遼東伯 忠武公 依柳將軍 金應河

김응하(金應河, 1580~1619)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철원 출신이다. 25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변방의 군직을 거쳐 선천군수(宣川郡守)를 역임하였다.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건주위(建州衛)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광해군 때 명나라와 후금(청)과의 전쟁에서,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광해군은 수시로 후금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무기를 수리하고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서울 주변 요충지의 방어 태세를 수시로 점검하였어. 나아가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기유약조1609’를 맺어 왜와 국교를 재개하였는데, 이것은 왜와의 관계를 안정시켜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광해군이 후금에 대해 잘 달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명과 후금 사이에서는 여전히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당시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하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곧장 조선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1618년, 마침내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자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조선에게도 국서를 보내 즉각 구원병을 뽑아 대기하라고 요구하였다. 자기들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주었으니, 이번 기회에 은혜를 갚으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이 고민하여 오랫동안 후금과 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결과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후금은 뜨는 해와 같다. 우리 병사들을 보내 명나라를 돕게 하는 것은 농부를 호랑이 굴에 들여보내는 것이다. 소중한 우리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보내는 답장에 “경솔하게 후금을 정벌하지 말고 다시 헤아려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구절을 집어 넣게 하였으나 명나라를 받들던 신하들은 小國이 大國에 대해 얘기할 내용이 아니라며 반대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즉시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리로 보면 명나라는 우리에게 부모의 나라입니다. 임진왜란 때 은혜를 입은 처지에 자식으로서 부모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명나라에 구원병을 보내서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야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당시 후금의 군사력은 생각하지 않고 후금이 오랑캐인 여진족의 나라라는 이유로 깔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임진왜란의 뒷수습을 끝내지 못하고 있던 조선이 명나라에 군사를 보내어 또다시 전쟁에 휘말린다면 백성들의 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몸소 임진왜란을 겪은 광해군은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에게 조선은 임진왜란을 끝낸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군사를 보내 도울 형편이 못 된다며 군대 파견을 미뤘다. 만약 명나라를 위해 군대를 보내더라도 국경 지역, 즉 압록강을 건너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 관계이면서도 부자 사이와 같다. 만약 명나라에 변란이 발생한다면 우리 조선의 임금과 신하는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달려가서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농병일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에 모이기는 힘들다. 더구나 이번 누르하치는 천하의 강적이다. …… 과인은 병사 수천 명을 뽑아 명나라와 국경이 가까운 의주 등지에 대기하게 한 뒤 위엄만 과시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 하다. - 『광해군일기』

 

명나라의 계속된 지원군 요청에 실리적인 중립 외교 정책을 펴던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선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후금에게도 '명나라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피치 못한 것’임을 알리려고 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1619년 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 姜弘立을 명나라로 보내는 13,000 구원군의 도원수로 임명하며 명군과 후금군 사이에서 유연하고 무리없이 행동하게 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다.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그대는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처신하라. 만약 후금의 힘이 더 세다면 항복한 후에 우리의 파병이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라.”

광해군의 예상대로 조·명 연합군은 날쌘 기마병 중심의 후금을 당할 수가 없었다. 조·명 연합군이 후금군에 패배한 가운데 강홍립은 군사들과 함께 후금에 항복하였다. 광해군의 밀명도 있었고 당시 조선의 구원군도 목숨을 많이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강홍립은 큰 피해를 막고자 재빨리 항복하였던 것이다.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조선의 군대 파병은 명나라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누르하치 또한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국내사정은 정반대였다.

 

신흥 강국인 청나라를 의식하였기 때문인데 청나라와 싸우던 1618년(광해군 10) 좌영장으로 참전하였던 김응하 장군은 전공을 세웠으나 이듬해 3월 전사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자신들을 돕다가 전사하였다고 김응하 장군을 높이 기려 그 보답으로 요동백(遼東伯)’이란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조선에서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하였다.

 

1665년(현종 6) 철원에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8년(현종 9)에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되었다. 포충사는 6·25 때 묘비(廟碑)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1974년에 김응하 장군묘비를 3군영내(三軍營內)로 이전했다가, 1984년 다시 현재 위치로 옮겼다. 비의 총 높이는 3.89m이며,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크기는 96㎝×215㎝×32㎝이다. 비문은 전·후면에 모두 새겨져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서로 제액(題額)을 썼다.

 

명나라를 사대하던 신하들은 강홍립이 의리를 저버렸다고 비난하며 그의 가족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을 변호하며 자신의 중립외교를 계속 펴 나갔다.

 

경들은 이 오랑캐 후금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나라 병력으로 잠깐이라도 오랑캐를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후금에 항복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 『광해군일기』

 

임란 때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망하게 된 것을 구해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명의 협박과 조정 신료들의 아우성에 광해군은 끝내 굴복하고 만다. 광해군은 요동파병군 도원수에 강홍립, 부원수에 김경서 그리고 조방장에 김응하(선천군수)를 각각 임명했다. 그러면서 1만3000명의 원군을 파견한다. 그러나 ‘이길 수 없는 전쟁’임을 뻔히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또 하나의 궁여지책을 세웠던 것 같다.

 

강홍립에게 “관형향배(觀形向背·정세를 살펴보고 행동하라)”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원군은 그야말로 느림보 행군을 펼친다. 1618년 7월 모인 파병군은 무려 7개월이 지난 이듬해 2월, 느릿느릿 압록강을 건넌다. 명나라군의 군사력은 정말 엉망이었다.

 

“중국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않을 방도를 강구하는데 힘쓰라.”(1619년2월3일 광해군일기)

 

“중국의 동쪽 군대가 매우 약하여 오로지 우리 군대만 믿고 있다니 한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당초 내가 염려했던 일이다. 군사들을 호랑이 굴로 몰았으니 (비변사는) 이 점을 생각하고 있는가.”(광해군 일기·1619년 3월3일)

 

애초부터 패할 전쟁이라는 것을 안 광해군은 강홍립에게는 “패하지 않을 방도만을 찾으라”고 지시했으며, 나중에는 ‘재조지은’ 운운하면서 파병을 강요한 신료들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강홍립은 몰래 밀사를 後金에 보내 明나라의 강요에 의해 출병했다는 것을 알리고, 조선은 後金과 적이 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3월 4일, 김응하 장군은 도원수인 강홍립이 싸울 의사가 없자, 군사를 주면 적을 무찌르겠다고 청하여 군사 5천명을 받아 明나라 군사와 연합으로 적진으로 향했다.

그러나 明군은 마을로 들어가자마자 싸우지는 않고 노략질만 하는 바람에 조선군만 後金군과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강홍립의 아군 지원이 없어 모두 전사하고 만다. 이날 전투는 낮부터 해질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김응하 장군은 혼자 남아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면서 수많은 적을 죽이고 결국 40세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한다. 김응하 장군이 결사항전을 하다가 전사하는 날, 도원수 강홍립은 後金에 항복한다.

강홍립이 항복하는 바람에 조선의 주력 부대는 별다른 희생이 없었다. 급기야 3월4일 조선 조정에는 조·명 연합군이 심하(深河·사르후) 전투에서 후금군에 궤멸당했다는 비보가 들린다.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김응하는 혼자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적은 감히 다가갈 수 없어 응하의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 데도 활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랑캐들조차 김응하의 분전에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일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 불렀습니다.”(광해군일기·1619년 3월12일)

 

죽어서도 오히려 잡은 활을 놓지 않고 노한 눈 부릅떠 충성을 생각케 했네.
그 용맹 참으로 삼군의 으뜸이니 살아서 항복한 두 장군 부끄러워라.
돌아간 날 밤처럼 옛 성에는 달이 밝고 전쟁터 피비린 바람이 가시지 않았기에,
지금도 요하를 지나는 나그네들이 버들 아래에 전사한 영웅을 이야기하네.



그런데 김응하의 결사항전과 달리 도원수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런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현명한 실리외교와 묶어 설명하고 있다. 즉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관형향배의 책략’에 따라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후금과 조선과의 관계가 더 악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됐지만 누르하치와 전장을 누볐고, 꾸준히 광해군에게 후금의 사정을 밀서로 알렸다.

 

그렇다면 파병군 장수인 김응하 장군의 장렬한 전사는 한낱 ‘개죽음’인가, 절대 ‘괜한 죽음’이 아니었다.

김응하 장군의 죽음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등거리 외교를 편 광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카드였다. 즉 광해군은 두 장의 카드를 쥔 셈이며, 한 장(강홍립의 투항)을 대후금 실리외교의 밑천으로, 다른 한 장(김응하의 전사)을 대명 명분외교의 재산으로 각각 쓴 것이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는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한편, 광해군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을 비롯한 남인과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인을 골고루 등용했으나,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반대파 정적들을 과격한 수단으로 제거했다. 이를 계축옥사(癸丑獄死)라 한다. 특히 1611년(광해군 3년)에 정인홍의 주장으로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한 사건은 유생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광해군의 급진적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큰 효과를 보았으나, 법가의 패도를 빌린 까닭으로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의 불만을 사게 되어 친명 인조반정으로 이어져 정묘,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충무공 김응하 장군은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철원 출신.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 1212 ~ 130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고, 평소부터 그의 무장적인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갈 때 비장(裨將 : 지방사신을 따라다니던 관원)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유가족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忠武이다. 비록 도원수의 지원 없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은 조선의 체면을 살렸고, 무인으로서의 떳떳하게 살아온 그의 군인정신은 오늘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산소는 장군의 아버지 산소보다 위쪽에 모셔져 있다. 그 연유를 물으니 전설적 답변이 돌아온다.

 

“장군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금 이 자리(장군의 묘 자리)에 아버님을 모시려 했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그곳은 빈장의 자리(빈 산소)이니 모시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네요. 덧붙여 바로 그 밑에 아버지 산소를 모시면 자손 중에 장군이 나온다고 했답니다.”

 

딱 맞았다. 훗날 아들 김응하는 장군이 되었고, 요동땅에서 누르하치의 후금군대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바람에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이곳에 빈 묘를 마련할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장군 덕분에 가문은 조선 대대로 빛이 났어요. 조정에서는 1년에 두 번씩이나 원을 들어주었어요.

(즉, 조상 덕에 과거없이 출사의 기회를 1년에 두 번이나 주었다는 이야기다. )

 

 

숙종에게 붙은 역질신명을 물리친 김응하 장군신명 -

명의(名醫)와 역질신명과의 한판 대결

당시 명성이 자자한 어느 의원이 있었다. 하루는 그 의원과 각별히 지내는 재상의 외아들이 병에 걸렸다. 물론 그가 약을 쓰게 되었는데, 진맥을 해보니 불행히도 역질신명에게 잡혀갈 아이였다. 원래가 편작과 같은 재주를 가진 의원이라 약을 잘 써서 아이를 구하려고 하였다.

 

역질신명은 밤낮으로 어린아이에게 병 기운을 넣어 잡아가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의원의 신이한 의술로 인해 그때마다 어찌할 수 없이 물러가게 되었다.
“네가 재주를 부려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방해하는구나! 그러면 나도 나의 수단대로 너를 꺾고야 말 것이로다.”
“허, 좋을 대로 해봐라.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의원도 역질신명의 농간에 조금도 물러섬 없이 병자를 살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에 크게 노한 역질신명은 고심 끝에 의원을 없애기로 하였다. 그 의원을 항상 불러들이는 임금을 병들게 하면, 그 책임을 물어 의원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작정을 한 역질신명은 그 길로 지체없이 대궐로 향했다. 그리고는 당시의 임금인 숙종에게 역질 기운을 넣어버렸다.

평소 건강하던 숙종은 갑자기 신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높은 열에 시달렸다. 숙종은 그만 시시각각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약을 바쳤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이름 높은 의원들이 진맥을 해보니 역질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그들이 약을 써봐도 효력은 커녕 병세가 점점 더하여 갔다. 급기야 제상의 아들을 치료하던 그 의원을 불러들였다.

의원은 신명의 조화임을 당장 알아챘으나 이번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좀체 궐 밖을 나올 수도 없었다. 임금의 곁을 조금이라도 뜨는 때에는 임금의 환후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재상의 아들 병세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의원은 지혜를 내어 열 발자국 간격을 두고 사람 하나씩을 세워 놓고 그가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재상의 아이 병세를 연락하게 하고, 또 약 처방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말이 오가는 동안 시간이 지체되어 제때 처방을 못 받은 재상의 아들은 급기야 죽고 말았다.

 

역질신명을 물리친 김응하 장군신명
숙종의 병세도 점점 더해 가기만 했다. 숙종이 눈을 감기만 하면 역질신명을 비롯한 여러 잡귀들이 몰려와 괴롭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고통 속에 지내던 어느 날, 숙종은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날까지도 날뛰던 잡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문 앞에 어떤 장수가 투구와 갑옷을 입은 채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숙종은 잡귀들이 보이지 않자 너무나 기뻤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장수를 불러 물었다.

“너는 누구냐?”

“요동백 김응하입니다. 소신은 상감께서 환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잡귀들이 들끓는 것을 보고 놈들이 못 들어오게끔 막고 있습니다.”

김응하라는 장수신명은 이렇게 아뢰며 예를 갖춰 몸을 숙이는 것이었다.
요동백 김응하는 조선 선조 때 출생하여 광해군 때까지 나라의 일을 하던 장수다. 그는 강직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만주 땅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에서는 조선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김 장군이 조방장으로 나가 싸워서 용맹을 떨치다가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가 일찍이 역병에 걸려 위중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그의 벗이 약을 가지고 김 장군의 병상에 이르니, 장군은 열에 이끌려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벗은 훌륭한 장군이 병으로 헛되이 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가 일찍이 나라 일을 하다가 싸움터에서 죽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되니 누가 그대를 알아주겠는가!”
이 말을 들은 장군은 별안간 눈을 번쩍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로다. 어서 약을 가져오라!”

김 장군은 그 자리에서 약을 세 사발이나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내 쾌차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생전에 역병을 물리친 바 있는 김응하 장군이 이런 연유로 하여 역병에 걸린 숙종에게 나타났던 모양이다.

그 후부터 숙종이 잠들면 어느 때나 김응하 장군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니 어떤 잡귀도 침범하지를 못하였다. 숙종은 침식이 편해졌고 병세도 차츰 차도가 있었다. 숙종은 오래지 않아 쾌차하였다. 이후 숙종은 그 보답으로 김응하 장군을 모신 충렬사에 사람을 보내어 정성껏 제사드리게 하고 따로 온정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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