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城大捷 忠武公 金時敏 將軍과 朱論介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土城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須: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김시민(金時敏) 장군(1554. 명종 9 ∼ 1592. 선조 25)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장군은  목천(木川)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지평 충갑(忠甲)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그러나 실제 출생은 천안이며 무과 급제 후 진주판관이 되었는데 그 다음 해에 임진왜란을 맞는다. 그런데 당시 진주목사가 병사하자 김시민이 진주목사를 대행을 맡게 되었고,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고 거창에 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이 공로로 1592년 8월 진주목사에 임명됐다. 9월에는 또 진해에 가 왜군을 무찔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92년 10월 6일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시작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의 사또가 감히 진중(陣中)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 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external/www.nha...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하고 군기시에 들어가고 1581년 경기도 부평부사를 지냈으나 구황(救荒 : 자연 재해로 입은 피해를 구제함)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여진족의 니탕개(尼湯介)가 함경도 회령을 침략하자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참찬 겸 함경도 도순찰사 정언신의 수하 부장으로 이순신, 신립, 이억기 등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기개혁과 강화를 할것을 병조에 건의하자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는데 군개혁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소란을 일으킬 의도가 있다고 채택되지 않고 질타를 받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을 제수받고 195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게 되어 진주성으로 돌아와 진주백성을 안심시키고 성을 보수하고 군사를 모으고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왜적이 사천을 함락하고 진주성으로 진격하자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과 곽재우등과 합동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도망가는 왜적을 끝까지 추격해서 모두 소탕하고 왜적에 함락 당했던 경상남도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서 충청도 금산에서 경상도 거창으로 이동하던 왜군을 거창에서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1592년 7월 진주목사를 제수받았다. 진주목사로 진주성에 돌아온 김시민 장군은 화약과 총통등을 만들고 무기를 제조하는 부서를 별도로 만들어서 무기제조 생산 체계를 갖추고 진주성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김해에 있던 왜적 3만명은 음력 9월 24일 창원에서 경상우병마사 유숭인의 부대를 만나 그들을 패퇴시키고 창원을 점령 후 진주성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9월 27일 진주로 향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해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그 해 9월 경상도 진해를 함락한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진해로 출동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고 통정대부에 오르고 이어서 충청도 금산으로 출격해서 왜적을 물리쳤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에 부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래서 10월 4일, 일본군의 선발대가 진주성에 도달했다. 일본군은 공성전 이전, 주변을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만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유숭인의 경상우도부대를 전멸시켰다. 이를 본 진주성 사람들은 잠깐 동요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이제 곧 몰려올 폭풍우에 마음을 다잡은 뒤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유숭인의 부대는 전멸시켰지만, 성 밖에는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 부대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을 소탕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많은 병력으로 성을 포위하기까지는 했다.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여 장군은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왜군은 10월 6일 조총 일제사격을 시작으로, 공세에 나섰다. 이틀에 걸친 초전은 조선군의 완벽한 방어로 끝났다. 그러자 일본군은 병력을 일거에 휘몰아 쳐 나가기로 결정했다. 조선군이 끌려 나오지 않자, 일본군은 일제 공격을 감행했다. 김시민이 진주성을 지키는 양민들에게도 군복을 입혀 허장성세를 노렸으나, 일본군은 이미 숱한 전투 경험을 통해 어차피 저래봐야 진주성에 주둔 가능한 병력이 자신들보다 적다는걸 간파했고,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총공세에 나선 것이다. 빛발치는 포탄과 화살을 뚫고 일본군은 진주성에 거의 근접하여 조선군과 직접 백병전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선군민은 일본군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돌과 기왓장까지 던져가며 버텼고, 결국 힘에 부친 일본군들은 일단 후퇴하여, 다시 성밖에다 진을 쳤다.

조선군에게 제법 타격을 줬지만, 성벽은 건재했고 방어망은 굳건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조선의 의병들은 성 밖에서 일본군에 소규모 기습 공격을 하며 모기떼처럼 앵앵 거렸다. 일본군은 일단 주변에 알짱거리는 방해꾼들 때문에 공성전에 집중을 할 수 없다 판단했다. 비유하자면, 시험 문제를 풀려는데, 옆에서 모기 한 스무마리가 날라다니며 신경을 긁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의병들을 소탕하면서 성을 점령하자는 전술로 병력을 일부 나눴다.

지구에서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이 모기다. 하물며 곽재우, 최경회, 김준민 등은 그냥 모기도 아니었다. 그들의 전투력은 모기가 아니라 무슨 말벌과도 다름 없었다. 의병들은 말벌급 독침을 가진 말라리아 모기가 되어, 그들을 소탕하러 온 일본군 부대를 패퇴시켜 버리고 말았다. 진주성으로 돌격해 들어간 본대는 토성을 쌓고 그 위에서 사다리를 연결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자는 전술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 역시 진주성 민관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격퇴 되었다. 계속된 패전에 일본군은 힘싸움이 아닌 머리싸움으로 전환, 마치 후퇴를 한 것처럼 진중을 비우고 주변에 숨어서 진주성의 병력이 일본군을 추격해 나오기만을 조심히 기다렸다. 하지만, 일본군에 잡혀 있다 탈출해 성공한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일본군의 계책이 드러나며, 결국 일본군은 재차 총 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11월 8일 왜장 나가오카 다다오키가 이끄는 2만명의 대군이 진주성을 애워싸자 김시민 장군은 고을 백성들을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3,800명의 군졸과 함께 격전을 펼쳤다. 일본의 공세는 강력했다. 일본은 성벽을 오르는데 성공했고, 성에서는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혈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갈 무렵 경내를 순시하던 김시민 장군은 죽은 척 하고 시체 사이에 누워 있던 왜병의 총탄을 이마에 맞고 쓰러졌다. 시체 틈에 숨어 있던 일본군이 발사한 조총에 진주성 지휘관 김시민 장군이 이마를 맞아 쓰러지고 만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끝까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치료를 받으며 나랏일을 돌보던 김시민 장군은 1592년 10월 18일 결국 운명하고 말았는데 이때 장군의 나이 겨우 39세였다. 

진주성 전투는 군관민을 아우르던 리더쉽이 돋보인 가운데 김시민이 전사하자 바로 지휘권을 넘겨 받아 마무리를 지은 곤양군수 이광악의 대처능력 역시 빛을 발했다. , 진주성의 모든 군민은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일본군을 맞아 싸우며, 그들을 결국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더욱 컸다. 만여명의 병력을 갈아 엎었지만 진주성 함락에 끝내 실패했다. 더이상 싸울 힘을 잃어버린 일본군은 모두 퇴각했다. 아울러 그 강력한 일본군의 공격에도 밀리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조선군과 진주성에 있던 백성들 역시 일등공신에 부족함이 없다. 남자들은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저마다 힘을 다해 일본군과 싸웠고, 여자들도 무기를 나르거나 식량을 조달하며 그들을 도왔고, 급하면 본인들이 직접 기왓장을 집어 던지며 일본군을 타격하는 무공을 보여줬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민관이 힘을 합쳐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친 것이다. 이 제1차 진주성 공방전에서 얻은 귀한 승리는 진주대첩으로서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써,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케 한 전략상 중요한 승리였다. 왜란이 끝나고 1604년 선조는 선무공신 2등 상락군(上洛君)에 추봉하었다.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는 진주성에 창열사 (彰烈祠)를 건립하고 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때 순국한 분들을 모셨다. 1607년 선조는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모신 창렬사를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을 내리고 훗날 1702년 숙종대왕은 김시민에게 領議政을 추증하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또한 忠武公의 시호를 내렸다.  그의 사당인 충민사는 진주에 있지 않고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을 추증하고, 장군은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1866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때 진주의 충렬사가 없어지자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묘소를 이장하고 묘소앞에 충민사를 건립하고 신위를 배향하였다. 지금은 진주성 내의 창열사에도 배향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의병들의 공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성 안에서 군민과 합세하여 싸운 의병은 물론이요, 성 밖에서 일본군의 심기를 계속 불편하게 만든 의병들 덕분에, 일본군은 진주성 공략 작전에서 제대로 힘을 한데 모아 공격에 전념을 다할 수 없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는 이런 교란전은 실제 전투에 있어 영향을 매우 크게 주는 요소다. 전쟁 전, '일본군이 쳐들어 올 가능성은 없다.' 라며, 후대에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자리잡은 김성일 역시 진주성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경상도 초유사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의병들을 한데 모을 수 있었고, 하나의 조직처럼 진주성에서 유기적인 플레이로 의병들이 일본군을 요격할 수 있던 것도 김성일이 그들을 잘 아우르고 조율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진주성 전투는 전술적으로 볼땐 적은 병력으로 일본의 대군과 붙어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이싿. 덕분에 일본군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을 상당히 없앨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본다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이 또 다시 좌절되어 유보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냥 좌절이 아니라, 제대로 병력을 준비해 각잡고 덤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털려서 실패했다는 점이 일본군에게는 꽤나 뼈아팠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호남 진출 전략은 곡창 지대를 확보하자는 꿈도, 이순신의 수군 부대를 육로로 공격하자는 방안도 무산되었다. 사실상 이 때를 기점으로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며, 그들은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을 당했다. 요약하자면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가 진주성 전투인 것이다.

잡설이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힌 김시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듬해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진주성주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2차진주성 전투때, 진주목사가 김시민인줄 알고 그의 목을 베어 본국에 보내기도. 일본의 고전 문학 작품 중에 일본군을 괴롭히는 모쿠소 호간이라는 괴물이 나오는데, 그 모델이 된 주인공이 바로 김시민이라는 썰이 매우 유력하다.  남해에서는 이순신이 연승을 거듭하고 부산진까지 넘나들며 일본군의 숨통을 옥죄었다. 남도에서는 진주성에서 일본의 대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며 왜놈들이 그린 빅피쳐를 좌절시켜 버렸다.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서해로 나아가는 바닷길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왜군의 입장에서 해로를 이용한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므로 왜군은 바닷길을 포기하고 싸움에 필요한 군량과 같은 전쟁물자를 적군인 조선에서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 왜군은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노리고는 병력을 집결시켜 한산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진주성은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는데, 첫째로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간주하고서(엄밀히 말해 이와 같은 도요토미의 생각은 사실이다.) 공략을 명령했다.

진주성의 공북문은 진주성 북쪽에 위치해 있다. 공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절한다는 뜻이며 북은 북쪽으로 임금이 계신 곳을 말한다. 즉, 공북문은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을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공북문으로 진주성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김시민장군 동상이다.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라 불리우는 진주성 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 이름이 드높다. 성내에 있던 조선 관군은 화차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써 대항하였다. 더불어 임계영과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은 성외에서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나아가 홍의장군 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덧붙여 항우가 이끌던 초나라 군사와 장량의 고사를 생각해내고 이를 흉내낸 것일지는 몰라도, 곽재우는 피리를 불어 왜군의 군심을 흔들었다.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승리가 점차 목전에 다가오는 중 진주 목사 김시민이 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레 만인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싸움에 지친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한채 마침내 퇴각하였다.

선조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2만여명에 달하던 왜군에 맞서 진주성 안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모두 나섰는데 모두 3800여명에 불과했다. 3800명의 진주시민은 2만명의 왜군을 무찔러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싸움을 진주대첩이라 이른다. 1592년 10월 9일. 승전후 진주성을 순시하던 김시민 장군은, 죽은 척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군이 쏜 총을 이마에 맞고 쓰러졌다. 좌익장 이광악이 지휘를 이어받아 필사적으로 항전하여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1월 21일 왜적의 유탄에 맞은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39살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金時敏 장군의 손끝은 대마도를 향한다고 하는데,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한다.​

촉석루와 논개사당의 측면으로 진주성의 성벽과 남강의 푸른 물결이 어우러져 있다.

진주박물관​이나 김시민장군 동상,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공북문 등 진주성 안에는 눈여겨볼 명승지가 참 많고 그 장소마다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김시민 장군 전사 후 효종 3년 1652년, 진주성(당시는 촉석성)안에 장군의 사당 충민사가 건립되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1년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사라졌다. 진주성 안에는 창의사 김천일 장군 등을 모신 충렬사만 있을 뿐 김시민 장군의 사당을 볼 수 없어 부척 아쉽다. 충민사 복원이 안되는 것은 일제하인 1910년 김시민 장군을 향한 증오심과 민족혼 말살 정책으로 충민사가 있던 자리에 여과지를 만들어 그 흔적을 철저하게 없앴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官民이 玉碎한 제2차 晋州城 戰鬪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이 10만여 명의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전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지도부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


임진왜란 최대 비극 1593년 2차 전투성 전투를 앞두고 왜군은 김시민 장군의 죽음을 몰랐다. 일본은 군대를 총동원 진주성을 함락시킨다. 군인과 민간인 7만여명이 희생되었다. 진주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모든 거주민과 살아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심한 손실을 입어 전라도로의 진출은 좌절되었고, 조선군이 부산으로 이동하자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으며, 이후 진주성은 왜군의 방어선에서도 제외된다. 선조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愛國烈士 朱論介

최경회의 소실인 주논개(朱論介. 1574 선조7년 ~ 1593 선조 26년)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로 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유인하여 의암에서 함께 투신 순국한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 1593년(선조 26) 진주성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최경회·황진·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의기 논개 / 김은호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생으로, 성은 주(朱)이며, 1574년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생일이 1574년 11월 6일 저녁 때라 사주를 뽑아 보니 甲戌년, 甲戌월, 壬戌일, 甲戌시가 나와 완전히 개를 낳았구먼.. 하고 특이한 사주라 여겨 이름을 논개(개를 낳았네. ㅋ)라 지었다. 아버지 주달문은 신안군의 주촌의 훈장으로 생활했으며, 일찌기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사망했다. 그뒤 40이 넘은 나이에 딸 논개을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사망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했으며, 어린 조카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고 도망간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청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 관아에 수감된다.


1579년 장수 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리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어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했다. 1592년 18세에 최경회의 副室이 되고, 모친상을 당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3년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군사훈련할 때 논개는 병사들 뒷바라지를 했다.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하여 유린하며 끝까지 항거하던 김천일, 최경회 등의 장졸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양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고 있을 때 기녀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倭將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의암(義巖)으로 유인해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뛰어 내렸던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주논개는 열 손가락에 구리반지를 단단히 끼고 깍지를 끼어 왜장을 끌어 안고 의암에서 남강으로 뛰어 내려 순절(殉節)한 것이다. 주흥은 깨지고 익사한 두 시신을 건져낸 이후에도 논개의 깍지낀 손가락이 안 풀리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朱論介는 한민족 5,000년 역사에 빛나는 여류애국열사였던 것이다.

 

1721년(경종 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으며, 1739년(영조 15) 무렵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 출생지인 전북 장수에서는 논개의 음력생일인 9월 3일을 "장수군민의 날"로 정해 논개사당에서 제례를 지내며 각종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