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代表文人畵家 玄齋(현재) 沈師正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3원(園) 3재(齎)가 꼽히는데, 3원이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3재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을 일컫는다. 18세기에 유행한 화풍은 크게 진경산수화풍과 풍속화, 남종화풍인데, 그중 진경산수화풍은 정선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풍속화는 조영석에 의해 틀이 갖추어졌고, 본래 중국화풍이던 남종문인화풍은 심사정에 의해 토착화되어 조선 화단에 뿌리내렸다.

심사정의 그림은 외래의 화풍을 모방했다는 비난도 따르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히 중국의 화풍을 답습하거나 모방한 단계를 뛰어넘어 보편적 이상의 세계, 화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고 평가된다. 문인화는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조선의 토착미를 농후하게 풍기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 독창성이 덜 부각되기 때문인지 오늘날 그는 다소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조선 시대에는 그의 명망이 정선 못지 않았다.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 후기 문신 김조순은 “겸재(정선)의 그림은 말년에 더욱 공교롭고 신묘해져 현재(심사정)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며 세상에서는 겸현(謙玄)이라고 일컬으나, 아취(雅趣)는 현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玄齋) 심사정 (沈師正 1707년 숙종 33 ~ 1769년 영조 45)은 죽창 심정주와 하동 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묵선(墨禪)이다. 현재라는 호는 명나라 말 남종화풍의 대가인 동기창(董其昌)의 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자 효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증손이며, 〈고산방학도〉를 그린 문인화가 정유승의 외손이다. 셋째 큰할아버지 심익현은 서예가로 유명했으며, 아버지와 육촌형 심사하가 문인화에 뛰어났다. 이런 집안 환경 덕분인지 심사정은 서너 살 무렵부터 스스로 사물을 그리는 법을 터득하여 재능을 떨쳤다고 하며, 10세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가가 당대의 명문이었음에도 그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할아버지 심익창이 성천 부사로 재직할 무렵 과거시험과 관련해 부정을 저질러 유배형을 당하면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심사정이 태어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후 심익창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의 영조) 시해 기도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크게 비화되지 않았으나 영조 즉위 후 표면으로 드러나 심익창이 극형에 처해지면서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심사정이 18세 때의 일이다. 다행히 심사정은 아버지 심정주와 함께 화를 면했으나 이후의 삶은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심사정은 어린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사사했으며, 집안이 몰락한 이후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26세 무렵에는 화가로서 크게 명망을 떨쳤으나 역적 가문의 자손인 그에게 드러내 놓고 그림을 주문하는 이도, 교유를 청하는 이도 없었기에 고독과 가난 속에서 살았다. 그림에 있어 당대 1인자였으나 굶주림 속에 세상을 떠났고, 몹시 가난하여 시신을 염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가문의 업 때문에 관직 진출도, 정상적인 교유 관계도 맺을 수 없었던 그에게 그림만이 유일하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림 한 점 한 점에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다. 중국 대가들의 그림을 본받아 그리면서 필법을 연마했으나 단순히 본떠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필법을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자신만의 시정(詩情)을 담아 재탄생시켰다. 조선 시대 문인화가들이 취미로 그림을 그린 것과 달리 그에게는 그림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선의 화가 중 그만큼 수많은 모사를 한 화가도, 자기화하여 새로이 탄생시킨 화가도 없었다.


송나라 마원의 그림을 모작한 〈방마원산수〉에서는 마원의 북종화풍을 남종화풍으로 재해석했고, 송나라 미불의 그림을 모작한 〈방미남궁산수〉에서는 미불의 미점(米點)법각주1) 을 묵법으로 변용했다. 이런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는 대담하고 활달한 담묵(淡墨, 엷은 먹)과 농묵(濃墨, 짙은 먹) 사용부터 세필(細筆)을 이용한 정교한 묘사, 수묵(水墨, 색이 엷은 먹물)과 담채(淡彩, 엷은 채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이런 심사정에게 42세 때인 1748년(영조 24) 일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1월 17일 선원전(璿源殿)의 어진들을 보수하기 위해 영정모사도감각주2) 이 설치되었고, 도화서 화원들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대부들이 선발되었다. 그중 한 사람으로 심사정이 천거되었는데, 이는 역적 가문인 청송 심씨의 자손이 아니라 큰외할아버지인 정유승의 예(例)에 따른 것이었다. 보통 어진이나 의궤 제작에 참여하면 이후 관직에 제수되거나 관직을 높여 주는 일이 흔했으므로, 심사정으로서는 관직 진출의 길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월 25일 역적 가문의 자손이 국가 주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그 길로 심사정은 파직되었다.

파직 사건이 있던 이듬해 단 하나의 의지처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완전히 혼자 남은 그는 그림에 더욱 매진했다. 그의 작품들은 졸작이나 범작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니, 이는 한 점 한 점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손질하고 성실한 태도로 그림에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기법을 익힌 것만큼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무엇 하나 부족하거나 서툰 것이 없다. 〈딱따구리〉, 〈황취박토도〉, 〈노안도〉 등과 같은 영모, 〈연지쌍압도〉 등과 같은 화조, 〈파초와 잠자리〉 등과 같은 초충도 등을 비롯해 〈갈대 탄 달마〉, 〈하마선인도〉 같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등 수많은 화재를 그렸는데, 무엇보다 그가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산수화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촉잔도(蜀棧圖)〉 등이다.


〈호취박토도〉

 

41세 때인 1747년 그린 〈강상야박도〉는 중년 시절의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무성하게 숲이 우거진 가운데 광활한 산세가 고즈넉하게 펼쳐진 그림으로 두보가 지은 〈춘야희우(春夜喜雨)〉의 한 구절인 ‘들길은 구름과 함께 어두운데, 강가의 배만 불이 밝구나’가 쓰여 있다. 화면 전체에 애잔함과 적막함이 물씬 배어나오는데, 이런 정서 작용은 조선의 산수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미불과 예찬의 화풍을 따르고 있으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개성적,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이룩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1766년에 그린 〈파교심매도〉는 화가가 만년에 들어서 이룩할 수 있는 절정의 기교와 예술성이 한데 담겨 있다. 중국 시인 맹호연의 고사에서 소재를 취한 것으로, 맹호연은 평생 유랑과 은둔 생활을 하며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읊은 인물이다. 아직 눈이 쌓인 이른 봄, 맹호연이 봄소식을 기다리며 매화를 찾아 나귀를 타고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는 고사를 묘사했다. ‘현재 필치’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먹선과 은은하게 펼쳐진 담채 기법으로 화면 전체가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이다.


〈파교심매도〉

 

1768년에 그린 〈촉잔도〉는 심사정의 마지막 작품이다. 촉잔도란 산수화의 화재 중 서촉(西蜀)으로 가는 험난한 풍경을 다룬 것을 말한다. 8미터 18센티미터의 장폭 두루마기에 그린 대작으로, 이 한 폭 속에 심사정의 모든 필치가 담겨 있어 ‘심사정의 회화 이력서’라고 일컬어진다. 연달아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깊은 계곡들이 장대하고 웅장하게 펼쳐진 한편, 우수가 깃든 서정을 은은하게 뿜어낸다. 심사정은 1769년 6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화가로서의 명망에 비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다 할 만큼 불우하고 고립된 삶 속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려 나간 불행한 일생이었다. 다음은 7촌 손자 심익운이 쓴 묘지명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초충(草蟲圖)


자국괴석도

딱따구리

鳥蟲圖

매월만정(매화와 달이 뜰에 가득함)

베짱이가 이슬을 마심

금낭화가 나비를 부름

원추리와 벌나비

징미와 나비

벌나비와 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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