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鄕平八郞(도고 헤이하치로) 提督과 쓰시마 海戰


帝國日本 海軍元帥 東郷平八郎(도고 헤이하치로 1848년 1월 27일 ~ 1934년 5월 30일)

 

일본의 군신, 동양의 넬슨으로 불리는 도고 헤이하치로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러일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이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는 포문을 연 인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1848년 1월 27일 사쓰마 번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무술을 좋아하는 사고뭉치로 동네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사이고 기치지로에게서 사서오경과 한문을 배우고, 무사 집안의 자제로서 검약과 절제, 절의, 무사의 행동거지에 대해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도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계에 진출한 많은 번사, 무사와 달리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순수하게 군인으로만 지내다 일생을 마쳤으며, '과묵한 군인'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이런 성정은 어린 시절 기치지로에게서 받은 교육 덕분으로 여겨진다. 도고가 태어났을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 항 등의 몇몇 항구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쇄국정책을 택하고 있었다. 도고가 다섯 살 무렵인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에도 만에 흑선 4척을 이끌고 나타나면서 일본은 급속도로 시대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작은 번의 사무라이에 불과했던 그에게 일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사건은 15세 때 영국 함대의 막강함을 목격한 것이다. 에도 막부시대 사무라이는 검의 휴대와 사용이 승인되었던 특권계층이었는데, 에도 말기에 들어서면 검술 연습이라거나 무례하다는 이유로 선량한 시민들을 검으로 베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시민이 사무라이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1862년, 사쓰마 번에서 한 사무라이가 영주가 지나가는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국 상인 하나를 칼로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 공관은 사쓰마에 사무라이의 처벌을 요청했으나 영주는 그동안의 논리로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연안으로 들어왔고, 도고는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과 함께 항구 방어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6시간 만에 사쓰마 군은 완전히 패배하고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당시 외국 함대의 위력을 맛본 다른 젊은 사무라이들이 그랬듯 도고 역시 "앞으로 있을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라고 깨달았다.

 

18세 무렵 도고는 사쓰마 함대에 입대하고, 1871년에는 일본제국해군의 사관생도가 되었다. 여기에는 사쓰마 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영향이 있었다. 처음 도쿄에 상경했을 때 도고는 철도에 대해 공부하려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찾아가 사절단의 일원에 합류시켜 달라고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얼마 후 도고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해군에 대해 공부할 것을 권유받았다. 사관생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영국 해군에 배치되었고, 워체스터 호에 승선하여 7년간 복무했다.

 

1878년 도고는 영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그가 목도한 것은 '부유한 나라, 강력한 군대'라는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일본이 산업, 군사, 정치 전 분야에서 급속도로 근대화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해군 중위로 귀국한 그는 이후 일본제국해군에서 근무하며 해군 장교들을 교육하고, 영국에서 배워 온 조선술을 토대로 일본이 자체적으로 군선을 건조하는 일에 참여했다.

1894년,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도고는 나니와 고속순양함의 지휘관이 되어 청일 전쟁에 파견되었다. 그는 제물포항 근처에서 청나라 군인을 호송하는 영국 수송선을 포격해 청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선박 규모에서는 청나라에 밀리지만 잘 훈련된 군대와 신식 무기를 보유한 일본 해군은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고, 도고는 포모사(오늘날의 대만)을 점령하면서 청일 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청일 전쟁의 승리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대만과 팽호 제도, 요동 반도 대한 권리를 일본에 양도했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끼어든 이른바 三國干涉(삼국간섭)이 시작되어 일본에게 여순 항을 포함한 요동 반도를 내놓을 것을 강요 당했고, 일본은 이에 굴복한다. 그 후 러시아는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중국을 위협하여 여순 항을 25년간 조차하고, 만주 일부지역과 요동 반도를 차지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여순 항을 차지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뻗치는 상황에 위협을 느꼈고, 양국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출병시킨 군대의 철수를 미적대자 일본은 이를 거세게 비난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이 여순 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포격하면서 러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일본 함대의 총책임자는 도고였다. 당시에는 전쟁을 시작할 때 선전포고하던 것이 관례였던 탓에 러시아 함대는 포격 소리를 듣고도 위기를 감지하기 못한 채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 교전에서 도고의 함대는 40분 만에 러시아 전함 4척을 파괴시키고, 여순 항을 봉쇄하여 러시아 해군의 발을 묶었다. 그리고 이듬해 6월과 8월 황해 교전에서 도고 함대는 러시아의 극동함대 대부분을 수장시키고 잔여 함대를 여순 항으로 쫓아내 러시아의 한반도 간섭을 저지했다. 한반도와 만주 대륙에 일본군이, 여순 항에 러시아 군이 속속 증원되면서 전쟁은 확대되었다. 1905년 초, 도고는 수차례의 격전 끝에 여순 항을 탈환했다. 그해 봄 일본 육군은 만주의 러시아 진지를 점령했다. 양측의 피해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당시 발틱 함대의 대부분이 증기선이기에 항상 석탄 공급이 필요해서 수시로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또한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이들 항구와 운하를 지배한 영국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1904년 10월 21일 북해에서 일어난 도거 뱅크 사건(영국 북해에서 쌍끌이어선단 공격)에서 러시아 해군은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스페인에게 발트 함대에 삭탄 보급을 하지 말라는 압력과 함께 영국 식민지 항구에도 발트 함대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사실상 수에즈운하 통과도 몇 척의 일부 함대만 가능하여 발틱함대의 주력은 아프리카 대륙 남단 희망봉을 돌았고, 함대는 마다가스카르의 노스베항에서 합류했다. 이후 인도양에서도 러시아의 우호국 항구는 매우 적었고, 동맹국 프랑스에게도 냉대를 받아 약 반년간의 항해로 장병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고, 사기도 매우 저하되었다. 제2, 제3 태평양함대는 190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캄란 만에서 합류한 뒤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을 목표로 항해를 시작했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는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황해 해전과 울산 해전에서 격파해 무력화 시킨 뒤 발트 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발틱 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 해협이었다. 러시아 함대에 비해 세력이 열세인 일본 연합함대는 이중 1곳에 전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일단 2곳은 거리상 및 기뢰에 의한 방어가 튼튼했기에 도고 제독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거라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5월 14일 발틱 함대가 캄란항을 출항했으나, 5월 19일부터 소식이 묘연했다. 발트 함대의 진로를 알 수 없게된 일본 연합함대는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발트 함대가 태평양에서 북해도(호카이도)로 향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5월 24일 도고는 일본 대본영에 연락해 북해도로 이동하고자 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대본영에서는 일단 신중하게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도고는 5월 26일 정오까지 기다리다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5월 26일 오전 발틱 함대의 석탄운반선 6척이 샹하이에 5월 25일 저녁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운반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운항거리가 긴 태평양 루트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것으로 도고는 쓰시마 해협에서 발틱 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운반선이 하루라도 늦게 입항했다면 도고의 연합함대는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1905년 5월 27일 칠흑같은 한밤중 오전 2시 45분, 규슈 서쪽해역 203호 지점에서 연합함대의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조타실 등화관제를 지키지 않은 발틱 함대의 병원선 아리욜호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을 발견했고, 뒤이어 발트 함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새벽 4시 45분에 “적함 발견”이란 의미가 있는 "타타타타타"(실제 타의 연속)로 시작되는 “적함 203지점에서 나타남 0445”을 타전했다. 결국 1905년 5월 27일 새벽부터 러일 전쟁의 최종 격전인 쓰시마 전투가 발발했다.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 모습을 드러냈고, 鎭海 군항에서 대기하던 도고는 4척의 전함 등을 이끌고 출항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됵은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기함 미카사의 갑판에 간단하나마 조선의 聖雄 忠武公 李舜臣 장군을 기리는 제단을 차려 놓고 휘하 지휘관들고 함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례의식을 가졌다. 결국 러시아의 무적함대는 일본의 2배에 달했으나 도고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6척의 전함과 기타 10척을 격침, 자침 5척, 나포 6척, 중립국 도피 6척, 블라디보스톡엔 순양함 1척, 구측함 2척만 도착했고 전사 4,830명,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등 포로 6,106명으로 발틱 함대가 울릉도 앞바다까지 쫓긴 끝에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다음 날 5월 28일 아침 러시아 함대는 항복을 선언했고 니콜라이 2세가 이끌던 제정러시아는 몰락으로 기울게 된다. 그에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사망자 117명, 부상자 583명에 불과했다. 더욱이 전함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해전 사상 이렇듯 일방적인 전투는 전무후무하다고 평가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이 러시아에게 거둔 승리는 전 세계를 경악시켜 서구 열강이 일본을 그들과 대등한 근대국가로 대우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 여순 항, 요동 반도, 사할린 섬 남쪽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쓰시마 해전으로 도고는 일본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 1913년 해군원수에 임명되고, 1921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나 이후에도 해군원수 이사회 이사로서 해군 군비증강안과 작전 등에 지속적으로 조언했다.

 

1934년 5월 30일, 도고가 세상을 떠나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쓰시마 해전 이후 '세계의 영예', '무사도의 화신' 등으로 일컬어지며 국가영웅으로 추앙받던 도고는 '호국의 신'으로 추존되어 전국 각지에서 도고 신사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30일제를 기해 해군성의 주도 아래 본격적으로 신사 건립이 진행되었다. 1940년 오늘날의 도쿄 하라주쿠 지역에 도고 신사 건립이 완공되었고, 5월 28일 신령을 불러들이는 신도 의식인 진좌제가 거행되었다.

 

국가의 지원도 없고 각종 모함 속에서도 모든 해전에서 승리를 일구어 낸 이순신 장군의 전술 중 鶴翼陣(학익진)전법을 응용한 丁字戰法으로 발틱함대를 격파한 도고 해군사령장관이 러일전쟁 전승기념 파티에서 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영국의 넬슨과 비교한다면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어보자 그 누구보다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전술을 따라 배우던 도고는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우리 함대는 러시아 발틱 함대의 3분에 1 정도의 규모에 불과한데도 이겼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기자가 그러면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도고는 이순신 장군이 軍神이라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며 자신을 ”넬슨과는 몰라도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나 황공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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