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을 극복한 西厓 柳成龍

柳成龍(1542년 중종 37년 ~ 1607년 선조 40년) 대감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끄러운 마음을 길러 흐린 풍속을 깨끗이 하고, 바른 형벌로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하고, 학문을 이끌어 선비의 기풍을 떨치게 해야 합니다.’ 서애 유성룡이 선조에게 바른 정치를 권하면서 제안한 세 가지 덕목이다. 그는 국가 질서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조정을 신뢰하지 않는 척박한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어리석은 왕을 설득하고 분노한 백성들을 달래면서 쓰러져가는 조선의 국체를 지키기에 동분서주했던 명재상이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고 지휘자인 도체찰사 직을 맡은 그는 이순신, 권율 같은 無名의 名將들을 등용하고, 신분제와 조세 등 각종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에게 꿈을 심어줌으로써 암울했던 전황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난리가 끝난 후 조선의 권력자들은 그가 시행한 정책을 모조리 파기하고, 조정에서 그를 퇴출시켜 버렸지만, 유성룡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향리에 내려가 자신이 겪은 저간의 기록을 <징비록>에 담아 전쟁의 참혹한 정경과 그에 대한 반성, 후손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런 비극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가 제시한 국난극복의 요체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무슨 일이든 미리 대비해 두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소를 도둑맞았다면 다음에 소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쳐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당대의 위정자들은 노재상의 이런 평범하고도 간곡한 충고를 외면했고, 그 업보는 훗날 조선이 신흥강국 청나라 말발굽 아래 처절하게 짓밟히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이 청년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어린 시절 서울 乾川洞 한 동네에서 살아 잘 알고 지내던 세 살 어린 李舜臣을 만난 뒤 평생의 후원자가 된다. 1558년(명종 13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막내아들인 廣平大君의 5세손 이경(李坰)의 딸과 결혼했고, 1562년(명종 17년)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어 안동의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익혔다. 특히 퇴계 문하에서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을 선배로 두고 정구 · 김우옹 등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퇴계 제자들과 함께 퇴계학파의 줄기를 잇게 된 것이다. 당시 퇴계는 유성룡을 가르치면서 “이 청년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가 이황을 만난 지 7년 만에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듬해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30세에 말미를 얻어 안동 낙수(洛永)의 서쪽 언덕 밑에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기 위해 서당을 지으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이 서쪽 언덕의 뜻을 따 ‘서애(西厓)’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

 

1564년(명종 19)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6년(명종 2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승문원 권지부정자란 벼슬을 얻었다. 1568년(선조 1년), 사헌부 감찰 직에 있던 유성룡은 사신 이후백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갔다. 당시 그는 명나라의 태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왕양명과 진백사의 학문을 유학의 정통으로 여기던 그들에게 설문청이라는 학자를 소개함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그처럼 유학의 본고장에서 자신의 뛰어난 학문을 과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같은 요직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학식이 뛰어난 관리가 마음껏 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휴가제도)의 혜택까지 받았다. 유성룡은 39세였던 1580년, 부제학에 임명됨으로써 조선의 유학을 선도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1582년,대사헌으로 임명된 후 중국의 역대 황제들의 은덕을 모은 《황화집서》, 1583년 나라를 지키는 방책을 궁리한 《비변오책》, 1585년 《정충록발》을 지었고, 1586년 《포은집》을 교정하는 등 활발한 학문 활동을 펼쳤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유성룡은 1588년 조선의 학문과 지성, 정신의 최고봉을 상징하는 兩館大提學의 영예를 얻기에 이른다. 양관대제학이란 한 사람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는 것으로 속칭 문형(文衡)이라고 한다. 그는 순탄한 벼슬길에서 도승지 · 대제학 · 이조판서 같은 요직을 거쳐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올랐다. 48세로 정승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출세는 문벌의 덕을 본 것도 아니고 이황의 후광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능란한 처세, 신중한 몸가짐과 선조의 남다른 신임도 작용했다.

 

유비무환, 국난이 다가온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속칭 남인 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이런 조정의 형세에 환멸을 느낀 유성룡은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갔다. 신료들끼리 파당을 지어 다투는 모양이 싫었고,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려는, 후세에 仁祖와 더불어 조선왕조 兩大暗君으로 손 꼽히는 宣祖임금이 원망스러웠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쟁에 골몰하여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둔감한 조정이었다. 당시 조선은 연산군 이후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를 겪었고, 勳舊派와 士林派 간의 정치 투쟁으로 몹시 혼란스러웠다. 명종 대에 권력을 쥔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싸웠고, 동인은 또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등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 군사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했다. 2백여 년 동안 유지된 조선의 국방체제는 오랜 평화기간 때문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이런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비변사라는 합의기관을 설치했지만 국방재정이 허약했으므로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통신사를 요청하자 임금은 유성룡의 의견에 따라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한 黃允吉, 곧고 기개가 넘치는 金誠一, 이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許筬(허성)을 통신사 일행으로 파견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되돌아온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아 정세 판단을 어렵게 했다. 모든 것이 당쟁 때문이었다. 당시 우의정에 이조판서를 겸했던 유성룡은 조정에서 세자책봉 문제로 동인들이 서인 정철을 벌하자고 했을 때 온건파인 남인 편에 서면서 강경파인 李山海와 정적이 되었다. 얼마 후 일본에서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치려 하니 길을 빌려달라)를 요구하는 황당한 국서가 당도했다. 거절하면 그를 트집 잡아 조선을 침략해 올 것이 분명해졌다. 위기를 감지한 유성룡은 都元帥 감으로 형조정랑 權慄과 水軍統制使 감으로 정읍현감 李舜臣을 추천하여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 겸임)로 추천하고, 일본의 침입경로로 예상되는 경상도의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李鎰(이일)로 교체했다. 아울러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써서 이순신 장군에게 보냈다. 그처럼 임진왜란 직전에 유성룡은 이미 이순신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왜적의 침략에 대비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나라를 다시 일으키다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유성룡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선조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간청했다. 아울러 왕자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임금을 지키는 근왕병을 소집해야 한다고 종용했지만 임금은 이런 유성룡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침내 1592년 임진년에 왜군이 침략해 오자 선조는 광해군을 급히 세자로 책봉하고 별도의 조정인 분조(分朝)를 이끌게 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를 돌며 민관군을 위로하고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 李如松은 “조선의 부흥은 세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란초기 선조는 신립 장군의 탄금대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을 버리고 도망쳤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율곡(1536 ~ 1584)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파주로 낙향한 율곡이 말년에 임진강변 花石亭에서 제자들과 학문과 시를 논하다가 卒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저녁무렵에 어두워서 당도한 선조의 어가가 어쩔줄 몰라할 때 생전의 율곡이 평소에 기름칠로 닦아주며 예견한 대로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불태워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임금의 몽진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분개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피난 중에도 임금은 적을 물리칠 방안보다는 도망치는 계획에만 몰두했다. 당시 그는 요동으로 가면 나라는 망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제후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가 압록강을 건너면 요동 지방에 유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곤 감히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당시 유성룡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도 안정되고 바로선다는 유교적 통치이념을 임금보다 더욱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 임금은 자기 나라 조선보다 부모의 나라로 여기던 명나라 군대에만 의지하려 했다. 그 때문에 유성룡은 전쟁 내내 뜻이 안맞는 선조 임금과 사사건건 언쟁을 해야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는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상주와 청주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 질풍처럼 한양으로 몰려왔다. 선조는 허둥지둥 북쪽으로 피란하면서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총 지휘하게 했다. 당시 겁에 질린 선조 임금은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유성룡은 그렇게 되면 조선이 멸망할 것이라면서 극력 반대했다. 임금 일행은 왜적에 쫓겨 의주에 이르렀을 때 다행히 명나라 원군이 달려왔다. 그로 인해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유성룡은 군사를 모아 유격전을 벌이며 왜적의 북상을 막았다. 아울러 명나라 군사를 먹일 군량을 보급하고 장수들을 접대했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을 공략 적전에는 왜군의 간첩인 김순량 등을 잡아 처단함으로써 군기 누설을 예방하는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유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임진강에 부교를 놓아 대군을 건너게 했다. 당시 밧줄을 이용하여 강 위에 다리를 놓은 부교는 유성룡이 얼마나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그 후 유성룡은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고,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다. 서울을 되찾은 다음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때 화포와 비격진천뢰 등 각종 신무기를 제조하여 왜군을 괴롭혔다. 그는 전쟁의 여파로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한 대책에도 골몰했다. 압록강 연안에 있는 중강에서 소금을 만들고, 철, 은, 면포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 쌀로 바꾸어 와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 살렸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유성룡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 사신 사헌을 보내 선조를 끌어내리고 조선을 직접 다스리겠다는 국서를 보내왔다. 유성룡은 내심 분개했지만 침착하게 사헌을 달래면서 그 부당함을 역설했다. 그러자 사헌은 ‘유성룡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이 있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치열했던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겨우 한숨 돌린 유성룡은 피폐해진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각종 민생정책을 입안했다. 1594년(선조 27)에 진관법을 다시 쓰기로 하고 국민군 제도를 확립했으며,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쌀로 대신하여 바치게 하는 대동법을 시행했다. 또 나라에서 소금을 많이 만들어 쌀로 바꾼 다음 군량미로 삼게 했다. 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안집도감을 설치했고, 지방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게다가 문벌과 신분, 출신 지역의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1595년(선조 28)에는 제철창을 설치하여 대포와 조총을 만들게 했고, 남한산성을 순시한 다음 그곳을 지키던 승병들에게 성을 쌓고 창고를 짓게 했다. 이듬해에는 북쪽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평안도와 함경도 순찰사에게 명했다. 그때 왜적들의 간계로 이순신이 죄인으로 몰리자 그를 변호하면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에 이순신이 결국 파직되자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해 조선을 지킨 유성룡

다행히도 그가 천거한 이순신이 미리 준비한 거북선과 각종 전함, 화포로 남해를 굳게 지키며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써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이순신이 남쪽에서 시간을 벌어주자 유성룡은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전쟁 초기 유성룡은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593년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데려온 병력 4만 5천 명이 먹을 1년 치 군량은 무려 48만 6천 석이었다.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 1년 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은 60만 석뿐이었다. 그러니 명나라 군대를 먹이고 나면 조선 군대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 때문에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명나라 군대의 말을 먹일 콩이나 수수, 조, 기장 등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온 힘을 다 쏟아도 말 1만 필 1개월분 사료가 전부였다. 군량이 부족해지자 이여송은 선조에게 군량이 부족하니 명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유성룡은 그런 이여송을 어르고 달래면서 계속 왜군과 싸우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육지에서 유성룡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바다에서 이순신의 의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황이 유리해지자 선조와 조정 신료들은 이순신에게 무군지죄(無君之罪 역적죄), 부국지죄(負國之罪 국가반역죄), 함인지죄(陷人之罪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 기탄지죄(忌憚之罪 방자한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이순신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자 분개한 유성룡은 강력히 항의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자 선조는 유성룡을 경기도 지방으로 순찰을 보낸 다음 이순신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죽이려 했다. 그때 병조판서 정탁의 변호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궤멸되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허울뿐인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그렇듯 이순신이 남해에서 왜군과 싸울 때 유성룡은 조정에서 어리석은 임금과 싸웠고, 오만한 명나라 장수들과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심한 신료들은 유성룡을 조정에서 끌어내리기에 골몰했다. 그것은 유성룡이 전쟁 중에 시행한 속오군, 작미법, 천민 발탁 등이 당시 사대부의 신분적 기득권을 크게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해도 세금을 낼 수 없고, 병역의무를 져서도 안 되고, 서얼이나 천민에게 등용의 기회를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성룡이 추진했던 정책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양반의 특권은 다시 살아났고, 승려와 노비들에게 약속한 면천(免賤)과 벼슬 주는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공물을 쌀로 환산하고 토지소유를 기준삼는 제도도 사라졌다. 다만 광해군이 그 효용성을 인정해 일부지역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을 뿐이다.

 

《징비록》의 시간, 충정으로 잠들다.

1598년, 명나라의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모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북인들은 유성룡이 그 진상을 변명하러 명나라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직하라고 종용했다. 그러자 선조 임금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관작을 삭탈해 버렸다. 그날은 11월 19일, 바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다. 이듬해 고향인 풍산 하회마을로 돌아온 유성룡은 지난 전쟁의 참상을 돌이켜보며 《징비록(懲毖錄)》을 쓰기 시작하여 63세 때인 1604년에 붓을 놓았다. 그는 벼슬살이의 모든 번잡함을 떨쳐 버리고 자성의 마음으로 임진왜란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제목인 ‘징비’는 중국의 고전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일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豫其懲而毖役患)’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고 26년 뒤인 1633년 아들 유진이 엮은 <서애집>과 함께 공개되었다. 이 책은 1695년(숙종 21)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유성룡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비옥한 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난날 조정의 여러 가지 잘못을 반성하고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임진왜란 기록서는 《징비록》 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유성룡은 전쟁 초기 도체찰사로서 전쟁의 급박한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고, 조정의 중요한 조치와 기록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특히 각처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뿐만 아니라 조선·일본·명나라 사이에 펼쳐진 외교전과 왜적의 무차별적인 살육과 약탈,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던 백성들의 아픔, 장수와 의병장, 병사 등 왜적과 싸우며 공을 세웠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하여 자세히 그려져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 초기에 많은 부분을 명나라 구원병에 대하여 쓰고 있다. 전쟁 초기에 관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망명까지 고려하고 있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명나라 구원병은 하늘이 보내준 천병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구원병이 도착하고 이순신의 승전보와 의병들의 소식은 압록강에 인접한 최후의 피난지 의주까지 도망쳤던 그들에게는 기적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유성룡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명나라 군사들을 위한 군량미 조달, 전투를 피하려는 명나라 장수를 달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1593년 4월 30일, 왜군이 떠나버린 서울을 수복했지만 고통은 배가되었다. 이전에 번화했던 서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폐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백성들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명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강화 협상에 대한 대책도 피곤했다. 저들의 협상안에는 왜군의 조선영토 분할점령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 있었고, 명나라가 조선을 직접 통치하겠다는 말도 불거졌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유성룡은 절절한 심정으로 명나라 장수들을 설득하고 비뚤어진 조정을 지휘해야 했다. 유성룡은 《징비록》 후반부에서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 그와 관련한 일화를 중점 소개했다. 그의 시선에 이순신은 단순히 훌륭한 수군 지휘관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품고 있던 백 가지 경륜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죽었으니 실로 애석할 따름이었다. 1605년(선조 38년)에 유성룡은 낙향하여 풍산군 서미동으로 이사한 다음 이듬해 자그마한 초당을 짓고 농환재라고 이름 지었다. 1607년(선조 40) 5월 6일 그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이 서울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후손들은 안동 풍산읍 하회마을에 자리 잡고 살아왔는데, 전통가옥 등 많은 민속적 자료를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2017년은 서거 41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를 기리는 발걸음이 병산서원에 이어졌으며, 기념사업이 지금까지 펼쳐지고 있다.

 

西厓대감 관련 일화

유성룡(柳成龍)이 낙향한지 10년 만에 고향 하회에서 66세로 별세했다는 부음이 한양도성에 퍼지자, 도성의 늙은 아전들과 종로의 장사치들과 수천 명의 백성들이 묵사동(墨寺洞, 오늘날의 남산 밑 언저리)으로 모여들어 유성룡 대감이 살던 옛 빈 집터에 모여 통곡했다. 조정에서는 사흘 동안 市場을 닫게 했지만 상인들은 자진하여 나흘 동안 장사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성룡의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 치를 경비조차 없다는 말을 듣고 너도나도 삼베를 가져오거나 한 푼 두 푼 거두어 장례 경비를 모았다. 그들이 유성룡을 마음으로 우러러봤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죽은 뒤 선조실록에는 "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라고 적혀있다.

 

어느 날 조정에서 선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조 : 과인을 예전의 성군인 요 · 순과 폭군인 걸 · 주에 비긴다면 어느 쪽이겠는가?
정이주 : 堯 · 舜과 같은 군주올시다.
김성일 : 桀 · 紂와 같사옵니다.

그런 말을 듣자 선조는 안색이 확 변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조정과 타협의 명수 유성룡이 나섰다.

둘 다 바른말입니다. 정이주는 장차 전하의 성덕을 바라는 뜻이요, 김성일은 전하께 경계를 드리는 말인 줄 아옵니다. 부드러움으로 어색한 자리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이런 유성룡이었으니, 그의 정치적 처세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유성룡은 겁쟁이 선조가 중국 요동이나 함경도로 처소를 옮기려 할 때, 의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군과 의병의 반격기세를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처럼 대들었던 것이다. 선조는 유성룡의 강경한 요구를 속으론 싫어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민중들은 선조의 어가에 돌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등 저항의 기세를 보인 것이다.

 

유성룡은 영의정이 된 지 5년 만에 끝내 자리를 내어 놓고 河回로 낙향했다. 그 이유는 선조의 변덕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선조는 난중에 이순신을 처단하려 하기도 했고, 치솟는 유성룡의 민중적 인기를 시기했다. 그를 죽일 구실은 하나도 없었으니 조정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게다가 병역 등 특권이 배제된 양반 무리들의 보복이 그 배경에 도사리고 있었다.

 

7년 임진왜란의 전개과정과 대책을 기록한 징비록의 서문은 이러했다. 나는 늘 지난날 전란의 일을 생각하면 황송함과 수치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이에 한가한 가운데 그 듣고 본 바를 기술했다.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로 글을 써 나갔던 것이다. 곧 “미리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해서 앞으로의 환란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보충자료 : 임란 초기에 순국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부산 첨사(釜山 僉使) 정발(鄭撥)과 秀吉

1592(선조 25)년 4월 13일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왜국(倭國) 적추(賊酋) 도요토미 히데요시인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幷呑)하고 잔포(殘暴)가 날로 심했다. 왜국(倭國)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은 매우 빈천(貧賤)하여 꼴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당시의 관백 오다 노부나가(關白, 織田信長)이 출행할 때 발 받침으로 옷을 벗은 채 수레 옆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백은 그에게 변소인 혼측(溷廁)지기를 시켰다. 수길이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더러운 취예(臭穢)가 없었다. 관백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신을 삼는 결리(結履)를 하게 하였는데 역시 정밀하게 신을 삼아 바쳤다. 그것도 추운 날씨에는 신을 가슴 속에 품어 따뜻하게 하여 드렸다.

​하루는 관백이 금술잔 금배(金盃)를 실수로 깊은 우물에 빠뜨렸다. 수길은 큰 물동이 수십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으니 우물 물이 뒤집히면서 금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총애를 받아 승직(昇職)의 길이 열렸다. 이 때 국내에 큰 도둑이 있었으나 관백은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수길이 토벌을 자청하였다. 수길이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관백에게 관백 행차시에 쓰는 專用 붉은 우산 홍산(紅繖)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관백이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수길은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관백이 직접 행차한다고 여겨 엄청난 사람들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관백이 시해당하였다는 말을 듣자 수길은 즉시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몰래 입성하여 관백을 시해한 자를 죽이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인 평수길(平秀吉)은 항상 明國이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승려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는 가도범요(假途犯遼)를 요청했다. 우리 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진 첨사(釜山鎭 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釜山鎭殉節圖(부산진순절도) 참조


이튿 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금해(金海)·밀양(密陽)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적을 진주(晉州)에서 맞아 싸웠다. 金誠一이 아장(牙將)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

8월 7일 김경노(金敬老)가 임금께 아뢰기를 “4월 14일에 적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으나 모두 세견선(歲遣船)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15일 아침에 포(砲)를 쏜다는 급한 보고 때문에 처음으로 적인 줄 알았습니다. 부산 첨사(釜山 僉使) 정발(鄭撥)은 밖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통솔하여 성으로 들어왔으나 아군이 과반수가 들어오기도 전에 적이 곧 성으로 올라왔습니다. 적이 또 동래(東萊)에 당도하자 송상현(宋象賢)이 서문(西門) 밖에서 패하여 북문(北門)으로 들어갔는데 적이 작은 대(臺)에 올라가서 무수히 포를 쏘아대므로 사람들은 감히 성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적이 이내 성에 들어왔고 송상현과 고윤관(高允寬)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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