奴婢(노비)에서 捕盜大將이 된 鄭忠信 장군

조선시대 충무공 '정충신' 장군을 설명하자면, 강직하고 청렴하며 지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오르는 인생역전을 이루었다. 정충신 장군은 1575년 12월 29일 광주광역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서 국가의 운명과 함께 했다. 기록으로는 고려명장 '정지'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지방의 아전일 뿐이었다. 어느 날 황룡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깨어난 후 여자 하인과의 사이에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을 낳았다. '노비종모법'에 따르면 그도 노비인 셈이라서 그때는 이름도 일반 노비의 이름이었다.

 

정충신이 노비에서 포도대장으로의 미래를 맞는 변곡점은 절도영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국의 운명이 픙전등화일 때, '노복이지만 총명하여 권율의 총애를 받던 이때, 의주로 몽진간 '선조임금'에게 권율 장군의 호남지역 전투상황을 담은 '장계'를 올릴 일이 생겼으나, 전남에서 평안도까지 깔린 왜군을 뚫고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는데 열일곱 살의 정충신이 지원하자 이는 주변에서 말릴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17세의 나이 어린 정충신이 장계를 가슴에 간직하고 각처에 깔린 왜군들을 뚫고 의주에 있던 조정에 장계를 전달하여 전세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연전연승하는 이순신 장군과 호남지역의 선전으로 인하여 왜군은 서해안으로 북상할 수 없었으며 이는 조선 조정의 명나라 망명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선조는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때 병조판서를 하던 '이항복'이 정충신의 인간됨을 아끼어 학문을 가르치고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이항복은 정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고, 그도 무과에 급제하며 노력을 다하였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군문에 투신하여 명나라 구원군을 도와 평양탈한과 서울탈환에도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다. 노비 출신이었기에 정충신을 업신여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워낙 총명하여 명나라와 왜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면서 중국어와 일본어도 능숙해지고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도 높아졌다. 그 사이, 총애하던 권율 장군의 세 사위가 되어 신립, 이항복과 동서지간이 되었으니 조선시대 신분제도에서 보기 드문 일이기도 하다.

 

1597년 장만을 보좌하여 명나라 연경에 다녀오고, 1617년에는 통신사 오윤겸을 따라서 일본에 다녀오는 등 외교에도 기여했다. 1618년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른이 나오자 이를 반대한 그의 스승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충무공 정충신은 관직을 버리고 스승의 귀향길을 따라가며 지성으로 섬겼으며, 이항복이 귀양지에서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모시고 포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며 스승에 대한 보은을 다했다. 1622년 평안도 병마우후에 임명되고, 1623년에는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충무공 정충신은 이괄과의 친분을 끊고 의연히 일어나 전부대장으로 관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 전투에서 반군을 궤멸시켜 조선 왕조를 지겼다. 이 공로르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 대도호부사로 승진하였으며 1625년에는 진무일등공신 정헌대부 금남군에 책훈 되었다. 전남 광주의 '금남로'는 그의 '군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광해군 때는 그나마 後金(청나라)과의 관계에서 실리외교를 하자는 "북인"들이 있었기에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중립외교가 비판받지는 않았다. 워낙 외교술까지 좋았기 때문에 무신이면서도 북방민족과의 외교까지 맡아 일했다. 그러나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들어선 뒤에는 탄압이 이어졌다. 명나라를 받드는 "서인" 때문에 지방 자리에만 임명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은 1만 2천 명의 병력으로 밀고 내려와서 한양까지 점령해버렸다. 원래 이괄과 '남이흥', 정충신 장군은 친한 사이였지만 임무에 강직한 충무공 정충신과 남이흥은 한양까지 이괄을 추격했다. 정충신과 남이흥은 겨우 2천 명의 병사로 뛰어들어 반군을 계략에 빠뜨린 후 이괄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반란군에게 한양까지 빼앗겼던 인조는 되돌아와서 이들을 치하했다. 그러나 청의 침략에 방비해야 한다는 이들의 충고는 무시되고 다시 지방관직으로 밀려났다. 여러 번의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휘말릴 때 인조가 보호해 주긴 하였으나,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외교술과 정보탐색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앉아서 큰소리만 치는 자들이 인조와 권력을 꿰찼기에 조선은 망국으로 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후금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늙은 나이에도 부원수르 제수받아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쟁이 끝났어도 중앙관리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충무공 정충신 장군을 귀양보내곤 했다. 청과 외교를 끊는 것은 전쟁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 이유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정충신은 포도대장에 올라 천민으로서는 최고의 성공을 이루었다. 여러 야사를 보면 정충신 장군의 인간성도 알게 된다. 어린 날 거둬들인 권율을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학문으로 인도한 이항복이 유배지에서 중풍에 걸렸을 때는 유배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돌봐줄 정도였다. 또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도 썩은 대신들 때문에 밀려난 그를 챙겨준 '장만' 장군을 끝까지 보필하며 따라다니기도 했다.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한 성품이 청렴하여 비리라는 것을 몰랐기에 가난을 벗어나질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충무공 정충신 장군이 유배를 떠났을 때는 가족들이 먹고살기 힘들어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출세하고 돈을 벌었다고 목에 힘주며 갑질을 하는 자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던 사람이었다. 전쟁에서는 지장으로, 적진에서는 외교관으로, 관리로서는 청렴함을 다했다. 남이흥과 정충신 장군이 요청한 대로 인조가 북방의 군비강화에 신경 썼더라면 병자호란에서의 고생을 면 했을 것이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이 노비에서 포도대장과 도병마사까지 오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함, 그것을 바탕으로 쌓아가는 유능함과 영특함, 이것은 어쩌다 운 좋게 신분 상승을 노리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일 것이다. 1633년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후금과의 외교적 절교를 알리는 국서를 가지고 후금에 가는 사신 김대건 일행의 길을 막고 의주에 머무르게 한뒤 오랑캐를 함부로 자극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정충신을 당진에 유배보내게 된다. 이로 인해서 정충신은 많은 시련을 겪기도 한다. 당시 조선의 국력이 쇠약한데도 대의론만 주창하던 척화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등거리 외교정책을 주장하며 국방력 강화책을 수차례에 걸처 상소하며 충절을 보였다. 이 때 그는 한 개인은 명분 때문에 죽을 수 있지만 한 국가가 명분 때문에 망할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1636년 향년 61세로 별세하여 서산군 지곡면 대요리 안장되었다. 공이 서거한지 49년 뒤인 1685년 숙종 11년에 충무라는 시호를 내려 충무공이 된다.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국사봉 동쪽 기슭에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사당인 진충사가 있다. 진충사에는 정충신 장군의 영정과 군복, 나무투구, 향로, 향합, 교지 등의 다양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명장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우이다. 창건연대는 조선 인조 14년 왕명으로 건립되었고 영조 13년 중수하였다. 5대손 곡성현감 세흥에 의해 당진군 정미면 신시리로 이건 되었다가 9대손 재칠대에 지곡면 대요리 740번지 종손가 옆으로 다시 이건되어 봉안해오다가 후손들과 대산의 김기풍 선생을 비롯한 지역유지들의 건의로 1970년에 지곡면 대요리 677 번지 지금의 자리에 신축하고 진충사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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