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나라 최후의 名將 원숭환(袁崇煥)

袁崇煥(1584~1630)의 자(字)는 원소(元素)이고, 호(號)는 자여(自如)이다. 광동성[廣東省] 동완현(東莞縣)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지(原籍地)는 광시성[廣西省] 오주등현(梧州藤縣)이다. 명(明 1368년 ~ 1644년))나라 말기의 장군으로 후금(後金)의 침략에 맞서 요동(遼東) 방어에 큰 공을 세웠지만 모반(謀反)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1597년(萬曆 25년) 수재(秀才)가 되었고, 1606년(萬曆 34년)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1619년(萬曆 47년)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푸젠성[福建省] 샤오우[邵武]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다. 젊어서부터 퇴직한 병사들에게 변방의 정세를 묻는 등 군사(軍事)에 관심이 많았고, 성격이 담대하고 지략이 많았으며 문관(文官) 출신이면서도 사람들과 군사 전략을 논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漢族의 영웅, 외세의 침략에 거세게 저항했던 원숭환(袁崇焕)은 수차례의 전투에서 외적을 물리쳤지만, 홍타이지의 계책에 속아 넘어간 숭정제의 어리석음으로 목숨을 잃었다. 결국 명나라는 이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
1622년(天啓 2년), 어사(御使) 후순(侯恂)에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병부(兵部)의 직방사(職方司) 주사(主事)가 되었다. 당시 명(明)은 왕화정(王化貞, ?~1632)이 이끄는 군대가 후금(後金)에 크게 패하여 만주(滿洲)의 지배권을 후금(後金)에 완전히 빼앗겼다. 후금(後金)은 랴오양[遼陽]과 광닝[廣寧]을 점령하고 산해관[山海關]을 넘보고 있어 베이징[北京]도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숭환(袁崇煥)은 홀로 요동(遼東) 지역을 정찰하고 돌아와서는 스스로 산하이관[山海關]의 방위(防衛)를 지원했다. 그는 병비검사(兵備檢事)로 임명되어 산하이관[山海關]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명군(明軍)은 산하이관[山海關]의 방어에만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원숭환(袁崇煥)은 산하이관[山海關] 북쪽에 성을 쌓아야 효과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다고 보고, 영원성(寧遠城, 지금의 遼寧 興城)을 개축(改築)할 것을 조정(朝廷)에 건의했다. 그리고 1623년부터 1624년까지 영원성(寧遠城)을 10m의 높이로 새로 쌓았고, 포르투갈(Portugal) 상인들에게 구입하여 ‘홍이포(紅夷砲)’라고 불리는 최신식 대포를 배치하였다. 1626년(天啓 6년), 누르하치(努爾哈赤, 청 太祖 1559~1626)가 랴오허[遼河]를 건너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해 왔으나, 원숭환은 우월한 화력을 바탕으로 후금(後金)의 군대를 물리쳤다. 명(明)은 1618년 이후 후금(後金)에게 계속 패전(敗戰)만 거듭해 왔는데 원숭환이 비로소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전투를 ‘영원대첩(寧遠大捷)’이라고 하며, 그 공으로 원숭환은 병부시랑(兵部侍郎) 겸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승진하였다. 1627년(天啟 7년)에는 영원성(寧遠城)과 금주성(錦州城)에서 후금(後金)의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의 공격도 물리쳤는데, 이는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당시 명(明)은 희종(熹宗, 재위 1620~1627)의 총애를 받던 환관(宦官) 위충현(魏忠賢, ?~1627)이 전횡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환관(宦官)들의 엄당(閹黨)과 청의파(淸議派) 관료들의 동림당(東林黨) 사이에 당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원숭환은 위충현(魏忠賢)의 모함을 받자 병을 내세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28년(崇禎 원년) 사종(思宗, 1628~1644)이 즉위하자 다시 병부상서(兵部尙書)이자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로 기용되었다. 원숭환은 사종(思宗)에게 5년 안에 요동을 회복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고, 사종(思宗)은 그에게 상방보검(尚方寶劍)을 하사했다.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원숭환은 1629년 조선의 가도(椵島, 皮島라고도 함)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을 처형하고, 서부주(徐敷奏) 등을 파견하여 가도(椵島)를 요동(遼東) 수복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모문룡(毛文龍)은 1622년 가도(椵島)로 들어가 동강진(東江鎭)을 건설했으나, 후금(後金)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밀수 등을 일삼으며 독자세력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당(閹黨)의 비호를 받던 모문룡(毛文龍)을 황제의 재가(裁可)도 없이 처형하여 원숭환은 엄당(閹黨)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모문룡이 조선 조정에서 많은 재물을 뜯어내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결국, 1629년 6월 30일 명나라의 충신 원숭환에 의해 직무태만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참수당했다.

1629년 10월, 후금(後金)의 홍타이지[皇太極]는 원숭환이 지키고 있는 영원성(寧遠城)과 산하이관[山海關]을 피해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장성(長城) 동북쪽의 시펑커우[喜峰口]를 거쳐 베이징[北京]을 공격했다. 영원성(寧遠城)에 주둔하던 원숭환은 급히 베이징[北京]으로 병사를 이끌고 이동하여 광거문(廣渠門)과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후금(後金) 군대를 물리쳤다. 후금(後金)은 베이징[北京] 외곽의 남해자(南海子, 지금의 大興縣 일대)로 병력을 물리고, 사종(思宗)에게 화친을 맺자고 요구했다. 그리고 주변 지역의 약탈에 나서는 한편, 환관(宦官)을 매수하여 원숭환이 후금(後金)과 내통하여 모반(謀反)을 꾀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결국 1629년 12월 사종(思宗)은 원숭환을 모반 혐의로 감옥에 가두었다.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관료들이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원숭환의 구명(求命)을 호소했지만, 엄당(閹黨) 계열의 온체인(溫體仁, 1573~1638) 등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처형을 촉구했다. 결국 원숭환은 1630년 9월 22일, 베이징의 서시(西市) 거리에서 온몸을 잘라내어 죽이는 능지형(凌遅刑)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광거문(廣渠門)의 광동의원(廣東義園)에 묻혔다.

원숭환이 죽은 뒤 요동(遼東)을 방위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명군(明軍) 장수들은 잇달아 후금(後金)에 투항하였다. 이로써 명(明)은 급격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명(明)이 멸망하고 만주족(滿洲族)의 청(淸, 1636∼1912)이 중국을 지배하자, 원숭환은 한족(漢族)들에게 과거 송(宋, 960∼1279) 시대에 금(金, 1115∼1234)에 맞서다가 진회(秦檜, 1090 ~ 1155)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은 악비(岳飛, 1103~1141)와 함께 ‘반청 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숭앙되었다.

 

          崇煥(158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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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르하치에 중상을 입힌 영원성 전투


누르하치의 죽음에 관한 일설에 따르면 이 때 누르하치가 원숭환 군대의 대포를 맞고 사망하였거나 중상을 입고 귀국한 뒤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주장의 근원은 조선 사람인 이성령(李星齡)의 『春坡堂日月錄』에 기재된, “우리 나라의 역관 한원(韓瑗)이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을 때” 원숭환을 만나, 누르하치가 이미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원숭환으로부터 들었다.”란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령이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고 한 역관이 전해들은 일을 다시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료를 통해 살펴보자. 영원전투가 있었던 것은 천계 6년(1626) 1월의 일이다. 누르하치가 원숭환의 대포에 맞아 죽었다면, 『淸史稿』 태조본기에 있는 누르하치가 4개월 뒤인 천계 6년(1626) 5월 칼카 부를 공격하여 칼카부의 버일러를 죽인 일은 과연 누가 한 것인가? 또한 중상을 당해 그 상처로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칠순의 노인이, 중상을 입었는에도 몽골 원정까지 따라갔다고 하는 건 매우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淸實錄』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죽음은 전투가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천계 6년(1626) 8월의 일이다. 중상을 당했다던 고령의 노인이 중간에 몽골 원정에까지 참여하고 그러고도 8개월이나 살아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설마하니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죽음을 숨기고 8개월 동안 대역이라도 세웠단 말인가? 차라리 누르하치가 원숭환의 대포에 맞은 상처로 죽었다고 하기 보다는 노환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청실록(淸實錄)은 중국 청(淸)나라 태조(太祖)로부터 광서제(光緖帝)에 이르는 11대 황제의 실록으로. 총 4,466권이다.

 

2. 홍타이지를 격퇴한 북경성 전투

 

숭정 2년(1628)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는 영-금(寧錦) 전선을 우회하여, 장성의 희봉구 일대를 돌파, 직접 북경을 공격하였다. 이 때 원숭환은 9천 군사를 이끌고 “사졸들은 밥을 먹는 것도 거르고, 말은 꼴을 먹이는 일도 없이 급박하게 달려”북경으로 이동, 홍타이지의 10만 대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밥을 먹는 것도 잊고 부리나케 달려왔다던 원숭환이 대동총병(大同總兵) 만계(滿桂)의 군대보다 4일이나 늦게 도착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원숭환이 만계보다 먼 거리를 이동하였던 것도 아니다. 이 때 원숭환의 이동거리는 (『剖肝錄』, 余大成) 3백 리였지만, 만계는 1천여 리였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만계보다 소식을 늦게 받았다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것이 요동지역의 일인데 요동지역의 사령관이 서부전선의 사령관보다 소식을 늦게 알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다. 원숭환은 광거문(廣渠門)에서, 만계는 덕승문(德勝門)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과연 淸의 군대는 둘 중 어느 쪽이 주공이었을까? 『淸史稿』 태종본기를 보자.

 

“홍타이지는 우익의 대 버일러 다이샨과 버일러 지르갈랑 등을 이끌고 護軍과 몽골병을 이끌고 만계 등을 공격하였다.”

 

그렇다면 원숭환이 대적한 청나라의 대장은 누구였을까? 멍구타이였다. 멍구타이가 홍타이지보다 대군을 이끌고 갔을 리가 없다. 더구나 원숭환의 군대는 겨우 9천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9천의 군대를 상대로 하면서 많은 병사를 내주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청실록에 동일한 기록을 확인해 보자.

 

“멍구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오지 않았고 다만 護軍과 몽골병 2천을 거느리고 영원순무(寧遠巡撫) 원숭환, 금주총병(錦州總兵) 조대수(祖大壽)의 2만 군대가 주둔한 사와문(沙窩門)으로 갔다. 멍구타이가 병사를 3대로 나누어 각 어전으로 하여금 호군을 이끌고 전진하게 했다. 하오거가 홀로 군대를 이끌고 우측으로 전진하여 적의 복병을 격퇴하였고 적을 죽여 성의 해자까지 쳐들어갔다. 남은 세 버일러는 오른쪽으로 따라가지 않고 중앙으로 쳐들어가 적병을 격퇴하였고 역시 성의 해자까지 전진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원숭환이 상대한 적은 홍타이지의 10만 군대가 아니라 멍구타이의 2천 군대였으며 그마저도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원숭환이 홍타이지의 대군으로부터 북경성을 구원했다는 말은 실로 믿을 수 없음이 아닐 수 없다. 원숭환은 기껏해야 조공(助攻)이었을 뿐이며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북경성을 구원한 공은 홍타이지를 상대한 만계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3. 원숭환은 어떻게 하여 영웅이 되었을까..

 

원숭환이 역적의 지위에서 복원되어 영웅의 지위로 끌어올려진 것은 청 건륭제 시기의 일이다.

지난번, 원숭환의 죽음과 그 이유 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당시 명대의 사람들은 원숭환의 죽음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또한 원숭환의 죽음이 “청나라 홍타이지의 계략에 의해 숭정제가 여기에 속아넘어갔고, 그래서 원숭환을 죽였다”는 주장도 청 건륭제 시기에 나타난 주장이다. 사실 동시대 명나라 사람들이 원숭환에 대해 가진 인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예를 들어 『쾌락의 혼돈』과 『룽산으로 가는 길』을 통해 유명인사가 된, 장대(張岱)의 기록을 보자.

 

“원숭환은 키가 작고 눈빛이 사나워 생김새가 마치 작은 원숭이와 같았으며 성격이 극히 흉폭하였다.”

 

지금 우리가 백과사전에서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원숭환의 초상은 뭐지? 이건 나중에 건륭제의 지시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대체 어떤 기이한 사정이 있길래, 원숭환이 죽은 뒤 100년이 지난 뒤에서야 홍타이지의 신묘한 계책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어떤 기이한 사연이 있길래 100년 뒤의 사람이 원숭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그의 초상을 제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청의 건륭제는 왜 초상을 다시 제작하도록 했을까. 왜 건륭제는 원숭환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청실록에서는 원숭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숭환은 계요독사(薊遼督師)가 되어 맡은 바 전투수행에 능란하고 충성을 다하였다. 하지만 당시 황제는 어지럽고 정치는 혼란스러워 결국 그 혼자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이 목숨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袁崇煥督師薊遼,雖與我朝爲難,但尚能忠於所事,彼時主暗政昏,不能罄其忱悃,以致身罹重辟,深可憫惻)”

 

이것이 원숭환에 대한 청나라의 공식적인 평가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明史』에서는 명나라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이에 이르러 황제가 원숭환을 오인하여 죽이고 말았다. 원숭환이 죽자, 국경을 지키는 일은 맡을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명의 멸망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다. (至是帝誤殺崇煥。自崇煥死,邊事益無人,明亡征決矣)”

 

즉, 원숭환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명나라의 멸망은 기정사실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원숭환은 “유능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으니 그를 “오인하여 죽인 숭정제는 당연히 “어지러운 昏君” 황제가 될 수 밖에 없고, 당시 정치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결국 명나라의 멸망은 이미 “여기서 결정된 사실”이 되므로, 명나라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지 결코 청나라가 멸망시킨 것이 아니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명나라는 이미 천명을 잃고 망해버렸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 새롭게 천명을 부여받고 청나라가 들어서게 되었을 뿐이며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실제 명나라의 멸망은 명나라 조정에 원한을 품은 농민 반란에 의한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청나라 조정의 이러한 논리가 농민들 및 신사들을 상대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작용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원숭환에 대한 평가는 명나라에 대한 평가로 직결되며, 이것은 다시 명나라의 유민에 대한 청나라의 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결국 청나라의 입장에서 명나라의 멸망은 청나라의 책임이 아닌 기정사실이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 원숭환은 명장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원숭환을 죽인 것이 숭정제의 최대실수라고 꼽히기 때문에 원숭환의 공로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원숭환을 우상화한 사람들 - 양계초 등 - 의 심리와 정반대에서 출발하였을 뿐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과정이다. 어차피 원숭환은 청말 민국시기, 서구 열강의 침입 위기에 직면하였던 상황에서 민족의 영웅을 창조함으로써, 명나라-중국, 청나라-서양, 원숭환-애국열사의 도식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던 근대시기의 만들어진 영웅이 아닐까? 명말청초의 혼란기는, 객관적 시각의 탐구를 어렵게 하고, 명대 출판업의 성황으로 나타난 다양한 필기, 문집, 잡기, 야사의 범람은 진실과 소문의 구분을 어렵게 했다.

 

4, 明나라 滅亡의 원인

 

명에서는, 유소년에 즉위한 황제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요절하고, 또 나라를 망친 경우가 많다. 만력제(萬暦帝, 1563~1620년)도 대표적이다. 10세 즉위 초에는 총명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성인이 되어 친정에 관심을 잃어 거의 매일 후궁에 머물다.조정 내에서 가신들이 파벌 항쟁을 벌였어도 무시했다.열심히 한 것은 축재로, 관료에게 결원이 생겨도 급여를 아까워 보충하지 않았다. 궁성 건설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증세를 거듭하였으며, 징세관은 계속 증원하였다. 반발이 퍼져,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한다.그러나 그 반란을 진압하는 데 군사비가 필요해서 다시 증세를 하고, 그로 인해 또 반란이 일어난다는 중국의 왕조 말기에 전형적인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만력제의 경우, 재위 연수는 48년으로 명조에서 가장 길었던 점에서 그 악영향도 오래 지속되게. ‘명나라는 만력萬力에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만력제가 명나라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만력제지만 정명가도룰 내걸고 조선에 출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倭軍에는 솔선수범 출병을 지시해 가신들을 놀라게 했다.
명나라 통제가 약화되면서 현재 중국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 애신각라 씨 집안에서 훗날 청조로 이어지는 제국을 이룩하는 누루하치라는 인물이 나온다. 명나라 요동지방사령관의 부하로 지원한 그는 탁월한 마술과 활 솜씨를 인정받아 사령관의 지우를 받아 후대를 받게 되었다.당시 여진족은 여러 부족간의 대립이 계속되고 분열되어 있었다. 누루하치는 명의 후원으로 세력을 확대해 수십 년에 걸친 싸움을 거쳐 마침내 여진족 세력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여진족뿐만 아니라 다른 주변 부족도 거느리게 된 누루하치는 1616년 금(12~13세기의 금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후금이라고 부른다)이라는 국호를 통해 국가로서의 독립을 이루면서 명나라와의 대결 자세마저 내세운다. 위험성을 깨달은 명나라는 1619년 황급히 후금에게 토벌군을 보냈다. 명군은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족 정예부대 「팔기」에 의해, 반대로 산산이 격파되어 버린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은 선양, 요양의 양대 거점을 명나라로부터 빼앗아 세력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연전 연승을 계속하는 누르하치는 명의 영토에의 본격적인 침공을 도모해 요충이라고 유명한 산해관(현재의 하북성 친황다오시 산해관구)에 눈을 돌립니다. 명군도 더 이상의 패배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다는 위기감에서 산해관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다.

 

산해관 방면 수비대에 원숭환(1584~1630년)이라는 인물이 부임한다. 과거에 합격한 진정한 문관이면서 자원하여 산해관에 온 것.원숭환은 부임하자마자 당시 산해관사령관과 함께 산해관 바깥에 영원성이라는 요새를 쌓았고 스스로 그 수장이 되어 주둔하였고, 1626년 누르하치가 대군을 이끌고 드디어 산해관으로 다가왔다.명군은 산해관 수비에 집중하기 위해 바깥쪽 각 성에 철군을 명했다.하지만 원숭환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약 2만 병력과 함께 영원성에 남았다.10만 명이나 되는 군대로 항복을 촉구해도 원숭환은 응하지 않고 포르투갈에서 일부러 들여온 홍이포를 무기로 철저히 항전. 막대한 피해를 낸 후 금군측은, 철퇴로 내몰렸다(영원성 전투). 더욱이 8개월 후에 누루하치는 病死.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2대째인 홍타이지(1592~1643년)도 이듬해 산해관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원숭환에 의해 격퇴(영금 전투). 후금을 상대로 패전 속에 잇달아 대승을 거둔 원숭환은 현대의 제갈공명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그런데, 원숭환이 지키는 산해관 방면의 공략이 어렵다고 생각한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우회하여 다른 지점에서 만리장성 돌파를 도모하고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다가왔다. 산해관에서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온 원숭환에 의해 격퇴당하다. 이 직후 승리의 일등공신인 원숭환은 갑자기 체포되고 말았다. 죄상은 후금군과 손을 잡고 그 장성 돌파를 굳이 묵인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후금에 매수된 환관들의 터무니없는 참언이었다. 당시 황제인 숭정제(崇定帝, 1611~1644년)는 의심이 많은 성격으로 과거의 참언을 믿고 구국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원숭환을 그대로 처형했다. 고군분투하던 원숭환의 처형은 명나라 멸망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됐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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