빠르고 기동력이 있었으며,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어 그의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혁명전쟁에서 그의 임무는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고, 지중해에 있는 영국의 동맹국들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24세의 포병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있었던 혁명군에 대항해 홀로 툴롱 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다가 증원군을 모으기 위해 나폴리로 파견되었다. 뒷날 그는 자기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것은 대부분 유능하고 식견이 높은 영국 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경 덕분이었다고 고마워했는데 해밀턴 경은 30년 동안 나폴리에 살았으며 쾌활하고, 젊은 그의 아내 에마는 나폴리 왕비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툴롱이 함락되자, 넬슨의 사령관 후드 경은 코르시카로 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넬슨과 부하들은 육지로 올라가 바스티아와 칼비를 함락시키는 일을 도왔다. 이때 프랑스군이 쏜 포탄의 파편으로 오른쪽 눈을 다쳐 거의 실명상태가 되었다. 1794년말 후드 경의 후임으로 따분한 성격의 윌리엄 하섬 제독이 부임했으나 곧 존 저비스 경으로 바뀌었고, 넬슨은 이 사람이 더 마음에 들었다. 60세이던 저비스 제독은 많은 경험을 쌓은 군인으로 넬슨의 자질을 알아보고는 그를 '부하장교라기보다는 동료'로 여겼다. 저비스가 부임할 때쯤 육지에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영국군은 하는 수 없이 지중해 기지를 버리고 지브롤터와 타호 강으로 후퇴했다.

 

나폴레옹의 동방 진출을 좌절시킨 상비센테 곶 전투와 나일 강 전투

1793년 2월 1일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하자(프랑스혁명전쟁, 1792~1801), 넬슨은 그해 5월 지중해 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아가멤논호를 타고 후드 경의 함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여한다. 넬슨은 1794년 코르시카 전투에서 칼비에 상륙해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 영국군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넬슨은 적의 포격으로 튀어오른 돌 파편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상실하는 큰 부상을 입는다. 또 곧 이어 치른 이탈리아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에 참패를 당하는데, 이때 넬슨은 상당한 좌절감을 맛본다.

1796년 1월 지중해 함대의 새 지휘관이 된 저비스 경(Sir John Jervis)은 넬슨을 소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해 독자적으로 프랑스 해안의 해상 봉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작전에 따라 프랑스와 스페인을 효과적으로 압박해가던 넬슨에게 1797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바로 그해 2월 그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인 포르투갈의 상비센테곶 해전에서 스페인함대를 무찌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저비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한 이 해전에서 영국군은 호세 데 코르도바 제독이 이끄는 27척의 스페인함대를 무찌르고 압승을 거둔다. 혁혁한 공을 세운 넬슨은 배스 기사단(Order of the Bath)의 일원으로 기사 서훈을 받고, 얼마 후 해군 소장으로 승진한다. 그 해 5월 테세우스호의 함장이 된 넬슨은 카디스 연안에 대기하면서 스페인 함대의 동태를 살피는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오는 스페인 보물선을 기다리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런데 이 임무 중에 넬슨은 한 보물선이 정박하고 있다고 알려진 산타쿠르스 데 테네리페(Santa Cruz de Tenerife)를 직접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넬슨은 격렬한 교전 속에 상륙작전을 지휘하던 중 그 자신도 상륙 보트에서 내리다가 오른쪽 팔에 적탄을 맞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만다. 본선으로 돌아간 그는 부축하려는 부하들을 뿌리치면서 “나에게는 아직 온전한 다리와 왼팔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상이 워낙 심해 어쩔 수 없이 군의관이 그의 오른팔을 절단했는데 수술 후 30분 만에 붕대를 감은 채로 다시 지휘석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그런 투지를 보였는데도 결국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만다. 전투 후 넬슨은 총사령관 저비스에게 쓸모없는 외팔이가 된 자기 대신 새로운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서 깊은 낙심에 사로잡힌다. 1797년 9월 영국으로 돌아온 넬슨에게 국민들은 영웅의 귀환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상비센테곶 전투에서의 공적과 테네리페에서 당한 부상 사건이 영국 국민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테네리페 전투에서의 패배마저 넬슨의 잘못이 아닌 다른 상급 지휘관들의 잘못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환영 속에 넬슨은 응급수술로 절단한 상처의 후속 치료를 받으면서 그해를 보낸다.

 

1798년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된 넬슨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바다에 나갈 기회를 찾는다. 마침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지중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정보가 포착되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남부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어떤 목적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드디어 1798년 3월 넬슨은 프랑스군의 동태를 감시할 목적으로 대포 74문의 방가드호를 타고 지브롤터해협에 파견된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줄곧 나폴레옹군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넬슨은 결국 프랑스함대의 최종 목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멀리 인도까지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야심 찬 군사 활동에 나선 것이었다.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만에서 벌어진 나일해전에서 넬슨의 영국군은 나일 강 어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프랑스군 소함대를 따라잡게 되었고 새벽녘에 프랑스군 소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도망가듯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성기에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무참히 좌절시켰기 때문에 이 전투는 이로부터 7년 후에 벌어진 트라팔가르해전보다 세계사적으로 더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나일전투의 승리는 영국 국민이 또 한 번 넬슨에게 열광하는 계기가 되었고 넬슨에게는 ‘나일의 넬슨 남작(Baron Nelson of the Nile)’이라는 작위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작위는 그의 상급자인 저비스가 백작이 된 것에 비추어보면 매우 약소한 것이어서 넬슨 자신도 차라리 아무런 작위를 받지 않는 것이 더 명예스러울 것이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이 아닌 경우 남작 이상의 작위를 내리지 않는다는 선례를 따르려는 영국 정부의 방침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넬슨과 에마의 연애사건

1798년 9월 넬슨은 함대의 근거지 중 한 곳인 나폴리로 간다. 당시 독립국가였던 나폴리왕국에서 넬슨은 그곳 페르디낭도 국왕과 함께 나온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해밀턴(Willaim Hamilton)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후 두고두고 그의 명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해밀턴의 아내 에마와 불륜에 빠진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에마와 나이 차이가 34세나 나는 해밀턴이 어느 정도 묵인했한 관계로 넬슨은 해밀턴의 집에서 에마와 동거하다시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즈음 나폴리는 프랑스혁명 정부군에 반해 전투를 벌인다. 전투 초기에는 당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로마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나, 곧 프랑스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해 오히려 나폴리까지 내준다. 이때 넬슨은 왕과 지도부 그리고 영국 시민들을 팔레르모까지 후퇴시키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해 결국 나폴리를 탈환한 넬슨은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단원(Jacobin: 프랑스 혁명의 과격 공화주의자)들과 나폴리 내 배신자들을 어떤 관용도 없이 처형한다. 이때 그의 가혹한 처사는 에마와의 염문과 함께 그의 오점으로 남는다. 그러던 차에 저비스의 후임으로 그의 상관이 된 키스(Lord Keith) 제독에 대한 명령 불복종 사건이 문제가 된다. 사실 넬슨은 그전부터 상관에게 잘 복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마와의 관계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1799년 여름 그의 함대는 페르디난도를 도와 나폴리를 되찾게 했다. 그러나 염문이 해군본부에 전해지자 그의 상관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프랑스로 갔으며, 세인트빈센트 백작 대신 총사령관이 된 키스 경이 프랑스군의 다음 목적지는 메노르카라고 판단했을 때도 프랑스는 계속 몰타를 장악하고 있었다. 넬슨은 동원가능한 모든 함선을 거느리고 메노르카 섬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나폴리가 위협받게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과는 그의 말이 옳았음을 보여주었으나 그 넉살좋은 불복종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페르디난도 왕이 내린 시칠리아의 브론테 공작위를 받아들인 넬슨에 화가 난 해군본부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냉엄한 명령을 내렸다. 넬슨에 대한 키스의 부정적인 보고서와 불륜 사건에 대한 소문을 접한 영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본국으로 소환한다. 넬슨은 어쩔 수 없이 에마와 해밀턴 경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에서도 해밀턴 부부와 넬슨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는 영국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넬슨은 결국 1800년 본처 패니의 마지막 간청도 무시한 채 그녀와 관계를 청산하기로 한다. 1800년 그는 해밀턴 가족과 함께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돌아왔다. 이 묘한 여행자 일행이 영국에 상륙했을 때, 넬슨이 나라의 영웅이라는 것과 그의 런던 행차는 개선행진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내와 차갑게 재결합하여 약 한 달 동안 같이 살다가 풍자만화가들이 숨김없이 표현한 것처럼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정한 아내에게로 돌아갔다. 영국 대중에게는 우상이 되었으나 런던 사교계에선 웃음거리와 추문의 대상이 되었으며 왕도 여러 사람 앞에서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에마는 넬슨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는 죄책감과 기쁨이 뒤섞인 가운데 발틱 해로 원정을 떠나는 나이 지긋한 해군제독 하이드 파커 경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출항하기 얼마 전에 넬슨은 에마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아버지임을 숨기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에마는 넬슨의 명예를 위해서 해밀턴 경과 이혼은 하지 않았고 1801년 넬슨과의 사이에 딸을 낳는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기쁨에 못지않게 그는 에마가 영국 왕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며 미칠 듯한 질투에 사로잡혔다.

 

나폴리 봉쇄후의 코펜하겐 전투

1801년 4월 넬슨은 코펜하겐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덴마크와 스웨덴, 러시아, 프로이센 등은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오랜 봉쇄 작전으로 자국의 무역에 큰 타격을 입자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연합군을 형성해 영국 해군의 봉쇄를 풀려고 시도한다. 이에 넬슨은 덴마크 해안을 차단해 발틱해에서 연합군의 움직임을 통제하자는 총사령관 하이드 파커(Hyde Parker)의 의견에 반대하고, 직접 코펜하겐을 기습 공격하자는 전략을 내고 파커를 설득해 실천에 옮긴다. 전투 중에 덴마크의 반격이 예상보다 강하자 파커는 넬슨의 함대에 철수할 것을 함상 깃발로 지시한다. 그러나 넬슨은 기함을 지휘하는 폴리 함장을 돌아보며,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라며 망원경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대고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명령을 따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격해 결국 전투를 승리에 가까운 협상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넬슨은 험한 해협을 흘수가 얕은 배로 통과한다는 전략으로 코펜하겐으로 가는 북부 진입로를 뒤덮고 있던 해안 포대를 피해갔다. 다음날인 4월 2일 아침 함대를 이끌고 교전에 돌입했다. 뛰어난 전술도 소용없는, 오직 더 우세한 포격만이 승패를 판가름할 상황이었다. 덴마크군의 용감한 저항으로, 파커는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전투손실을 우려하여 전투중지신호를 올렸다. 넬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 한 시간 후에 승리를 차지했다. 덴마크는 해전의 패배로 해상 제국의 지위에서 몰락했다. 넬슨은 파커의 뒤를 이어 드디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인기를 잘 알고 있던 해군본부는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그에게 국내 지휘권을 주었다. 프랑스가 침략해오지 못하도록 곧바로 불로뉴 해군기지를 공격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운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 전투는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다시 공격하려던 계획은 프랑스와의 평화협상 때문에 포기했으며, 1802년 3월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었다. 마침내 그는 승리의 결과를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넬슨의 지시에 따라 에마는 런던 근처에 머턴 저택이라는 우아한 시골별장을 사서 그들의 호사를 위해 호화찬란하게 개조했다. 마침내 그녀의 남편이 분개했으나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해밀턴 경은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는 듯했으며 1803년초 아내와 그녀의 연인 넬슨 곁에서 눈을 감았다. 그해 5월 그는 발트해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영국 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넬슨에게 영국 해협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긴장 관계는 1801년 10월 22일 체결된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으로 일시적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넬슨도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으로 돌아가 휴식을 가진다. 그러나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은 오래 가지 않았고, 1803년 마침내 나폴레옹전쟁(1803~1815)이 발발해 넬슨은 곧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지중해 총사령관의 임무를 맡았으며, 그가 전쟁터로 갈 때 에마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출산 도중 사산한다.  1803년 HMS 빅토리(HMS Victory)호를 받아 프랑스 툴롱(Toulon) 항 봉쇄에 참가하였다. 이후 그는 2년간 육지에 발을 디딜 새가 없었다. 1804년 4월 23일, 넬슨은 바다에 머물며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랐다. 1805년 초 프랑스 함대는 툴롱 항구를 출발하여 서인도로 향하였다. 이 함대의 추적에 실패한데다 건강이 악화된 넬슨은 영국 머튼(Merton)으로 퇴역하였지만 2개월도 안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Nelson 제독의 기함 Victory 호

 

트라팔가해전으로 신화가 되다

1805년 9월 넬슨은 영국에 온 지 2개월도 안 되어 다시 출정에 나선다. 이번에는 스페인의 카디스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1805년 9월 13일 넬슨은 스페인 카디스(Cadiz) 근방에서 연합하려는 스페인과 프랑스 함대를 방해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1805년 10월 21일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규모 군대를 모아 다시 한 번 영국에 대한 침공에 나섰다. 영국 해협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하기에는 해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유럽 각지에서 배를 끌어모았다. 33척의 프랑스와 스페인 무적함대의 연합함대는 피에르 샤를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의 지휘하에 카디스 항을 출발하였고, 넬슨은 27척의 배를 끌고 이에 맞섰다., 두 함대는 결국 전투에 들어가고, 넬슨은 자신의 빅토리 호 후미 돛대에 '영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당초 넬슨은 '영국은' 대신에 '넬슨은'을, '기대한다(expects)' 대신에 '믿는다(confides)'를 쓰고자 하였지만 문구의 영향력을 고려한 신호 담당의 제안으로 변경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기함 뷔상토르(Bucentaure) 호에 심각한 손상을 안긴 빅토리 호는 르두타블(Redoutable) 호로 돌진하여 뒤엉켰고, 르두타블 호의 전투실 상부에 있던 프랑스 저격수들은 빅토리 호의 갑판을 훤히 내려다보며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쏜 탄환은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하여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혔다. 넬슨은 이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4시간 동안 의식을 잃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였고,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것을 확인하고 전사하였다. 넬슨에게 죽음을 안긴 탄환은 그의 몸에서 제거되어 현재 윈저 성(Windsor Castle)에 전시되어 있다. 넬슨은 프랑스의 툴롱 항 봉쇄 작전에 참가하는데, 작전 중인 1804년 5월에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으로 승진한다. 1805년 1월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툴롱 항구를 출발해 서인도제도로 향하자 넬슨 함대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으나 수개월간에 걸친 추적에 실패해 1805년 7월 말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온다. 넬슨은 실패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려 했으나 영국 국민들은 오히려 그를 프랑스군으로부터 서인도제도를 지켜낸 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해주었다.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빌뇌브 제독의 지휘 아래 모두 33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이 연합 함대를 이용해 영국 침공 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국군과의 교전을 머뭇거리는 빌뇌브 제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지휘관 교체를 결심하는데, 이 와중에 10월 20일 넬슨 함대의 척후선이 연합 함대가 출항하는 것을 포착한다. 그리고 다음 날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인 트라팔가르해전을 치른다. 넬슨의 함대는 상대방보다 적은 27척이었다. 교전에 앞서 넬슨은 유서를 미리 쓴 뒤 부하들을 격려하며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한다. 함대 간의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된다. 넬슨이 탄 빅토리호는 프랑스군의 기함 뷔상토르호와 교전하다 옆에 있던 프랑스군 르두타블호 등 두 척의 적함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바로 이때 르두타블호의 저격수가 불과 15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넬슨을 겨냥해 결국 총알이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해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힌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넬슨은 갑판 아래로 실려가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전투를 지휘하려고 노력했지만 곧 죽을 것을 예감하고 부하들에게 에마와 딸 그리고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넬슨은 전투의 승리가 확실시된다는 보고를 받고 힘들게 낮은 목소리로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고 말한다. 기함 함장 토머스 하디가 그의 이마에 작별 키스를 하자, 넬슨은 마지막으로 "이제 저는 만족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 총상을 입은 지 3시간 만에 사망한다. 넬슨의 유해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술로 채워진 관에 보존해 런던으로 옮겨진다. 국왕 조지 3세는 그의 사망 소식에 “우리가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애도했으며, 『더 타임스(The Times)』는 전투 결과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논평했다. 그리고 에마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혼절한다. 또 그녀는 성대하게 거행된 넬슨의 장례식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다. 이는 넬슨의 혼외정사 상대였던 그녀에 대한 영국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이후에도 내내 영국 정부의 홀대를 받는다. 에마는 결국 재정난으로 빚더미에 허덕이다 1815년 쓸쓸히 숨을 거둔다. 넬슨에게 수여된 보상금과 명예 작위가 모두 그의 법적인 가족인 동생에게 대신 내려졌다. 넬슨은 지금까지 영국 국민에게 영웅으로 남아 있다. 비록 일부 비판가들이 에마와의 관계와 나폴리에서의 반정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그의 성격 등을 간혹 구설수에 올렸지만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일례로 2002년 BBC에서 조사한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100 (Greatest Britons)’ 설문에서 넬슨은 9위에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스페인의 연합 함대에 맞서 싸운 트라팔가르해전에서의 장렬한 전사가 아직도 영국인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 영국은 잉글랜드 성공회 대성당인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장엄한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그 곳에 안장했으며, 넬슨은 왕족이 아니면서 국장의 예우를 받은 5인(웰링턴 공작과 윈스턴 처칠 경 포함)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수많은 기념비·거리·호텔 이름으로 기록되고 그의 그림·판화·흉상·액자가 만들어졌으며 마침내 빅토리호가 포츠머스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에마 해밀턴과 그의 딸은 세상에서 잊혀져, 에마는 9년 후 칼레에서 가난한 생활 속에서 죽었으며, 아버지의 쾌활한 성격을 닮은 호레이샤는 노퍽에서 성직자와 결혼하여 든든한 대가족의 어머니가 되었다. 넬슨은 마침내 창의성이 결여된 전세기(前世紀)의 전략 및 전술의 원리를 깨고 각급 장교들에게 독창적으로 사고하도록 가르쳤다. 또한 그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관행으로서 부하들을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넬슨은 그의 부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능력으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그러한 능력은 '넬슨 터치(The Nelson Touch)'라는 별명이 붙었다. 생존시에도 그러하였지만 넬슨은 사후 영국사상 그 누구보다 빛나는 영웅으로 기록되어있다. 대부분의 군사역사가들은 전투 전의 치밀한 계획, 전투 중도에서도 유연했던 부대 이동뿐 아니라 고위 장교들부터 최하급 수병들에 이르기까지 고무할 수 있었던 그의 능력이야말로 그의 승리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믿는다. 그는 군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전 사령관 중 한 명이며, 특히 바다에서는 최고라고 칭해지는 인물이다. 넬슨은 바다에서만 사랑받은 것이 아니라, 엠마 해밀턴 스캔들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영국인들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넬슨의 피, 럼주

넬슨의 죽음과 관련해 술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바로 럼(Rum)이라는 술과 관련된 이야기다. 넬슨이 사망하자 당장 급한 일은 그의 유해를 성대한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는 영국까지 부패하지 않게 운반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냉장 보관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긴 항해 기간 동안 유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럼주를 관 속에 가뜩 채웠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해 뚜껑을 열어보니 관 속에 채워둔 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진상을 파악하니 항해 도중 부하 선원들이 몰래 관에 작은 구멍을 내고 술을 빼 마셨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넬슨의 용기와 전투 능력, 그의 풍모에 더할 수 없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부하들이 그의 혼이 담긴 술을 마심으로써 그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 했던 마음에 그런 것이다. 선원들은 관 속의 술을 ‘넬슨의 피(Nelson’s blood)’라고 불렀으며, 이후 영국 해군 장병들에게 배급되는 럼주는 넬슨의 피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다. 정확한 기록에 의하면 그때 관 속에 채운 술은 럼주가 아니라 프랑스산 브랜디였으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장뇌(camphor)와 몰약(myrrh)도 함께 넣었기 때문에 마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사실의 진위 여부 대신 당시 적국이던 프랑스의 술이 아니라 영국 해군을 상징하는 무엇인가를 넬슨의 죽음과 연결해 생각하고 싶던 영국인에게 럼만큼 어울리는 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럼주는 우리에게도 친숙해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애주가들에게는 캡틴 큐라는 술로 익숙하다. 캡틴 큐는 1980년대 초 롯데주조(지금의 롯데칠성음료)에서 만든 것으로 기타재제주(其他再製酒)에 속하는 술이었다. 기타재제주는 1990년 주세법 개정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위스키·브랜디·럼·보드카 등의 원액에 값싼 알코올을 섞어 만든 싸구려 술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일반 국민이 원액 함량 100퍼센트인 진짜 양주를 접할 수 없었다. 더구나 원액 함량이 제품 전체 알코올의 20퍼센트 이상이면 정식 증류주로 분류되어 주세가 높아졌기 때문에, 원액 함량이 20퍼센트 이하인 기타재제주가 만들어졌고 캡틴 큐는 이의 대표 주자였다. 캡틴 큐는 1년산 럼이 조금 들어갔을 뿐의 하급 제품이었지만 카리브해와 해적에 대한 막연한 동경, 외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어울러져 대학생층을 중심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카리브해의 애꾸눈 선장으로 상징되던 캡틴 큐의 남성적 기본 이미지는 당시 하나의 청년문화였다. 세월이 흘러 캡틴 큐의 인기는 사라졌지만 생산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가짜 양주의 주된 재료로 쓰이는 술로 매스컴에 종종 소개될 뿐이다.

 

사실 럼이 카리브해와 인연을 맺은 사연은 그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의 여정을 따라 먼 길을 우회해야 한다. 파푸아뉴기니가 원산지인 사탕수수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지리적 경로를 따라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경유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소개되었다. 신대륙에서 기대했던 것만큼 금을 발견하지 못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사탕수수 농장에서 설탕을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인 즙으로 럼을 만들어 돈을 더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흑인 노예들이 필요하게 되어 노예무역이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탕수수가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에 따라 자연스럽게 천혜의 경작 조건을 가진 카리브해 연안에 전파된 것이다. 럼이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당즙(molasses)을 그냥 두면 자연적으로 발효되는 것을 감안하면 흑인 노예들을 부려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할 때 우연히 만들어졌을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럼이 해적과 깊이 연결된 것은 영국의 해적왕 드레이크와 같은 16~17세기에 성행했던 사략선(privateers) 제도와 관련이 있다. 사략선이란 승무원은 민간인이지만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무장선박이었는데 당시 부족한 해군력을 보충하기 위해 유럽에서 성행하던 제도였다. 특히 카리브해 연안에서는 영국과 스페인이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이면서 유사시 교전국의 배를 약탈해도 좋다는 국왕의 사략 특허장을 무기로 이들 사략선에 의한 해적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당시 카리브해 일대에는 스페인의 영토가 많았으므로 스페인 선박들이 주된 약탈 대상이 었는데, 기동력이 좋은 영국계 해적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해적이 즐겨 마시던 술이 바로 럼이었다. 해적과 럼에 연관된 이야기는 스티븐슨의 『보물섬』에도 잘 나와 있다. 정규 영국 해군이 럼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655년 영국군이 자메이카를 점령하면서 럼의 대량 공급이 가능해지자, 승무원에게 그때까지 지급되던 브랜디 대신 럼을 지급하면서부터다. 결국 넬슨 제독과 럼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국 해군의 럼 지급 전통은 1970년 7월 31일 제도가 폐지되기까지 무려 300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지금은 황실의 결혼식 등 특별한 국가 행사가 있을 때 과거의 전통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해군에 럼주를 지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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