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洪範圖) 장군 一代記

  • 권태일(085)
  • 2020-07-29 07: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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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나 독립군이 일제와 무력항쟁을 벌일 적에 가장 절실하게 소망했던 것은 ‘교전당사국의 인정’이었다. 우리나라는 일제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을 넘겨주었다. 전쟁도발국의 선전포고도 없었던 것이요, 의병이나 독립군은 일본 국내법에 의해 폭도로 다루어졌다. 의병과 독립군은 포로문제 등 국제법이 규정한 최소한의 보호를 열망했다. 이리하여 교전당사국으로 인정해 줄 것을 국제적으로 호소했으나 ‘국내에서 일정 기간 일정 지역을 점령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등의 요건을 들어 번번이 거절당해 왔다.

이런 현실에서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1868 고종 5년 ~1943)의 활동상은 바로 교전당사국 인정에 하나의 사례로 제시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활동이었고, 의병에서 곧바로 독립군이 된 케이스라는 의의를 갖는다. 그의 군사활동은 우리의 의병, 독립군 할 것 없이 가장 장기간에 걸쳐 가장 큰 전과를 올린 경우에 해당된다. 홍범도는 봉오동과 어랑촌의 항일전쟁에서 일대 승리를 거둬 민족사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홍범도의 태생 배경과 소년시절의 내력은 그동안 여러 설이 얽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한번 정리해본다.(강용권 · 김석 공저의 《홍범도장군》에 의거, 연변인민출판사)


그의 출생지는 평양 서문 안에 있는 문렬사 부근으로 밝혀져 있다. 그의 아버지 홍윤식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민이었다. 홍윤식의 증조부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동에 살았는데 ‘홍경래난’을 이끈 저 유명한 홍경래와 가까운 일가붙이여서 홍경래의 거사가 실패한 뒤 평양으로 도망쳐 와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고 그의 어머니는 고아로 외가에서 자라다가 혼인을 했다. 홍범도가 태어날 때 영양실조에 걸린 그의 어머니는 산고로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심봉사처럼 어린애를 안고 집집을 다니면서 동네 젖을 먹여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마저 죽었다. 그는 가난한 숙부 집에서 자랐으며 조금 커서는 떠돌이생활을 하다가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는 한문학당에 다닌 적이 없었다. 겨우 조선문(한글)을 통했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았고 지혜가 출중하여 특히 병법의 사람 부리는 법에 정통했다. - 〈홍범도일지〉

그의 나이 15세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평양에 지역방위군인 진위대를 설치했다. 군졸을 모집할 때 17세 이상이라는 규정을 두었는데 그는 두 살을 속이고 지원해 합격했다. 그는 진위대 우영(右營)에 배치되어 취호수(吹號手, 나팔수)로 3년 동안 복무하다가 탈출했다. 군인생활이 너무 단조로워 권태를 이길 수 없었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꿈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의 제지소에서 3년간 일했다. 1891년경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2년간 상좌로 있으면서 지담(止潭)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승군(僧軍)의 활동 등에 대해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이 절에 있으면서 신충사에 있는 비구니 이옥녀와 열애를 한 끝에 임신을 시킨 것이다. 그는 이 처녀와 해로하기로 결심하고 함께 처가가 있는 함경도 북청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원산에 이르러 이옥녀를 탈취당하고 말았다.


원한을 품고 다시 유랑생활을 하던 중 하루는 강원도 희양군 덕패장터에서 예사롭지 않은 사냥꾼을 만났다. 그는 사냥꾼을 따라 밀림으로 들어가 창법과 검법을 익혔다. 그는 태백산 밀림에서 수렵생활로 나날을 보내면서 담력을 키웠고 호랑이를 잡는 따위 무술을 익혔다. 그가 수렵생활을 하는 사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고 청일전쟁도 일어났다. 그는 산중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타도에 앞장서기로 작정했다. 홍범도는 늙어서 옛 일을 회고하면서 “일찍이 갑오년 농민이 폐정개혁과 외세척결을 기치로 기의(起義)할 때 나는 처음으로 반일 반봉건 의식이 싹터 여기에 뛰어들기로 했다”고 말했다.(《홍범도장군》) 그는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한 전봉준이 잡혀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기가 일어났다고 했다. 다음 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강원도 철령(鐵嶺)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14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 의병과 연합하여 싸웠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체포를 피해 돌아다니다 북청에서 산포수(山砲手) 생활을 하면서 소규모 항쟁을 계속했다. 1895년 8월, 홍범도는 길을 가는 도중 황해도 서흥에 사는 김수협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몰아내자는데 뜻을 맞추었다. 무엇보다 무기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두 사람은 철령을 근거지로 삼기로 합의했다. 철령은 원산에서 서울로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때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일본군 1천여 명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포수차림으로 뛰어나가 그들 앞에서 달아나는 시늉을 했다. 동정을 엿보려는 시험이었다.

다음에는 일본군 12명이 올라오는 모습을 포착했다. 두 사람이 맹렬히 사격을 해 대자 그들은 장총과 배낭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처음으로 일본군의 장총과 탄약무기를 탈취했다. 무기를 안변군의 마을로 옮긴 이들은 의병 40여 명을 모집했다. 두 사람은 의병 지원자들에게 한 달 동안 군사훈련을 시키며 병법을 가르쳤다. 홍범도는 누구보다도 이들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전술을 가르쳤다. 두 사람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변 석왕사를 거쳐 철원 보개산으로 진출했다. 마침 그곳에서 남쪽에서 올라온 유인석 의병부대 100여 명을 만났다. 여기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완전 실패했다. 의병들은 모조리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고 김수협이 전사하고 말았다. 첫 번째 맛본 패배였다.

몸을 피한 홍범도는 황해도 연안의 한 금광으로 피신했다. 그는 금광에서 일을 하던 중 일본군 기병 3명을 때려눕히고 탄약 300발과 양곡 등을 탈취했다. 그는 이 물건을 강원도 덕원의 한 절간에 보관했다. 홍범도는 덕원읍에 탐관오리인 좌수 전성준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일본돈 8,480원을 빼앗고 그를 끌어내 교외에서 처단했다. 또 평안도 양덕으로 도피한 뒤 일본인, 친일파, 부정한 벼슬아치와 부호를 찾아내 처단하고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3년 동안 단독으로 활동을 했다. 말하자면 의적을 자부하며 떠돌이 의협생활을 한 것이다.

그가 북청으로 와서 수렵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우연히 이옥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헤어진 지 7년 만에 상봉한 것이다. 이옥녀는 그의 7세 된 아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7년 동안의 떠돌이생활을 끝내고 가정을 꾸려 7년 동안 살면서 둘째 아들도 두었다. 그는 이 7년을 회고하면서 가장 안정되고 평온한 생활을 누렸다고 했다. 이때 그는 화전과 사냥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명포수로 이름을 떨쳤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반일투쟁의 물결이 크게 일었다. 홍범도는 포수조직인 엽인계(獵人契)의 대장인 포연대장(捕捐隊長)으로 추대되어, 포수에게 부과하는 세금문제로 함경감영에 끝까지 맞서 끝내 과중한 납세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포수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그는 이 땅의 하층민이 겪어야 할 모든 역정을 걸었으며, 하층민에게 가해지는 모든 압제와 굴레를 겪었다. 그는 이렇게 밑바닥을 살아가면서 천자문 한줄 배울 기회도 갖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등지에서 반일투쟁에 나섰다.

1907년에 들어 일제는 우리 민중의 무장항쟁을 억누르고자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했다. 일본의 국경수비대는 백두산 일대 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거나 검거하기도 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일제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만들어 항쟁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함께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포수·농민 들을 모아 다시 기병했다.  처음에는 600~700명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기동 유격전술을 펼쳤으나,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공세에 나서자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한 매복·기습 전술로 전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2월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이원·단천·혜산 등지에서 37회에 걸친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사주하여 아내 이씨(李氏)를 체포·처형했다.

이해 11월, 홍범도는 태양욱(太陽郁), 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포수들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후치령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고 우편마차를 탈취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하기도 하고 군용화물차를 습격하기도 하면서 갑산, 혜산진, 삼수, 풍산 일대를 교란했다. 이렇게 해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군량도감 등 부대의 진용을 갖추고 격문 포고문을 돌리면서 약 3년 동안 게릴라 전법으로 37회의 전투를 벌였다. 의병들은 구식 군대를 영입하고 대포와 탄약을 자체 생산했다. 일제는 성진의 군대까지 동원했으나 맞대응하기가 어려워지자 회유와 귀순 공작을 폈다.

차도선이 귀순공작에 넘어가고 태양욱은 함정에 걸려 체포당하고 말았는데 일제는 끊임없이 홍범도의 귀순공작을 벌였다. 1908년에 들어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부는 홍범도 귀순공작의 한 방법으로 그의 가족을 잡아들였다. 일제는 이옥녀에게 귀순을 강요하고 남편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라고 압박했으나 그녀는 입을 다물고 끝내 응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을 받아 구류소에서 죽었다. 그의 큰아들 용범은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작은 아들 용환은 살인범으로 몰려 고문을 받은 뒤 폐병으로 연해주에서 죽었다. 그는 늦은 나이에 독신이 되었다.

홍범도는 극심한 가정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계속 반일투쟁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늘 고민한 것은 탄약을 공급할 수 없는 점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던 의병들은 강력한 일본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갔다. 그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탄약 지원교섭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1908년 10월 동지 세 사람과 함께 압록강을 넘고 길림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들어갔다.

당시 연해주의 조건도 아주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본군은 러시아정부에 강력하게 항일의병을 저지해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러시아정부는 이 요구를 물리칠 힘이 없어 조선인들이 연해주에서 벌이는 의병활동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 일제 경찰은 홍범도가 삼수, 갑산 일대에서 사라지자 밀정을 풀어 그의 행방을 쫓은 끝에 연해주에 있음을 알아냈다. 그를 체포하려는 경찰이 연해주 일대에서 출몰했다.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군비를 마련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하를 국내로 보내 모금했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홍범도는 1909년 6월 무렵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포수들이 모여들어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인석이 편지를 보내 격려하면서 역량을 키우라는 권고를 했다.

1910년 3월 무렵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조직, 장백현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둔전을 일구며 농사를 지어 군량미로 공급하기도 하면서 연해주, 만주 그리고 국내 의병들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그가 정예부대로 의병을 편성한 것은 무기 군량미 등 여러 조건을 따질 적에 현실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의 활동무대는 1919년 정식 독립군을 창건할 때까지 국경 일대에서 게릴라 전법으로 전개되었다. 일본군과 경찰 그리고 국경수비대는 끝내 그를 잡지 못했다. 이후 갑산·무산·종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내에서의 항쟁의 한계와 근거지 건설에 기반을 둔 지속적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지린[吉林]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11년 망명 직후 서간도 만간구(萬干溝)에서 차도선·김택룡(金澤龍)·홍사현(洪思鉉) 등과 함께 의병 중심의 친목회를 조직하여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두·광산·농업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노동회(勞動會)를 조직, 임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했다. 아울러 이종호(李鍾浩)·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된 권업회(勸業會)의 사찰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니콜리스크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했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러시아 10월혁명을 탄압하고 백위파(白衛派)를 지원하면서 한인(韓人)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연해주 지방에 침입하자, 호범도는 김만겸(金萬謙) 등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대한국민회의(大韓國民會議) 간도·훈춘[琿春] 지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10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적군(赤軍)과 함께 반일·반백위군 투쟁을 벌였다.


1919년 우수리스크를 거쳐 중국령 따차무정재[草帽頂子]·하마탕[蛤莫塘]을 경유하여 국내로 진군하면서 부대를大韓獨立軍)으로 개칭·재편했다. 같은 해 8~10월 혜산진·만포진·자성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다음해 3~6월 온성·종성 일대로 진격했다. 이어 1920년 5월 28일 봉오동에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武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부대 및 신민단(新民團) 독립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제일군(北路第一軍) 사령부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중대병력을 궤멸시키고 다음날 후안산(後安山)에서 적 대대병력을 격파했다. 이어 추적해오는 일본군 19사단 병력을 7일 새벽 봉오동으로 유인, 매복전술로 적 300여 명을 사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대한독립군의 근거지를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이도구(二道溝)로 옮기면서 같은 해 9월 신민단·의군부(義軍府)·국민회군·한민회군(韓民會軍) 등 8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金佐鎭) 부대, 최진동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의 백운평(白雲坪)·완루구(完樓溝)·천보산(天寶山)·고동하곡(古洞河谷) 등에서 일본군 37여단 1만 5,000여 명을 맞아 싸워 3,000여 명을 살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의 대승리

1919년, 독립운동은 새로운 정세를 맞이했다. 국내의 3·1운동에 힘입어 각지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재정비되거나 새로이 조직되었다. 북간도에서도 용정과 훈춘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장백현에서는 천도교도들이 일본헌병대를 습격했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진에서 종래의 의병과 포수 4천여 명을 모아 대한독립군을 정식 창설하고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홍범도는 이 독립군을 이끌고 혜산진과 갑산의 일본군을 습격했다. 이어 백두산에 근거지를 두고 두만강 연안인 자성, 강계, 만포진, 회령 등지에 있는 일본군영과 경찰관서를 공격했다. 이즈음에 와서는 병력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독립군은 예전과는 달리 대한독립군의 이름으로 고유문을 각지에 보내고 경찰과 보조원에 대의를 밝히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홍범도는 주변의 정세와 조건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는 독군부(督軍府)의 독립군과 연합하여 북로 제1군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드디어 결정적인 시기가 왔다. 그동안 홍범도부대의 활약에 일본군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혔다. 일본군은 대대병력으로 몇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홍범도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지금의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 골짜기)을 전면 공격했다. 당시 독립군은 400여 명, 일본군은 남양수비대 병력 등 300여 명이었다. 1920년 6월 7일 이 골짜기에서 네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피가 냇물을 이룬 뒤에야 정적을 되찾았다.

결과는 홍범도군의 대승이었다. 적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의 전과를 올렸는데 아군은 불과 15~16명의 전사자만을 냈던 것이다. 일본군은 분기탱천했으나 섣불리 재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이것이 청산리-어랑촌(漁浪村)전투의 서막이다. 일본군은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홍범도는 봉오동전투 이후 변화되어가는 정세를 직감했고 새로운 국면에 대처하기 위해 김좌진, 안무, 최진동 등 군사지도자들과 합의하여 새로이 북로군정서 등과 합동작전을 펴기로 했다. 1920년 초기, 북로군정서에서는 노령으로 사람을 보내, 멘셰비키 당국과 교섭하여 기관총 등 무기를 입수했다. 노령에서도 무기를 들여왔다.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독군부 사령관 홍범도는 일본군의 공격에 합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때 홍범도는 직속부대 3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우리가 싸우는 건 저 애들을 위해서지

일제의 음모는 이른바 훈춘사건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중국의 비적을 사주하여 훈춘시내를 약탈하도록 해놓고 이것을 조선 독립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다. 그들의 표현대로 만주 땅에서 활약하는 ‘불령(不逞)스러운 조선인’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는 구실을 만든 것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경신(庚申, 1920년) 대토벌작전이라고 한다. 홍범도는 연합전선을 형성한 뒤 백두산 언저리에 있는 화룡현의 명월구, 이도구,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여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시절의 홍범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목격담이 전해 온다.


1920 경신년 7월 초순(음력) 어느 날 저녁 홍범도는 일을 다보고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 툇마루에 앉아 잠깐 쉬었다. 내가 방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자 홍범도는 나를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옆으로 가 앉으니 이름은 무엇이고 공부를 하느냐고 묻기도 했고 나의 청을 쾌히 들어주어 전투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때 나의 또래들이 많이 모여와 울타리 밖에서 자기들도 함께 이야기를 듣게 해달라고 눈짓, 손짓을 했다. 홍범도의 호위병이 “너희들은 돌아가거라”고 하자 홍범도는 “그 애들을 들여놓아라. 우리가 잘살자고 피 흘려 싸우느냐? 다 저 애들의 앞날을 위해서이지”라고 했다. 홍범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애들은 환성을 울리며 뛰어들어와 함께 들었다. 홍범도는 로투구령을 넘다가 왜놈 수색대를 족치던 전투 이야기를 했는데 쑥대가 움직이는 곳을 겨누어 쏘기만 하면 한 놈씩 뻐드러지곤 했다고 신나게 말했다.
- 양환준의 기록. 연길 김택(金澤) 씨의 《청산리전투에서의 홍범도 장군의 주도적 역할》


이 기록은 그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이때 독립군 총병력은 1,950명, 일본군 총병력은 7,000여 명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白雲坪)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와 어랑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소수의 독립군은 뛰어난 전술로 무수한 화기를 지닌 일본군을 농락했다.

6일 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이 패주하고 말았는데 일본군의 피해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 전사자 1천254명이었으며 부상자를 합하면 인명피해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2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청산리전투인데, 김좌진 장군이 주도한 것으로만 알려져 홍범도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근래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의 활동이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북만주에서 벌어진 반일무장투쟁에서 홍범도와 그가 이끄는 독립군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뒤 이 독립군부대는 일제의 대공세를 피해 소련 ·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현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새로이 단일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을 적에 그는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를 맡았다.


영웅은 사라지지 않는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는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군 토벌에 끌어들이는 한편,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 대병력을 투입하여 보복했다.  북간도 일대의 우리 동포들을 마구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초토로 만들었는데 이 경신대참변으로 3천 5백여 명의 동포가 참살을 당했으며 체포된 숫자는 5천여 명, 50여 개 학교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일제의 학살 만행 및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 공세로 인해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말까지 안투[安圖]를 거쳐 미산[密山]으로 이동하여 재집결했다. 1921년 4월 이만에서 노령·만주의 36개 독립운동단체가 모여 창설한 大韓獨立軍團에서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臨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만주·노령의 독립군부대들을 자유시(自由市)로 불러들였다.


같은 해 6월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上海派)를 지지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측과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는 소련 적군과의 충돌로 인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많은 독립군부대가 피해를 입었으나, 그의 부대는 엄격한 중립을 지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21년 11월 독립군부대들이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되자, 그 대표로서 레닌과 면담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또 유동열(柳東說)·김만겸·김표돌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오하묵(吳夏默)측에 가담했다. 다음해 1월 하순에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인대표로 참석했고,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에 참여하여 최고려(崔高麗)와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으로 활동했다.


독립군은 그 근거지를 러시아 땅 흑하(黑河, 자유시)로 옮겼으나, 이는 일쏘간의 밀약을 알리가 없었던 독립군의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당시 레닌의 적군은 한국독립군에 협조적이었으나 일본군이 침공해 와서 항의를 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볼셰비키는 일본군이 철수조건으로 한국독립군의 해산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자,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무조건 요구했다. 적군은 강제로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반대하는 독립군을 공격해 사망자 46명 등의 피해를 냈다. 1922년 볼셰비키 정권이 일본의 시베리아 철수 조건으로 내건 한인독립군의 해산을 받아들여 이를 명함에 따라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더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이로써 대한독립군의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때 내부의 갈등까지 유발되었는데 홍범도는 중립을 지켰고, 그 죄상을 가릴 적에 재판장의 일을 맡아 처리했다.

같은 해 6월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上海派)를 지지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측과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는 소련 적군과의 충돌로 인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많은 독립군부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의 부대는 엄격한 중립을 지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21년 11월 독립군부대들이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되자, 그 대표로서 레닌과 면담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또 유동열(柳東說)·김만겸·김표돌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오하묵(吳夏默)측에 가담했다. 다음해 1월 하순에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인대표로 참석했고,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에 참여하여 최고려(崔高麗)와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2년 볼셰비키 정권이 일본의 시베리아 철수 조건으로 내건 한인독립군의 해산을 받아들여 이를 명함에 따라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더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김좌진, 이청천 등은 다시 만주로 나왔고,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의 러시아 땅에 영영 주저앉았다. 그리고 레닌당 당원으로 레닌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극동인민대표회의에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23년 연해주 이남 구역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인 관련 장편소설을 집필중인 고려인 작가 정장길(鄭長吉. 65)씨는 홍 장군의 탄신 140주년(27일)을 하루 앞둔 26일 그간 소장해온 1968년 8월27일자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전신. 1938년 창간)의 홍 장군 특집기사를 공개했다.

 

이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3개월 후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일제의 만주지역 독립군 진압작전이 강화되자 연해주를 거쳐 카자흐에 정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세부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여서 주목된다. 1990년 폐간때까지 카자흐 크질 오르다에서 발행된 레닌기치는 특집기사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 1921년 6월28일 이후 홍범도 장군은 휘하 병력 약 300명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고 전했다.

 

레닌기치 기자로 일했던 정씨는 "홍 장군이 연해주로 이동한 1921년은 소련군과 일제 및 러시아 백군(볼셰비키 혁명반대 세력)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있던 시기였다"며 당시 지원세력이 절실했던 `붉은 군대'(소련군)는 홍 장군에게 소련군 편입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소련군은 당시 홍 장군의 독립군 부대외에 연해주로 피신해온 5천여명의 여러 독립군 부대에 대해서도 "우선 소련군과 손잡고 일제ㆍ백군과 싸우면 차후에 조선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며 휘하 편입을 압박했다고 정씨는 설명했다.

  

하지만 대다수 독립군 부대가 항일투쟁이 급선무라며 편입을 거부하자 소련군은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을 일으켜 독립군 제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독립군이 희생됐다. 살아남은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로 되돌아가야 했다.

 

정씨는 "당시에는 연해주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고려인 독립군 부대들이 만주에서 넘어온 조선 독립군 부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있던 데다 소련군마저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군을 끌어들이려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홍 장군은 '일단 살아남아 항일투쟁을 계속한다는 생각을 한 것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그러면서 홍 장군이 1921년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동방근로자대회'에 초청받아 레닌으로부터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후 얼마되지 않아 25군단 조선인 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고 밝혔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홍범도도 그곳으로 이주하여 소비에트 정보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재혼한 아내와 함께 여생을 꾸려 나갔다. 그는 집단농장 관리인 일도 하고 극장의 경비원 일도 맡아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유랑생활을 하면서 동포의 집에 유숙할 때 하루 이상을 머물지 않았다. 동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이라 한다. 노영웅은 이렇듯 초라한 만년을 보냈다.

 

하지만 소련군의 고려인 배제정책이 노골화되면서 1923년 군복을 벗어야 했다. 홍 장군은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일하다가 1937년 카자흐스탄 크질 오르다로 강제이주됐다. 크질 오르다에선 고려극장의 야간 수위 생활을 했으며, 조국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눈을 감기 직전엔 정미공장 근로자로 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크렘린에서의 홍범도 장군

 

레닌기치의 1943년 10월27일자에는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 부고자: 크질 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이라는 부고가 실려 있다. 현재 그의 묘소는 크질 오르다에 있다.



홍범도는 재혼한 부인과 연해주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후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사진은 1929년 연해주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장남 양순은 1908년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


그는 평생 선비들이 쓰는 별호를 짓지 않았는데 민중은 그의 별명을 비장군(飛將軍, 용맹한 장수 또는 명장에게 붙이는 별명)이라 불렀다. 호는 짓지 않았지만 민중은 그를 친근한 벗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왜 만년에 만주에는 일본군이 진주해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상해나 연안으로 나오지 않고 러시아 땅에서 안주했을까? 이 점이 수수께끼다. 그러나 그의 동상이 자유시에 세워져 있고 중국땅 봉오동과 어랑촌 일대에 그의 공적비를 세우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남쪽에서도 그의 독립투쟁사의 위치를 새삼 재발굴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홍범도는 개인적 불행과 민족적 비극을 일치시켜 철저한 신념과 굳센 의지로 민족모순과 봉건모순을 체험적으로 터득하며 독립투쟁사에 가장 빛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1943년 10월 중앙아시아의 크슬오르다에서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의 묘 앞에 동상을 세우고 그 아래 사적을 기록해 두었다. 그곳의 고려인 동포들은 설날이나 기일에 어김없이 그의 묘소를 찾아 참배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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