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생체실험, 日帝 關東軍 731 石井部隊(이시이부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짐을 느낀 이시이는 더 야심적인 세균전을 제안했다. 대형 잠수함에서 수상 비행정을 출격시켜 로스앤젤레스에 세균 폭탄을 투하하자는 것이었다. 이시이는 미국이 네이팜탄을 사용해 일본군 병사들을 숯덩이로 만들고 있으므로 일본이 세균무기를 사용해 미국인 수백만 명을 살상하는 작전 또한 정당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군 장군이 “미국을 상대로 세균전을 벌인다면 후환을 감당할 수 없다”라고 거부함으로써 전쟁수단으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시이가 이른바 의학 발전을 이유로 731부대를 지휘했다는 명분조차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가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비밀부대이다. 1936년 일제의 만주 침공 때 설립됐고 1945년까지 생체 해부 실험과 냉동 실험 등 치명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하며 생물·화학 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통나무'란 뜻으로 생체실험 대상자를 가리키는 말인 '마루타'는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 등 전쟁포로와 그 외 구속된 사람들이었고, 3000명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에겐 '이름'이 없이 번호가 부여돼 '사람'이 아닌 '생체실험의 재료'로 취급됐다. 731부대 존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던 일본 정부는 최근 그 존재를 인정하기 했지만 구체적인 증거 자료는 찾지 못하겠다, 확인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731부대 - 관동군 방역급수부, 関東軍防疫給水部, 石井部隊(이시이부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비밀부대이다. 1936년 일제의 만주 침공 때 설립됐고 1945년까지 생체 해부 실험과 냉동 실험 등 치명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하며 생물·화학 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731부대는 8개 부서와 4개의 지부로 나뉘었는데 이곳에 종사한 군의관들은 대학 출신의 의학자와 과학자들로 구성됐다.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불리며 공식적으로는 '방역과 정수', '전염병 예방' 등의 임무를 띤 부대로 위장했다.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는 이 부대의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후 1941년 '만주731부대'로 명칭을 바꿨다. 학계는 현재까지 발견된 일본 측 과거 기록물 등을 토대로 1940년 이후 해마다 600여명의 수용자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돼 731부대의 생체 실험 희생자가 최소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루타

'통나무'란 뜻으로 생체실험 대상자를 가리킨다. 1936년부터 1945년 여름까지 일본 관동군 만주 제731부대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 등 전쟁포로와 그 외 구속된 사람 등 3000명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수용자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조선인도 많았다. 마루타에겐 '이름'이 없었다. 다만 번호가 부여돼 '사람'이 아닌 '생체실험 재료'로 취급됐다. 실험에 동원된 마루타는 남녀노소를 불문했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됐다. 실험과 해부는 모두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는데, 이는 실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험내용

731부대에서 자행된 실험은 워낙 분야가 다양했다. 그중 우선순위는 전쟁에 투입되는 군인들을 위한 실험이었다. 731부대의 인체 실험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실험이 바로 동상 실험이다. 일본은 남방에서도 전쟁을 벌였지만 만주 등 추운 지방에서도 전투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추운 지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동상에 대한 피해였다. 731부대는 실외에 마루타를 알몸으로 세워두고 물을 뿌리면서 온도별로 얼마나 빨리 몸이 얼고 동사하는지 실험했다. 마루타의 손이나 발을 얼려서 뜨거운 물에 넣었더니 살이 터지면서 살점이 모두 흩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실험, 얼린 손발을 도끼로 때렸더니 얼음조각처럼 부서졌다는 실험도 있었다. 특히 민족별로 추위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아내기 위해 여러 민족으로 나누어 실험하기도 했다.

착혈(搾血) 실험도 중요한 연구 과제였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장병에게 수혈할 피가 항상 모자랐기 때문에 희생자한테서 피를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짜내기 위한 실험이었다. 온몸의 피를 빼내는 데는 대형 원심분리기가 동원됐다. 또 정맥에 공기를 불어넣거나 거꾸로 매달면 몇 시간 만에 죽는지를 알아내는 기상천외한 실험들도 자행됐다.

다방면에 걸친 인체 실험 중에서도 독가스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한 실험 또한 매우 비중 있는 실험이었다. 전쟁터에서 독가스를 사용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바람 때문에 적군만이 아니라 아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군 사이에 독가스가 퍼졌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 수많은 독가스를 하나하나 구분해 사람이 몇 초 만에 죽는지, 특히 육체가 어떻게 썩는지를 실험했다.

독가스는 실전에도 사용됐다. 1937년 1월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최루성 독가스가 사용됐고 1938년에는 타이얼촨에 독가스를 살포했다. 1939년 7월에는 남부 전선에서 더욱 강력한 미란성 가스가 사용됐다. 이시이가 제조해 일본군이 비행기로 살포한 독가스탄은 종전 때까지 무려 1,600여 차례 사용됐는데 이 독가스탄으로 사망한 중국군과 민간인은 57만 명에 이른다.

 

살아있는 사람을 총칼로 찌르고, 매독주사를 놓고, 한겨울에 사람을 묶어두고 팔에 찬물을 계속 부어 팔을 얼게 만들었다가, 그 후 뜨거운 물에 팔을 넣어 동상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밀폐된 공간에서 공기를 줄이고 압력을 높여 사람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하고, 가스를 주입해 아이와 엄마가 얼마나 버티는지에 대한 실험도 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일부 수용자는 위가 절제돼 식도와 장이 연결되는 실험을 당하고, 또 일부 수용자는 뇌, 폐, 간 일부가 제거되기도 했다고 한다. 피부 표본을 얻기 위해 실험 대상의 피부가 산 채로 벗겨졌고, 의식은 살아있는 반 시체 상태의 실험자가 불태워졌으며,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해 각각 상대방의 국부에 이식하는 성전환수술 실험도 있었다고 한다.

 

1947년 미 육군 조사관이 도쿄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43년까지 부대에서 만든 인체 표본만 해도 페스트 246개, 콜레라 135개, 유행성출혈열 101개 등 수백개에 이른다. 생체실험의 내용은 세균실험, 해부실험, 동상연구를 위한 생체냉동실험, 생체원심분리실험, 진공실험, 신경실험, 생체 총기관통실험, 가스실험 등이었다. 페스트균을 배양해 지린성 눙안과 장춘에 고의로 퍼뜨린 뒤 주민들의 감염경로와 증세에 대해 관찰했고, 이로 인해 중국인 수백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패전에 따른 부대해체 이후

일제는 1945년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731부대가 강탈당할 것을 우려해 모든 부대시설을 파괴하고 철수를 명했다.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공병대가 긴급히 투입돼 9일부터 4일동안 본부동을 제외한 주요건물들을 모두 폭파했다. 당시 생존해 있던 150여 명의 마루타들까지 모두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끔찍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이시이를 비롯해 731부대 관련자 중 누구도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지 않았다. 미국이 인체실험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관련자 전원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래로 731부대의 만행은 묻히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일명 ‘세기의 재판’이 독일 뉘른베르크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 지도자들을 법정에 세워 전범으로 처단했다. 침략 전쟁과 전쟁이 남긴 참화에 대해 전범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것이다.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도쿄 법정’이라고도 한다. 도쿄 법정은 1946년 1월 19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특별성명서’와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에 따라 설치됐는데 평화에 관한 죄, 통상적인 전쟁범죄, 인도(人道)에 관한 죄 중 평화에 관한 죄로 기소된 중대 전쟁범죄자만 심리 · 처벌함을 목적으로 했다. 평화에 관한 죄는 ‘침략 전쟁 또는 국제법 · 조약을 위배한 전쟁’을 계획 · 개시 · 수행하는 과정에서 범한 죄 또는 계획 · 모의에 참가한 개인 · 단체 구성원이 범한 죄로, 중대 전범자는 A급 전범자로 규정됐다.

1946년 2월 18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재판장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W. F. 웹을, 미국 · 영국 · 프랑스 · 소련 · 중국 · 인도 · 네덜란드 · 필리핀 · 뉴질랜드 출신 재판관 열 명과 미국인인 J. B. 키낸을 수석 검사로 하는 검사 30여 명을 임명했다. 4월 29일 도조 히데키 이하 28명이 A급 전범자로 정식 기소됐다.
1948년 11월 12일 법정은 심리 중에 사망한 마쓰오카 요스케, 나가노 오사미와 정신이상을 일으킨 오카와 슈메이를 제외한 25명에 대해 전원 유죄를 인정해 일곱 명에게 교수형을, 열여섯 명에게 종신형을 내리고 한 명에게 금고 20년 형을, 한 명에게 금고 7년 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당초 A급 전범으로 지목돼 사형 판결을 받으리라 예상한 이시이 시로는 석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행위를 자행한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석방됐다는 소식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1981년 일본인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가 다큐멘터리 '악마의 포식'을 발표하며 731부대의 만행을 파헤쳤다. 또 중국은 2014년 1월 1950년대 발굴된 731부대 기록물을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일본이 파괴한 731부대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일본정부는 731부대의 실체를 부인하다 50년이 지난 후에야 부대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 자료는 찾지 못하겠다, 확인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운데 패전 70년을 맞은 일본에서 의사들의 양심적인 자기반성이 나오기도 했다. 2015년 4월12일 일본 의료·보건산업 종사자, 시민단체 등이 모여 '역사에 입각한 일본 의사 윤리의 과제' 특별행사를 열고 731부대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증언, 관련기록 등을 공개했다. 이들은 또 일본정부를 향해 “731부대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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