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청산리전투(青山里戦闘)

김좌진

김좌진() 장군


靑山里는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주위의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였다. 청산리 계곡에는 200여 호 정도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많은 주민들은 대종교 신도였으며, 이 계통에서 운영하는 청일학교·의합천일학교 등이 있었다. 따라서 청산리는 독립군이 운집하고 활동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일본군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이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동만주지방의 한인사회에서는 이미 일본군의 출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에 따라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월등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지형이 험준하지만 독립군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던 백두산 일대가 적당하다고 보고,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산리전투는 이처럼 독립군이 이동하는 중에 추격해오는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격돌한 전투였다.


青山里戦闘(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벌인 전투를 말하는데 김좌진()ㆍ나중소()ㆍ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홈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일대에서 10여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를 말한다.


이미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는 한편,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 ()ㆍ김좌진ㆍ이장녕()ㆍ김규식()ㆍ최해()ㆍ정훈()ㆍ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西)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한편,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1920년 10월의 혼춘사건()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 관동군의 간도출병에 앞서 중국군 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 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의 경계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ㆍ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하여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縣)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자,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하여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투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다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청산리전투의 첫 싸움은 청산리에서 계곡을 따라 10여리 올라간 백운평에서 10월 21일 아침 야마다() 연대와 김좌진의 부대 사이에 있었다. 김좌진은 지형조건을 십분 활용하기로 하고, 비전투원으로 구성된 제1제대는 후방에, 이범석이 지휘하는 제2제대는 최전선에 배치하고 일본군 추격대가 매복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90여명의 야스가와(安川) 소좌의 전위부대는 오전 9시경 독립군이 매복해 있는 곳까지 다가왔고, 이때 300여명의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본군을 향해 집중사격하여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중무장한 야마타()가 지휘하는 연대의 주력부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게 되자,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김좌진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와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오후 늦게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명이 전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군복의 색깔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함께 공격했던 것이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ㆍ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어랑촌 ()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부대의 일부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도 백운평전투 다음 날인 22일 오전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천리봉에 지휘부를 설치한 홍범도는 일본군의 계략을 간파하고 독립군 부대를 둘로 나누어 매복하고 있다가 남북 양측에서 나타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400여명을 사살하였다. 싸움은 22일 오전 9시 300여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연대 사이에 시작되어 저녁 7시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전투에서는 김좌진 부대가 밀렸으나 홍범도 연합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부터 싸움에 가세하면서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졌다. 1,700여명의 독립군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1000여명의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싸움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으며, 독립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소분대로 나누어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23일의 맹개골전투과 만록구전투, 24일과 25일의 쉬거우전투와 천보산전투, 25일과 26일에 걸쳐 있었던 고동하전투에서 독립군은 승리를 거두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백운평전투와 완루구전투를 마친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다시 어랑촌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였다. 어랑촌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신속히 대피하였다가 곧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에 대하여 역습을 감행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였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가서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 두고 안도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명에 그쳤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 정서군의 병력은 그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하여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종군장교 이민화()ㆍ김훈()ㆍ백종렬()ㆍ한건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 제1중대장 서리 강화린(),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대대부관 김옥현() 등이었다.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ㆍ국민회군ㆍ의군부ㆍ한민회()ㆍ광복단ㆍ의민단ㆍ신민단 등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1. 역사적 배경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김좌진·이장녕()·김규식()·최해()·정훈()·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西)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이때 관동주와 남만주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關東軍)의 시초이다. 이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그 밑에 있던 육군부가 독립하여 관동군사령부가 되었다. 즉, 관동군은 일본이 중국과 소련을 침략할 목적으로 1906~45년에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하고 있던 육군 주력부대다.

관동군은 일본 군국주의의 중국 침략의 첨병이 되어 장쭤린[張作霖] 폭살사건(1928), 만주사변(1931) 등을 일으켰고, 1932년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국을 설치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특히 1932년부터는 관동군사령관이 주만(駐滿) 대사를 겸하면서 중국 동북지방 전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관동군의 군사력도 대륙침략정책의 확대와 대소전쟁 준비에 따라 계속 증강되어 1933년에 10만 명이었던 병력이 1941년에는 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관동군은 소련에 대해서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1938), 노몬한사건(Nomonhan 事件:1939) 등 군사도발을 계속했고, 독소개전 때에는 관동군 특별연습을 행하여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동북지방의 중국과 한국인의 항일무장세력의 암살에도 열중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에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쳐들어온 소련군의 공격으로 관동군은 급속히 궤멸되었으며, 8월 19일에 관동군 사령관이 무조건 항복을 하자 관동군은 없어지게 되었다.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관동군(關東軍) 사령부

만주의 관동군(關東軍) 사령부


2. 경과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의 혼춘사건()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앞서 중국군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의 경계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부대는 10월 10일경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자,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했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야마타()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랑촌 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해 신속히 대피하였다가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였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3. 결과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 명 사살에 2,100여 명이 부상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 명에 부상자 220여 명 정도를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김훈()·백종렬()·한건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대대부관 김옥현(玄) 등이었다.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최대의 승첩(勝捷)이었다. 이를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라고도 부른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을 학살하고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10월 말, 일본군은 용정촌 장암동에서 40대 이상 남성 주민 33명을 포박한 채로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으며,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칼로 찔러 몰살시켰다.

5~6일 후 일본군은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다시 마을로 가서 가족들에게 시신을 한곳에 모으게 한 뒤, 시신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처럼 일본군은 10월부터 2개월간 서북간도 8개 현에서 3,600여 명의 한인을 살해하고 170명을 체포했으며, 부녀자 70여 명을 겁탈했다. 이들은 또 가옥 3,200채와 학교 41곳, 교회 16곳을 불태웠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학살사건이라고 부른다.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


청산리대첩 승리 기념촬영

청산리대첩 기념촬영 : 좌측에 앉아계신 분이 김좌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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